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영오씨의 단식을 보며 나는 1881년 북아일랜드의
보비 샌즈의 처참한 66일간의 단식과 그 죽음을 생각하고 공포를 느낀다. 정치권력의 냉혹함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낀다.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죽음의 단식과 우리끼리의 만찬이 이루어졌다. 현실적인 정치의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천상의 잔치와 지상의 단식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광화문 저자거리에 붙여 경복궁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이 나라의 현실을 보고 하늘에서 뭐라 할 것인가? 민초의 삶을 떠나서 궁궐을 지을 수 없다던 이성계였다. 조선 식민지 6대 일본 총독 미나미 지로는 경복궁 위에다 거대한 관사를 지었다. 오늘날의 청와대가 되었다. 광화문 저자거리와 청와대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천상의 삶과 지상의 삶쯤으로 비교한다면 지나친 것인가. 광화문 앞 저자거리와 총독의 관사는 불과 1km 안팎을 상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가 그렇다는 것 뿐이다. 정치적으로 지배자와 피 지배자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거리였다. 그것은 국토를 되찾고 민주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를 세웠어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건국 66년 역사에서 청와대는 민중들의 저자거리 광화문 사거리와 아득한 거리에 존재 한다.
이성계는 아들 태종과의 갈등에서
'정치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권력의 본질을 절감 하였다. 세자 방석의 목을 날린 아들 방원. 권력에의 망집에 사로잡혀 집안을 풍비박산시키고 꿈에도 그리는 왕비 한 씨를 요절하게 만든 아들 태종을 때려죽이기로 작심하였다. 아비인 자신을 위로하는 경복궁 만찬에 나타났다. 소매 속에는 절구 공만 한 쇠뭉치를 숨겼다. 아들 태종이 자신의 만수무강을 비는 술잔을 따를 때 쇠뭉치를 꺼내 사정없이 그 대가리를 갈길 작정 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해진 자리에 좌정을 하자 아들 태종은 부친인 이성계와의 사이에 신하를 한명 앉혀 놓았다. 이미 이성계의 패를 읽은 것이다. 태종이 술잔에 술을 따라 옆에 신하에게 전달하자 신하가 그 잔을 이성계에게 올렸다. 태종은 멀찍이 엎드려 절을 올리며 눈은 아비인 이성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 순간 이성계는 하늘이 자신을 버린 것을 알았다. 술잔을 팽개치고 소매에서 쇠뭉치를 꺼내 마룻바닥에 패대기치면서 허탈한 탄식의 말을 뱉고 휘청거리며 만찬장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 하늘이 이제 나를 버리는 구나!"
교황이 떠나자마자 한국은 다시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 갔다. 그런데 국민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뉴스의 홍수 한 구석에서 반짝거리는 뉴스가 있었다. 서둘러 페이지를 열어보니
로메로 대주교의 복자 추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교황의 발언을 소개하고 있었다. 엘살바도르에 우익 군사독재가 사라진지 언젠인데 왜 이제 와서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나 교황청의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취임한 이래로 수정작업을 시작하여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경하할 일이다.
