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는 지난 26일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다음달로 예정되어 있는 교육과정개편과 맞물려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시키기 위해 간보기에 나선 것이다. 당장 학계와 교육계에서는 토론회를 개최한 저의에 우려를 표하며 정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에서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한국사 국정교과서 논란이 다시금 한바탕 회오리를 불러일으킬 조짐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 초에 이르기까지 교학사 역사교과서 논란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 논란은 그동안 주도면밀하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교과서 만들기 작업을 추진해 온 박근혜 정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일선학교 채택율이 0%대를 기록하며 완전히 체면을 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당시 새누리당 대표였던 현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교과서를 하나 만들었는데 1%의 채택도 어려운 나라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 정치인의 한사람으로서 아주 비통하게 보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채택율 0%의 현실을 비통해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다수 국민들의 비통함을 유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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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왜곡논란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 역시 이 대열에 가세했다. 그는 "교육부의 엄격한 검정을 거쳐 채택된 역사교과서가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보다 직설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는 '엄격함'이 일반 시민들이 알고 있는 '엄격함'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에 있었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던 것은 (김무성 대표의 주장과는 달리) 교육부의 '엄격한' 봐주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검정단계에서부터 치면 무려 2,122건에 달하는 내용이 수정•보완된 함량미달의 교과서였다. 이 정도면 책 하나를 완전히 다시 쓴 것이나 다름이 없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불량품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 자체를 용납치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실세들과 수구세력들은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일선학교에서 채택되지 않은 것을 오히려 분개해 했다.
역사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학계와 교육계, 시민단체와 일반시민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에 부딪힌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긍정적 사관의 좋은 교과서라 신봉하고 있는 사람이 현 교육부장관과 집권여당의 대표라면 역사교과서의 이념논쟁마저 정치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이런 의구심을 더욱 구체화시킬 수 있는 사례가 어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심사를 거친 8개의 교과서 중 절반에 해당하는 4곳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지 않고 있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네티즌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가 교과서에 기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다는 내용 일색이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반응들이라 생각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필자 역시 이런 분위기에 흽쓸려 이번 논란의 핵심을 보지 못하고 넘길 뻔 했다. 그런데 냉정을 찾고 논란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논란의 핵심이 교묘하게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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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여 교육부장관은 이번 논란에 "국민이 아이들에게 각기 다른 역사교과서로 가르칠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공통적으로 배워야 하는 내용을 다루는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했다.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지 않은 유관순 열사 논란을 통해
'국정교과서 도입의 필요성'을 교묘히 강조한 것이다. 의도한 것이라면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 기지와 용이주도함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유관순 열사에 대한 논란조차 국정체제로의 환원을 위한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 정부여당의 모습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정부여당이 추진하려는 국정교과서 전환문제는 이미 사회적 합의를 거쳐 그 부적절함이 구체적으로 입증이 된 사안이다. 국정교과서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 유신체제의 홍보와 군사독재정권의 미화에 악용되어 왔고, 학생들에게 획일적이고 편향적인 시각과 인식을 주입하며 수많은 폐해를 양산해 온 구시대의 산물임은 이미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반영하듯 서두에 언급한 교육부 주최의 토론회에서도 참가자 대부분이 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했고, 전국의 초•중•고 역사교사들의 97%가 국정전환에 반대하고 있으며, 학계와 교육계 시민단체 및 일반시민들도 압도적인 반대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국정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를 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이 체제가 얼마나 후진적이고 시대착오적인가를 여실히 입증해 준다. 결국 사회적 공론과 합의를 거쳐 지난 2002년 철거된 이 위험한 흉물을 다시 복원시키자는 것은 이 정부 스스로 구시대로 회기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이명박 정권 이후로 집권세력의 역사왜곡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국정교과서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본 글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차라리 그보다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면 벌어질 일을 상상하는 편이 더 낫다.
도시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거대도시로 탈바꿈한 서울을 가리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코도 베어가는 곳"이라고 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쉽상이란 의미일 것이다. 이번 유관순 열사의 교과서 기술 누락 논란이 특정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코가 문제가 아니라 역사마저 강탈당하는 무시무시한 세상이다. 뜬금없는 유관순 열사 논란은 정치 그 배후에 숨겨진 무섭고 서늘한 속성을 발견해낼 수 있는 선례다. 우리는 이 선례를 똑똑하게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힘없는 서민들이 잃어버릴 것들이 어디 역사에만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빼앗길 것들이.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