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시사글을 쓰고 있는 저의 글에는 다양한 견해의 댓글들이 춤을 춥니다. 그 중에는 입에 담기 민망한 험한 글들이 있는가 하면 저를 부끄럽고 당황스럽게 만드는 글들도 눈에 들어 옵니다. 특히 제 글을 통해 '정의'와 '양심' 등등을 언급하는 부분에선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정의로웠던 적이 있었을까요. 스스로 양심에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부지기수였던 저에게는 모두 과분하기 이를데 없는 수사입니다.
새내기 시절 선배들의 이끌림에 학자투에 몇번 발을 딛은 것을 제외하면 사회의 부조리와 자본주의의 모순 같은 시대적 화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회과학서적을 통해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정치권력과 자본가 등의 기득권세력에 의해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가공되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열정은 있었으되 행동은 없었고 치기와 겉멋만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그것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빴고,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으로 생활에 파묻혀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대한민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5공청문회로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린 한 투박한 사내가 기적처럼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잠시동안의 떨림과 울림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2009년 오월의 어느날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한 사내가 생을 달리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속에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가 말입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부끄러움이 한없이 밀려 들었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던 자유, 내가 숨쉬고 있는 공기, 내가 느끼고 있는 바람의 입자 조차도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혜자였고, 방관자였습니다.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때로 목숨으로 이룩해낸 이 땅의 자유와 민주주의적 가치들에 올라탄 무임승차자였던 겁니다. 저는 비겁했고 또 비겁했습니다.
무엇인가 해야만 했습니다. 무엇인가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세상과 사람 그 속에서 생물처럼 살아 날뛰는 정치이야기를, 겉으로 드러난 것 이면의 내용들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시사 칼럼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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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정의롭지도 않고 그다지 양심적이지도 않은 제게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때문에 생깁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사람이 더욱 걱정입니다. 이 사람을 바라볼 때마다 조마조마하고 불안불안해서 늘 좌불안석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인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단식을 시작한지 벌써 40일이 흘러갔습니다. 단식을 시작할 때와 비교해 확연히 초췌해진 모습에서 그가 벌이고 있는 '사투'의 크기와 깊이를 감히 가늠해 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목숨을 앗아간 참극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이 남자는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무려 40일입니다. 버틸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이미 넘은 이 사내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그야말로 집념과 한으로 밖에는 저는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 딸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다면 아빠로서 그보다 더 사무치는 한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원망과 분노 절망이 교차하는 이 처절한 상황에서 김영오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식밖에 없다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라면 비극일 것입니다.
최근 국내 유명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얼음물 뒤집어쓰기 캠페인 'ALS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SNS를 통해 활발하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 챌린지는 미국의 비영리기관인 ALS 재단이 루게릭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진행하는 자선모금운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이 캠페인에 동참할 세 사람을 지목하면 대상자가 24시간 이내에 얼음물 샤워를 하거나 기부금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취지와 흥미로운 진행방식때문에 아마 많은 연예인들이 이 캠페인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줄 압니다. 좋은 현상이고 바람직한 사회적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과거 '행운의 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방식에 가볍고 경쾌하게 웃음을 유발시키 수 있는 청량제마저 가미했으니 대중의 흥미와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지사일 겁니다. 이와 같은 사회공익적 캠페인은 적극 장려되고 확대 재생산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약간의 아쉬움은 남습니다. 연예인들의 이 기지와 재기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곳이란 당연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말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세월호특별법의 제정을 촉구하며 일일단식을 벌이고 있는 영화인들도 있고, 김장훈씨와 김제동씨 같은 분은 발에 땀나도록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족들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분들도 많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의, 보다 넓게는 일반대중들의 관심과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사태의 위급함과 심각함에 대해 환기시키고자 할 따름입니다.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상태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집념과 의지, 오기와 투지 등으로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는 이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합니다. 육체가 견딜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고, 정치권은 여전히 공전 중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최악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유민이'에 이어 그 아빠까지 떠나 보내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저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그저 일어날 수 있는 교통사고가 아닙니다. 또한 나에게는 닥치지 않을 먼 나라 남의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언제든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나의 일이며 우리의 일입니다. '유민'이가 바로 내 딸이 될 수도 있고, '유민아빠'가 바로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유민아빠'의 단식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그가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벌이는 처절한 사투인 셈입니다.
세월호 참사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입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의 견해에 동의하시는 분들도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시스템에 관한 문제이며 다름 아닌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특히 생명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에 이념과 정치논리가 개입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유민아빠'를 살리는 일에 동참해 주십시요. 제 글에 마음이 움직이셨다면 당신이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교수든,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주부든, 연예인이든, 일반인이든 '유민아빠'를 살릴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SNS를 통해 관련내용을 공유해 주셔도 좋고, 일인 시위에 나서셔도 좋습니다. 저처럼 글로 표현해서 커뮤니티 게시판에 게시해도 좋고, 지역구의 국회의원이나 기초의원에게 메일을 보내셔도 좋고, 촛불시위에 참석하셔도 좋습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 같은 재기발랄한 방법도 좋고, '유민아빠'를 살리는 일이라면 그 어떤 방법도 무방합니다. 다시 한번 간절히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생명이 먼저입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린 '유민아빠'를 살릴 수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유민아빠'를 제발 살려주세요.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