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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이라는 학자가 그러지 않아도 작금 빈사 상태에 빠져있는 진보세력을 ‘싸가지 없는’으로 수식하여 책 제목을 정하고 책을 펴내니 이를 한겨례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이는 금세 실시간으로 나라에 퍼졌다. 인터넷 세상이 아닌가. 하루 종일 진보 세력 말살에 골몰하던 이 나라 극우보수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왔구나! 왔어!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절묘한 표현이 있을 수 있나? 그래서 어제부터 진보세력은 싸가지 없는 세력으로 고정 수식되게 생겼다. 당장 찌라시들이 이를 받아 개발 새발 칼럼이니 사설을 때리기 시작 하였다. 학자들의 영향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 제대로 된 학자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이 나라에서 서양문화를 바탕으로 한 현대 교육이 이루어진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해방 후부터 따지자면 고작 66년이다. 학문적 체계가 빈약하고 따라서 학자들의 연구 치적도 일천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래로 급속히 서양학문을 받아들이면서 모든 분야에서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 졌고 따라서 명망 있고 깊이가 있는 학자들을 양산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나라 대학들은 아카데미적 학풍이 자리 잡기보다는 대기업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 용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명색이 학자라는 타이틀을 얻어 대학 강단에 서는 자들 중에 일반인들에게까지 그 지적 명성이 전해진 바는 별로 없다. 도대체 그들은 자신만의 이론과 논리로 책을 저술하여 발표하지 않는다.
년 전에 하버드 대학교수인 마이클 샌들(Michael J. Sandel)교수가 자신의 강의를 정리한 책, 정의(Justice)를 출간 했을 때 미국에서는 고작 수십 만 부를 팔아먹었을 뿐이지만 한국에는 거의 100만부가 팔렸다. 인구 비례는 미국이 한국의 6배에 달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기현상인가? 한국의 필부들이 특별히 지성적이고 열독률이 높아서 일까? 전체적인 도서 구입 통계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 한국의 독자들은 제대로 된 학자들의 책에 목말라 있다는 결론인 것이다. 특히 일반인이 읽을 수 있게 저술된 정치, 경제, 사회학 서적에 갈증을 느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마이클 샌들의 책 ‘정의’가 장안의 지가를 올리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만큼 이 나라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반증도 되는 것이다.
그럴수록 학자라는 작자들이 연구를 하고 저술을 하여 일반 대중을 계도해야 할 책무가 있음에도 잡문에 불과한 책들은 더러 출판해도 제대로 된 책을 출판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열심히 해야 밥을 먹는다. 자영업자는 거의 하루 20시간 이상을 장사 준비와 장사에 골몰 한다. 그런데 이 나라 학자들은 그만큼 자신의 책무에 충실 한가? 경제가 난맥상을 보인지도 오래인데 캠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가 여러 권의 책을 냈을 때 이 나라 경제학자들이 서민들에게 어필한 책을 저술하여 출판한 것이 있었던가?
학자가 학자의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논문이나 대필 시키고 도용하고 연구비나 착복할 궁리나 하는 사회. 딸 같은 학생들을 학생으로 보지 않고 룸싸롱 접대부로 착각하여 모텔 타령이나 하고 성희롱이나 하는 사회. 찌라시 다름없는 방송에 악착 같이 나와서 되지도 않는 잡설을 늘어놓는 학자타이틀을 뒤집어 쓴 자들. 정치권력을 의식하여 영합하는 발언과 잡문을 발표하여 정치집단에 눈에 들어 국회의원 말석이라도 하나 얻어 보려는 얄팍함. 이런 종류들은 이미 골방에 처박혀 학문을 연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책을 쓰려고 해 봐야 머리속에 들은 이론이 없다. 그러니 마지못해 잡문이나 끄적여 제목만 그럴듯하게 달아서 출판하는 것이다. 잘 되면 다행이고 안 되도 출판업자가 손해지 본인이 손해 갈 것은 없는 것이다. 세상에 할 일이 없어 잡문을 엮어 놓은 것을 돈 주고 사서 읽을 것인가? 제목만 센세이셔널하게 갖다 붙여 많이만 팔아먹자는 수작은 결코 통하지 않을 줄 안다.
