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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적으로 한다든가, 이런 건 전혀 아니고요. 순수하게 난이도 조정과 핵심내용 위주, 다종의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위주로 해서, 목표는 난이도를 낮추는 거죠" -교육부 관리의 말-
교육부가 최근 EBS 한국사 교재에서 박정희정권의 국회 해산, 유신헌법 선포, 전태일 열사의 관한 기술 등을 삭제한 것으로 드러나 사전검열과 역사왜곡이 아닌 가라는 지적에 대하여 교육부 관리가 위와 같이 변명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역사의 난이도를 조종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역사의 해석은 해석하는 당사자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그 기술은 명확한 팩트(사실)가 돼야 한다는 것이 일 국민인 나의 소신이다.
1961.5.16일 미명에 44살 먹은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하는 일단의 군인들이 봉기하여 한강대교로 넘어온 서부전선의 해병 2여단 병력과 함께 국방부를 점령함과 동시에 방송국을 점령하여 방송실로 난입. 박 종세 아나운서에게 시켜 혁명공약이라는 타이틀로 전 국민에게 쿠데타의 발발을 알렸다. 이것이 5.16 쿠데타 당일 새벽의 팩트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이 역사적 사실을 구국의 혁명으로 볼 것이냐 군사반란과 정권 찬탈로 볼 것인가의 해석의 문제는 역사를 읽는 당사자의 몫이다.
당시 나는 열 살의 유소년으로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퇴계로 변 예장동 집 2층에서 총성을 듣고 잠을 깼다. 놀라서 잠이 깬 자식들에게 선친은 쿠데타라는 어휘 대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아마 곧 진압 될 것이라고 낙관 한 듯하였다. 명색이 60만 대군의 5천 명 정도이면 조족의 지혈이 아닌가. 그러나 소심한 성품의 모친은 심상치 않게 느꼈는지 집안의 장래와 선친의 사업을 우려하였다. 모친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5천 명의 다부진 장군과 병사들은 곧 나라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얼마 안가서 선친의 사업은 표류하기 시작 하더니 엎어졌던 모양이었다. 속절없이 멀쩡한 집이 날아가고 당시 변두리에 속하던 불광동에 전원주택 삼아 마련해 두었던 작은집으로 쫓겨 갔다. 불광동에서 학교가 있는 퇴계로까지 통학 하려면 당시 드럼통을 판금작업으로 펴서 차체를 만들었던 궤짝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 했다. 군사 쿠데타가 나와 가족에게 고난의 세월을 만들어 준 것이다.
쿠데타 지도자 박 장군의 친자도 당시 국민학교 4학년생으로 열 살의 소녀였다.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자 당장 혁명으로 포장 되면서 그는 혁명 지도자, 구국의 지도자의 친자로 신분이 상승 하였다. 말하자면 퇴계로 예장동의 열 살 먹은 소년은 쿠데타를 기화로 쪽박을 차게 되고 신당동의 소녀는 영화(榮華)의 앞날이 열린 것이었다.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역사에 휘둘리는 면이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쪽박을 찬 소년은 그 이후로 모진 세월을 살았다. 기름을 때던 집에서 연탄아궁이로 난방을 하는 집에서 살게 되니 일산화탄소 가스(산소 가스가 아니다)를 마셔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제법 공부에 취미가 있던 머리가 시나브로 나빠져 공부를 등한히 하고 불량하고 불민한 성장기를 보낸 것은 오로지 일산화 탄소가스 중독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자고 나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서민들이 일상화 되었다.
쿠데타 반란군은 그들 자신이 기록한 '혁명백서'에 장면 민주당 정권 출범 15일이 경과된 시점에서 쿠데타를 모의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장면 정부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북괴의 침략(제 2의 한반도 전쟁)을 저지하기 위하여 혁명을 했다는 명분을 내 세웠다. 이것은 엄연한 팩트이다. 이 역사의 사실을 읽는 국민은 당연히 해석이 가능하다. 명분이 있는 쿠데타 인가, 정권을 찬탈 하고자 한 쿠데타 인가? 그 해석은 자유다. 하지만 명색이 역사를 불편부당하게 해석해야 할 학자 등 식자들은 사정(私情)에 치우치거나 정치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필부 대중의 역사해석을 돕는다는 것이 자칫 역사를 신화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결코 신화가 돼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내가 쿠데타를 기점으로 쪽박을 차게 되어서가 아니라 불편부당하고 냉정한 객관적 판단으로 5.16은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한 쿠데타 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나의 해석이다.
