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들에 둘러싸인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 -김영오씨는 이제 당신에게 불어 닥친 역풍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싸워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 '바리새파(Pharisees)' 라는 유대교의 한 교파가 있었던 모양이다.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 3대 교파 중의 하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스라엘의 극우 유대교인들에게 물어 볼 일이다.
아무튼 그 시절에는 유대교 보수주의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바리새파에게 붙잡혀 로마총독에게 끌려갔으나 뚜렷한 죄가 없다는 판단하에 풀어주려는 총독을 끈질기게 조르고 설득하여 결국 총독 빌라도는 도둑놈 '바라바'와 예수 중에 택일하라고 했을 때 바리새파는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는 도둑놈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바리새인 이란 바로 그 유대교종파를 구성하는 인간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바리새파는 위선적 원리원칙의 화신이자 형식주의자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하여튼 바리새인들의 그 단선적 원리원칙 주의에는 예수님도 할 말을 잃었었다 것이다. 이런 인간들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고 있었으니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에 강점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jfkens)의 소설 '주 예수의 생애(The Life of Our Lord)' 라는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어느 일요일 날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들판을 거닐다가 제자들이 옥수수 이삭으로 식사를 하는 사이에 홀로 유대인들의 교회당으로 들어갔다. 교회당 안에는 팔을 쓰지 못하는 가난하고 불쌍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예수님은 그 남자를 깊이 동정하여 성령의 힘으로 팔을 고쳐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교회당의 바리새파가 들고 일어나 항의하였다.
"안식일에 치료행위를 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
그러자 예수님은 한심 하다는 듯이 그들을 잠시 쳐다보고는 다음과 같이 격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너희들이 키우는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 이라고 쳐다보고만 있을 것이냐? 가축도 구해야 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 귀하냐?"
(You stupid idiot! If any of you had a sheep and it fell into a pit, will you not take it out, even though it happened on Sunday? How much better is a man than sheep!)
세월 호 대 참사에 대한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국가개조를 하던 국가 기강을 다시 세우던 하자는 것인데 법과 원리원칙을 따지며 차일피일 하는 자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세상 살아본 경험에 따라서 짐작한 것이었지만, 언젠가 김영오씨의 죽음을 각오한 단식이 역풍을 맞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며칠 수액을 공급 받았다고는 하지만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44일간의 단식이라는 것은 이미 생명의 한계를 넘는 기간이다. 그나마 40대의 탄탄한 체력과 딸자식의 죽음을 밝혀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생체의 한계를 넘어 섰다. 그가 지금 단식을 멈춘다 한들 몸이 정상으로 회복 되려면 얼마만한 시일이 소요될지 의사들도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처지의 사람을 두고 찌라시 언론들을 필두로 온갖 음해와 비난이 이루어지고 있다. 목소리 큰 놈이 일단 이긴다는 이치대로, 일단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고 있다. 나는 예전에 술을 마실 때는 술집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시비를 붙는 놈들을 보며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리고 싶은 찰나의 순간을 참느라 늘 애를 먹었다. 레프트 잽 한 방에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방이면 여러 사람이 기분을 잡치는 소란에서 해방되는 것을 바리새파들이 준수하는 법과 원리원칙 때문에 참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하루는 기어코 예수님의 융통성을 상기하며 찰나의 순간에 주먹이 나갔다. 테이블을 엎으며 자빠지던 돼지 한 마리 때문에 경찰서로 검찰청으로 수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뒤로 술을 끊고 술집 출입을 끊었다. 벌써 이십년 전의 일이다.
요즘 나는 이런 저런 기회에 받아 모아둔 양주병을 따서 콜라에 섞거나 냉수에 섞어 두어 잔씩 혼자 마시는 일이 늘었다. 담배는 찰나의 스트레스를 잠재우지만 술은 그래도 그 효과가 오래 가는 편이다. 욕하면서 시청하는 찌라시 방송 프로에 나오는 ‘이아고’들의 수작을 한잔 술이 없이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빠르게 작용하는 독주의 효과는 이아고들의 수작에 대한 분노를 넘어 인간 맨탈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이어지게 한다. 수탈당하는 유대인들을 구원하려던 예수는 오히려 그 유대인들의 수작에 의하여 모진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그 허탈하고 허망한 심정을 헤아려 보게 되는 것이다. 정 붙이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도 인간이고 진정 코 정떨어져 꼴도 보기 싫은 것도 인간이다.
김영오씨는 분연히 단식을 멈추고 몸을 추슬러 일어나라! 분별없고 무지한 유대인들을 위한 예수의 희생이 아무 보람이 없었던 것처럼 당신의 희생에 대한 보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증명 된 것이다. 당신은; 이 한 몸 희생해서 진실이 밝혀진다면, 이라는 명분을 내 세웠지만 그 희생이 아무 보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당신에 대한 폄훼의 사태가 난 이 시점에서 이미 증명된 것이다. 그러니 남아 있는 자식을 위해서, 억울하게 죽은 자식의 원혼을 풀기 위해서라도 일어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당신에게 온갖 중상과 비방을 한 이아고의 후손들을 엄정한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과문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제국주의와 침략에 항거한 민족주의간의 투쟁의 역사였다. 나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베트남 민족을 존경한다. 오로지 민중들과 민족의 장래만을 생각하며 조국의 민족의 장래에 대한 믿음과 신념으로 분연히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초라한 무덤과 초가집 한 채 그리고 다 떨어진 누더기 옷만 남긴 채 작고한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을 존경 한다. 호치민이 민초들을 대하는 자세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것이었다. 칼라일이 남긴 말의 따르면 위대한 지도자로서 호치민의 위대성은 이미 증명 된 것이다. 민중들도 그를 ‘호치민 아저씨’로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민족의 사표가 될 진정한 지도자의 부재를 한탄한다.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에 굴복하였지만 그들은 제국주의를 물리쳤다. 근 백 삼십년에 걸친 제국주의와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나자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다’는 대범한 자세로 민생을 위하고 세계인들의 평화를 위하여 적대국들과 수교를 맺은 베트남 민족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혹 베트남에 진출했거나 관광을 간 한국인들이 오만한 주책을 떨면서 현지 베트남인들을 비하 하고 무시한 사례를 듣게 된다. 나는 주제파악을 못하는 그 싸구려 영혼들에 대하여 동정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데일 카네기의 분석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자신의 오류와 과오를 뉘우 칠 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다. 희대의 갱 두목 알 카폰도 자신이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불평을 했다고 한다. 자신은 밀주를 판매하여 시민들에게 일상의 즐거움을 준 사업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 카폰은 매독의 후유증으로 치매를 앓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자신의 과오를 모르는자에게 치매는 신의 마지막 동정이었다고 본다. 고 김근태 님을 잔혹한 전기고문으로 파멸 시키려 했던 이근안도 요즘은 찌라시 방송에 나와서 자신의 변명을 한다. 반공을 위하여 합당한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극우분자들이 잔혹한 침략의 역사를 뉘우치겠는가? 이스라엘의 극우세력들이 팔레스타인 학살을 반성할 것인가? 개구리 이마에서 뿔이 나기를 기다리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 중국의 시진핑이 현명한 것이다. 시진핑은 일본의 극우주의를 구제불능으로 보고 이미 단호한 자세를 천명한 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