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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메뚜기로 인해 농작물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고구려에 8차례, 백제에 5차례, 신라에 19차례 등장한다. 헌데 한때 이와같은 삼국사기 메뚜기떼 피해 기록과 관련 흥미로운 주장이 있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메뚜기 피해’의 기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가을녁 들판을 뛰어다니는 그와같은 수준의 메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메뚜기’는 가을철 시골 농촌 들판에 가끔씩 보이는 기껏 벼이삭이나 좀 갉아먹다 마는 그리고 먹을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는 시골 아이들 간식용으로 쓰여지기도 했다는 그러한 ‘벼 메뚜기’ 아닌가. 헌데 ‘메뚜기 피해’가 굳이 사서(史書)에 기록될 정도라면 그 정도의 작은 메뚜기 몇 마리 수준으로 입는 정도는 뛰어넘는 보통아닌 심각한 피해였을것이라는것은 상식적으로도 쉽게 생각해볼수 있는일이다.
가령 무령왕 21년 8월의 기록만 해도 메뚜기 피해와 기근으로 인해 신라로 도망간 민가(民家)가 900여호에 이른다고 했으니, 이 정도면 우리가 흔히 생각할수 있는 기껏 가을 들판의 벼 이삭 몇 개나 좀 갉아먹다가 아이들 입속으로 들어가 최후를 맞게 되는 그 정도 수준의 메뚜기떼는 분명 아니었던것 같다. 따라서 바로 이와같은 기록들을 근거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메뚜기는 우리가 가을들판에서 흔히보는 그와같은 ‘벼 메뚜기’가 아닌 중국대륙에 종종 출몰 농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곤 했다는 소위 황충(蝗蟲) 또는 ‘슈퍼 메뚜기’라 불리는 메뚜기떼들일것이며, 바로 그러한 ‘슈퍼 메뚜기’로 인한 피해가 있다는것은 고구려나 백제는 물론 심지어 신라까지도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증거라는 것이 그네들의 주장이었다.
헌데 사실 메뚜기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또한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 메뚜기의 종류는 전 세계적으로만 2만여종에 달하고 국내에 서식하는 메뚜기도 그 종류가 200여종에 달한다고 하니, 지금와서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메뚜기떼가 과연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벼 메뚜기’일지 아니면 중국대륙에 출몰한다는 ‘슈퍼 메뚜기’일지를 추정해 보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다만 중국대륙에서는 확실히 그와같은 ‘슈퍼 메뚜기’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고 꽤나 자주 있었던것 같다. 가령 당태종 이세민이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자 친히 그 메뚜기를 대령하게 해서 ‘백성들의 오장을 긁어먹느니 내 오장을 갉아먹으라 !’고 호통을 치고는 그 메뚜기를 손수 날로 삼켰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고, 삼국지연의에도 한창 대립하던 조조와 여포군이 황충떼 피해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휴전상태에 들어가는 상황이 등장하기도 하니, 중국대륙이 ‘슈퍼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에 자주 시달렸던것만은 분명한것 같다.