장면 정부는 민의에 의하여 수립된 정부이다. 정부 출범 15일이 경과 하였다. 그러면 명실상부한 신생정부이다. 무능하고 말고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사회혼란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북괴의 재침략? 상식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당시 한국전이 정전협정으로 휴전 된지 불과 7년이 경과되었다. 북쪽은 미군의 대 폭격으로 주요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다. 공업시설도 당연히 별로 남아 난 것이 없을 것이었다. 김일성이 무슨 여력으로 그 짧은 기간에 군비를 정비하고 경제력을 키워 재침을 할 것인가? 당시 중국의 모택동은 연이은 국정의 실패로 자기 코가 석자나 빠져 있었다. 되지도 않을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다가 국가 졍제가 파탄 났다. 그로 인하여 국민은 도탄에 빠져 수 천 만 명이 굶어 죽을 지경 이었다. 류사오치, 팽더화이, 덩 샤오핑등 좌파 수정주의자들은 모택동의 노선으로 나라가 망조 들었다고 공격을 해 대는 바람에 모택동은 정치 투쟁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후르시쵸프는 서방 화해 노선을 선택한 인물이었다. 어떻게 김일성의 남침을 도울 수 있었겠는가? 상식에 맞지 않는 분석 일뿐만 아니라 김일성이가 칠푼이가 아니라면 남침은 언감생심 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의 사정이 그러하니 쿠데타 반란군의 김일성 남침 주장은 근거 없는 늑대 소년의 아우성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쿠데타 세력의 반란 명분은 성립이 되지 않으니 나는 정권 찬탈을 위한 군사반란, 즉 군사 쿠데타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내가 읽은 역사의 팩트에 대한 해석이 잘 못 된 것일까? 이 게시판의 친 박 성향의 독자들이 답변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와 동 시대를 살아온 쿠데타 지도자의 친자는 그 역사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 이미 공식화 되었다. '구국의 혁명'이라는 역사 해석이 공식화 되었다. 나는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 선친이 한 역사적인 사업을 폄하 할 수 없는 친자의 입장을 이해 할 수 있다. 그에게 스베틀라나(스탈린의 외동딸)의 역사 해석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역사를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은 읽는 이의 지성적, 정서적 권리일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국(救國)의 혁명에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구국은 망국(亡國)을 전제로 한 말이다. 망국이 있고나서 구국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장면 정권이 정부 수립 15일 만에 나라를 말아 먹었어야 성립할 수 있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리 무능한 정권이라도 정부 수립 15일 만에 나라를 말아 먹기는 수월한 일이 아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기에는 15일 이라는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15일 만에 나라를 말아 먹어 망국이 되게 할 수 있을까? 휴전선을 개방해서 남침을 유도해야 하나? 일본국에 뒷돈을 받고 제주도를 팔아 먹어야 하나? 하루 만에 한일 협정을 조인하여 국회 비준도 받지 않고 나라경제를 전부 일본에 맡겨야 가능 할까? 아무리 그래도 시일이 너무 없다. 그러니 나는 구국의 혁명이 아니라 정권 찬탈의 쿠데타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쿠데타의 성공으로 나의 운명이 쪽박을 차게 됐다고 앙심을 먹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졸렬한 필부라 해도 나는 사감을 역사에 결부시켜 해석하는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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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11년 차에 단행 된 유신 변혁이 구국의 정치 변혁이냐 정권 연장 책이냐에 대한 해석은 역사를 읽은 이의 판단에 맡길 수 있다. 나는 정권 연장책이라고 해석 한다. 이를 또 구국의 정치적 결단 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 해석은 어디까지나 자유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만큼은 팩트를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생방송으로 유신 개혁을 선포하였다. 요즘 말로 하면 국가개조이다. 국가의 체제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훗날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날 저녁에 대통령 선언이 끝나자마자 박정희 3공 정권의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국회의원 수십 명, 학자, 학생 등 수 백 여 명이 잔혹한 고문을 받기 위하여 정보부, 보안사, 대공 수사대등으로 불문곡직 체포되어 끌려갔다. 끌려간 다음에는 인정사정없는 매타작이 벌어졌다. 무서운 일이었으나 엄연한 역사적 팩트이다.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이세호 전 육군 장성은 그날 보안사에서 기왕의 부하들일 수밖에 없는 젊은 군인들 앞에서 발가벗고 매를 맞았다. 당사자가 라디오 생방송에 나와 수치를 무릎 쓰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증언했으니 이것 또한 엄연한 유신변혁 역사의 팩트인 것이다. 이를 감추거나 왜곡하면 안 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뜨완느가 화장을 곱게 하고 도도하게 단두대로 걸어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 집행인 당통의 단두대 칼에 목이 잘린 역사의 팩트를 감추거나 왜곡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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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역사는 도대체 누가 기록하는 것인가? 사마천(司馬遷) 같은 엄격한 사관이 없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길지도 않은 66년의 역사가 사실을 근거로 기록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한 없이 초라해 질 수밖에 없다. 그 기록이 역사 교과서가 됐든, 별도 기관의 역사학자의 기록물이든 간에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다는 자세가 없이 올바른 역사의 정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 해석과 기록은 별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교육부의 그 관리처럼 사관의 혹은 학자의 역사 기록물에 대하여 이리저리 간섭하고 참견 해 놓고 나서 ‘난이도 조종이니 뭐니’하고 헛소리를 일삼는다면 이 나라 역사는 그 사실의 기록조차 누더기가 될 판이 아닌가?
