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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날이었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기 전 여름이 마지막 기승을 부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체부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들어왔습니다. 문득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이런 삶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가슴 뿌듯해하고, 퇴근해 집에 와서 차를 주차시켜놓고, 창문을 통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뭔가 가슴에 꽉 차오르는 것들을 느끼면서... 그냥 지금의 이 삶이 너무나 좋다고, 기쁘다고,.. 땀이 속옷까지 푸욱 배어 쉰내를 내 가면서 일해도, 그런 것들이 지금 바라보는 이 모습으로 충분히 상쇄된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샤워를 하고,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그러면서 컴퓨터를 켜는 순간, 또 가슴이 콱 막힙니다. 특히 오늘의 뉴스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한국 천주교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정치적인 것에 이용되고 있다면서, 세월호 유족이 양보해야 한다고. 교황께서는 헛 다녀가신 겁니까?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를 나름 절절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제게, 그 가족을 자기의 뜻과는 전혀 상관 없이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것도 국가가 책임을 다 하지 못해 구할 수 있는 기회마저 놓쳐버려 지금도 목숨 걸고 단식까지 해 가며 자기 가족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달라고 하는 그 가족에게 한국 가톨릭교회의 수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던지는 이야기가 고작 이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역시 교황이 지적하신 것이 옳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교황께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세속화와 권위주의에 일침을 가하고 가셨지요. 그분의 우려가 사실로 드러난 것일까요.
아내가 이 뉴스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유신 정권 그 암흑의 시대 속에 양심의 등불이 되어 잘못된 사회를 질타하고 유린되는 인권을 보장하라고, 그것이 예수의 길이며 뜻이라며, 잘못된 정권에 대한 저항은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염수정 추기경의 발언은 지금 한국 가톨릭 교회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일반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신자들의 의식과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심지어는 그 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생각과도. 더불어 교황께서 지적하고 가신 한국 가톨릭교회의 커다란 문제를 스스로 드러내는 격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정진석 추기경이나 염수정 추기경같은 이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수장임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황께서도 그 아픔에 중립을 지키지 못했다는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을 말 한 마디로 짓밟아 버릴 정도의 의식 수준을 가진, 그리고 그 아픔에 공감할 줄도 모르는 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렇기에 저는 가톨릭의 신자로서 제 위치에서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낼 것입니다. 제가 아는 예수의 목소리는 히브리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며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혹세 무민에 맞서 일관된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던 바로 그 목소리였으니까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