헌데 우리의 메뚜기떼로 인한 피해 기록은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고려사와 조선왕조 실록에도 종종 나온다. 설사 삼국사기에 나오는 메뚜기떼 피해가 중국에서 발생하는 ‘슈퍼메뚜기’로 인한 피해라 할지라도 그럼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메뚜기떼 피해 기록은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반도 북부와 만주,요동에 걸쳐있었던 고구려라면 모를까 엄연히 한반도 이남지역에 유물,유적이 수두룩하게 남아있는 백제와 신라를 그 무슨 메뚜기에 관한 기록 가지고 ‘대륙삼국설’ 이론까지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런데 얼마전 전남 해남지역에 수십억마리 메뚜기가 출몰 농가에 대대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꽤 충격적이고 놀라운 보도가 있었다. 신문기사나 화면에 논밭과 길을 수두룩하게 뒤덮은 메뚜기떼의 모습은 확실히 그 이전 가을들녁을 한가로이 뛰놀던 그와같은 ‘벼메뚜기’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어떻게 갑자기 이와같은 메뚜기떼가 출몰하게 되었는지 그 진상도 궁금하고, 이제 곧 수확철로 접어드는데 갑작스러운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적잖은 피해를 입게된 해남지역 농민들의 생계도 무척이나 걱정되는 일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세월호사태나 정치권 공방등 그러잖아도 여러 가지로 민심이 흉흉할 때 ‘메뚜기떼 습격사건’까지 겹치고 말았으니 인터넷 관련기사에 넘쳐나는 댓글들도 그야말로 요지경이다. 대개는 ‘이게 다 OOO탓’이라는 식의 정치공방형 댓글이 주를 이루고 있고 이따금은 ‘메뚜기’란 별명을 가진 모 개그맨의 경우와 연관시켜 제법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이들도 가끔씩 보인다. 또 혹자는 세월호사태나 정치권 공방등으로 잔뜩이나 흉흉해진 민심에 이런 ‘메뚜기 습격사건’ 까지 겹친상황을 우려하기도 하고 ‘지구온난화’등 여러 가지 기상이변과 연관시켜 또 다른 큰 재앙의 전조나 예고는 아닐지 우려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너무 한가로운 이야기를 하는것 같긴 하지만, 여하튼 기왕에(?) 출몰한 메뚜기떼일진대 역시 한번 집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는일이 바로 삼국사기등 사서에 기록된 ‘메뚜기떼’ 출몰을 갖고 ‘대륙백제설’ 혹은 ‘대륙삼국설’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문제다.
농업진흥청 발표에 의하면 이번에 해남지역에 출몰한 메뚜기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벼 메뚜기’가 아니고, 메뚜기목에 속하는 ‘풀무치’ 바로 황충(蝗蟲)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삼국사기에 나온 ‘메뚜기 피해’와 관련된 원 한자도 바로 ‘황충(蝗蟲)’을 의미하는 그 ‘황(蝗) : (황충 황)’이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메뚜기 피해에 나오는 ‘황(蝗)’도 마찬가지다. 중국대륙 한복판에서나 종종 일어나는 줄만 알았던 황충떼로 인한 피해가 한반도에도 그렇게까지 자주는 아니더라도 평균 수십년만에 한번꼴로 그러나 지난 수천년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던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근 반세기 이내에는 그와같은 ‘풀무치 떼’의 집단 출몰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어본 바가 없는데, 하필이면 세월호 사태이후 잔뜩이나 흉흉해진 민심에 짜증나는 정치권 공방에 지구온난화로 기상이변까지 잦아지는 이 시점에 황충떼까지 찾아왔으니 매우 반갑지 않은 손님들인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삼국사기에 나오는 ‘황(蝗)’으로 인한 피해를 갖고 ‘슈퍼 메뚜기’ 운운하며 백제나 신라가 실은 한반도에 있었던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었을것이오 하고 주장한 ‘대륙백제설’, ‘대륙삼국설’ 주장론자들을 머쓱하게 만들 일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사족(蛇足) : 한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80년대 보물섬에 연재되던 윤승운 화백의 만화 ‘맹꽁이 서당’엔 메뚜기 출몰과 관련 ‘당 태종 이세민’의 일화가 조선의 3대임금 ‘태종 이방원’의 일화로 잘못 수록, 소개되어있다. 만화내용에는 ‘백성들 오장을 긁어먹느니 내 오장을 긁어먹으라’며 슈퍼 메뚜기를 삼켰다는 그 유명한 이세민의 일화를 바로 태종 이방원이 하는 것으로 그려져있는데, 만화에선 심지어 이방원(?)의 식탁에 끌려온 메뚜기가 ‘여보쇼 !!! 무식한 소리 마쇼 !!! 난 초식동물이라 사람 오장 긁어먹을 일 없소 !!!’ 라며 제법 억울한듯 항변까지 한다. 윤승운 화백이 어쩌다 이세민의 저 유명한 일화를 이방원의 일화로 착각해서 저와같은 만화를 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괜시리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일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