사마천을 평가할 만한 자격을 갖춘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마천을 천재적인 사관으로 평가하고 사기(史記)가 존재함으로서 중국의 역사는 정립 될 수 있었다고 주장 한다.
사마천은 사형을 앞두고 있던 임안(任安)에 보(報)하는 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분(盆)을 머리에 쓰고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신념으로 빈객과의 교제를 끊고 일야(日夜), 불초의 재능으로 황제의 마음에 들려고 직무에 충실하여 왔습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직무에 충실했던 사마천은 맹장이며 충신이었던 이릉(李陵)장군을 변호 한 일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을 당하였다. 생식기가 뿌리부터 잘린 것이다. 모든 신하들이 한무제의 심기를 살펴 이릉의 패전을 비판 할 때 사마천은 분연히 일어나 이릉이 패전한 일을 변호한 것이다. 사마천은 속절없이 궁형을 당하고도 3년의 옥살이를 거치고 나이 50세에 출옥하여 그 처절한 몰골을 해 가지고 죽간에 5년의 세월을 들여 혼신의 힘으로 중국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한고조 유방의 본처인 여태후(呂太后)는 유방이 비천한 건달 노릇으로 세월을 보낼 때 혼인한 본처이다. 이 여후(呂后)의 성정이 보통 잔인한 것이 아니었다. 한고조 유방 생전에 척희(戚姬)라는 여인이 그 미모로 인하여 한고조의 총애를 받았다. 고조 유방이 죽고 아들인 혜제가 등극하자 유약한 황제를 대신하여 여후에게 실권이 주어 졌다. 여후는 자신이 미워하거나 자신을 경원했던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작정을 한 듯하였다. 제일 먼저 척희가 걸려들었다.
여후는 척희를 붙잡아 오게 하여 팔 다리를 잘랐다. 눈을 인두로 지져 장님을 만들었다. 귀에는 끓는 기름을 부어 귀머거리로 만들었다. 입에다 독약을 부어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돼지들이 사는 변소에 쳐 넣었다. 인분을 뒤집어쓴 척희는 다만 고통에 겨워 꿈틀거릴 뿐이었다. 여후는 아들인 황제를 불렀다. 변소에서 꿈틀거리는 척희를 보여 주었다. 착한 심성의 혜제는 그 자리에서 실성 한 듯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렇듯 여후의 통치술은 주변에‘공포심’을 주는 것이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포악한 독재자는 공포심을 통치술의 근간으로 삼았다. 민초들에게 공권력은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 이 공권력이 공포심을 유발 할 때 통치는 전지전능이 되는 것이다.
한무제 치하에서 궁형을 당한 사마천이 이렇듯 한고조의 본처인 여태후의 악정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한무제에 대한 평가는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어떻게 일개 사관으로서 이런 용기가 있을 수 있었을까? 사마천의 역사를 대하는 엄격함.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관으로서의 책임감등을 거론할 수 있지만, 아무려나 오늘날의 한국역사 기록의 실정과 관료들의 기회주의적 무문곡필을 생각하니 그저 암담할 뿐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저술한 E.H. 카는 역사의 기록을 이렇게 말 한다. ‘역사는 있었던 사실(fact)과 함께 관찰 과 고찰(observation & contemplation)이 병행 되어 쓰여 져야한다.“
이 말은 필부의 차원을 넘어서는 저명한 역사학자가 할 수 있는 말 일 것이다. 문제는 사실(fact)이 왜곡 되거나 첨삭 될 판에 올바른 관찰과 고찰이 있을 수 있을까? 과문한 필부는 이것을 우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