고 이영희 교수는 정권의 압박으로 신문사 외신부장에서 잘리고 2년 만에 얻은 통신사에서도 잘리고 어렵게 대학교 말직 부교수로 취직 하였다. 말이 교수지 사실 처음엔 보잘 것 없는 직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외국어 실력(중국어,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퍼진 광범위한 문헌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바쁜 와중에도 엄청난 수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엮어 여러 권의 불멸의 저서를 펴냈다. 이미 정치 사회분야의 고전이 된 책들이다.
필부들과 달리 학자들이 전 세계의 고전과 현대의 문헌들을 수집하여 연구를 하면서 자신의 글을 써 내려면 무엇보다 외국어 실력이 탁월해야 한다. 중국어를 모르면서 중국학을 한다고 할 수 없다. 중국의 정치 문화를 논한다고 할 수 없다. 영어와 프랑스어 독어를 모르고 서양의 광범위한 문헌을 이해할 길이 없다. 하다못해 서구의 학문이 깊고 넓게 연구되어 축적된 일본에서 그 문헌들을 차용하여 연구 하려해도 탁월한 일본어 해독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명색이 학자 주제에 정치권에 한 눈을 팔고 여학생들을 집적거리고 연구비나 착복하여 룸싸롱의 젊은 작부들 만날 궁리를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말이 쉬워 외국어지 외국어를 제대로 한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A4지에 인쇄된 프린트 물을 읽는 수준이 아니다. 외국어로 된 문헌을 빠른 속도로 읽고 이해하려면 어설프게 익힌 외국어 실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학자 타이틀만 걸어 놓고 있는 자들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다. 클린튼 전 대통령이 보통 500페이지 정도로 출간되는 페이퍼백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라고 한다. 전문 서적은 두 시간 정도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박람강기한 식견을 지녔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대국의 대통령을 지낸 것이다. 거기에 비하여 부시는 전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알려 졌다. 아예 평가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자라고 다 같은 수준의 학자가 아니듯이 음악가도 다 같은 수준의 음악가가 아니다. 년 전에 작고한 저명한 음악가 ‘로린 마젤’은 수백 페이지짜리 교향곡 악보를 술술 넘기면서 다 외웠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저명한 음악가인 정명훈의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음악회 연주일정이 잡히고 수 십일의 준비 기간 동안에도 다 외우지 못하고 연주회장에서 악보를 넘겨가며 지휘하는 음악가들도 부지기수이다.
한겨레 언론에서 대서특필 할 정도로 나름대로 이 사회에 영향력이 있어 보이는 강 준만 이라는 학자가 ‘싸가지 없는 진보’라 규정하고 이를 받아 수구 보수 찌라시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싸가지 없는 진보’노래를 부르게 생겼으니 이제 진보는 이 나라에서 죽어야 할까?
이 나라 찌라시 언론인들이나 공부 열심히 안하는 학자들이 절대로 비판 하거나 비난 하지 않는 이 나라 역대 독재정권 하에서 ‘진보’나 ‘혁신’은 금기였다. 권위주의 정권 이다보니 정권이 다 알아서 나라를 운영할 판에 필부 대중들이 진보니 혁신이나 하는 것이 못 마땅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모두 용공혐의가 씌워 졌다. 혹독한 탄압과 형사처벌이 따랐다. 심하면 법의 심판으로 교살 당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좋기는 좋은 것인지 오히려 수구 보수정치 집단에서 먼저 진보와 혁신을 선창하는 일이 생겼다. 지난 대선 때의 일이다. 진보와 혁신없이 인류의 문명이 발달할 수 없었으니 그들의 주창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창을 했으면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닐까? 구구한 필설은 삼가겠지만 지금 보수정당이 혁신과 진보적 행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 한다면 누가 수긍할 것인가?
잡설(雜說)과 잡문(雜文)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최소한 한국사회 내에서는 그렇다. 칼럼이니 에세이니 사설의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세상에 허구 많은 잡놈들이 선량한 시민일 수 없듯이 잡문은 잡문일 뿐이지 결코 에세이나 칼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본말전도의 세상에서는 가능하기도 한 모양이다. 예사로 책으로 엮어서 시중에 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