|
로메로 신부는 원래 강경 반 독재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그는 수줍고 한 없이 겸손한 인물이었다. 대주교로 임명되는 순간 그가 보인 소박한 언행이 그의 맨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해방신학에 천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되 그는 오직 가난하고 굶주린 엘살바도르 민중을 위하여 헌신한 목자였다. 로메로의 대주교 취임 이후로 군부독재는 갈수록 강압정치를 펴 나갔다. 정교 분리의 명분으로 엘살바도르 천주교 교단의 친 독재정부 성향은 젊은 신부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신부들은 한 사람씩 잔인하게 피살되었다. 서서히 분노하는 로메로 대주교는 이윽고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고 그 클라이맥스는 대 성당의 미사강론이었다. 그 순하던 성정의 로메로는 강력한 언어로 군사독재정권을 질타하였다. 그는 만장한 신도들과 감시하는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중을 학살하는 독재정권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대하여 분노하며 질타 하다가 탕! 소리와 함께 가슴에 총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로메로의 일대기를 그린 미국영화를 보다가 로메로 대주교가 저격수의 강력한
M16 소총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 영화 속 대성당도 한국의 극장도 일순 깊은 정적에 빠져 들었다. 대성당의 엘살바도르 국민들도 할 말을 잃었고 한국의 극장 관객들도 할 말을 잃었다. 젊은 시절의 나도 극장에 앉은 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끈질긴 내전을 거쳐 2010년에 가서야 엘살바도르에 좌파 민주정권이 들어섰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에 대하여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남미 가톨릭교회에서 태동해 크게 유행했다는
해방신학은 사회ㆍ경제적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 해방 신학의 개념이 왜 나쁘다는 것일까? 한국의 극우주의자들은 대형교회 극우 목자들과 함께 아직도 해방신학을 적개시하고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37일째 단식. 비통한 영혼이 된 故 김유민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피골이 상접하여 몸이 망가져가는 채로 지팡이를 짚고 청와대로 향 했다. "대통령 님, 만나 주시오!" 거대한 청와대를 가로 막고 있는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경찰부대가 그를 제지하였다. 육중한 청와대 철문이라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은 김영오씨는 경찰을 제치고 나설 힘이 없었다. 스러져가는 허약한 육체인 것이다. 날아갈 것 같은 몸에 무성한 검은 수염만 그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었다. 힘없이 돌아서는 그의 발길이 비틀 거린다. 무슨 면목으로 바닷물 속에서 극심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어간 딸의 영혼을 대할 수 있을까?
얼마 후에 그 곳 거대한 청와대 연회장에서는 600명의 새누리당원들이 대통령을 모시고 화기애애한 만찬(晩餐)을 벌였다.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 놓고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느긋하고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는 일이 만찬이다. 술이 빠질 수 없다. 만찬에서의 술은 예수님의 피로도 묘사되는 적포도주가 제격이다. 청와대에서 막걸리나 쐐주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국격(?)의 문제인 것이다.
적포도주 한 잔에 용기를 낸 걸직한 음색의 인물이 포도주 잔을 들고 일어선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남이가?
-아니다! 우리는 으리로 뭉쳐진 동지다!
-집권 여당의 건승을 위하여 건배!
-위하여!!!
유다는 원래 됨됨이가 심상치 않은 인간이었다. 끊임없이 예수의 정체성을 의심하였다. 예수를 따르는 민중들의 민심이 심상치 않아 종교 기득권에 위기를 느낀 유대교 바리새파가 유다에게 접근하였다.
-지금, 예수가 어디에 있느냐?
-어디쯤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을 봤다.
-그 곳이 어디냐?
-글쎄....
-여기 30데나리온의 은화가 있다. 이걸 네가 가져라. 그리고 장소를 말해라! 너에게 해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순간 유다의 잔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래, 이참에 예수가 체포 되게 하고 그가 여하히 곤경에서 탈출 하는가를 시험해 보자. 그가 귀신같이 곤경을 헤쳐 나온다면 나는 그를 끝까지 신의 아들로 여기고 믿고 따르리.")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잔혹하게 철편(鐵鞭)으로 얻어맞고 예수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했다. 그 현장을 목격한 유다는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광란에 빠져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목을 메달아 자살하고 말았다.
청와대가 기왕에 식민지 총독의 관사였을 때도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도탄에 빠진 식민지 조선인들을 비웃으며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관료들을 섞은 만찬은 있었을 것이다. 이 총독의 관사가 군정청장 하지의 관사가 되었을 때도 만찬은 자주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경무대가 되어서도 건국의 아버지(?)를 위하여도 만찬은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늘 만찬은 있었다. 영화관에서 대한 뉴우스로 본 그대로이다. 관영 TV방송에서 시청한 그대로이다.
그런데 어제의 청와대 만찬이 김영오씨의 생명을 애타게 걱정하는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각에 김영오의 37일째 단식과 집권당의 건승을 기원하는 만찬이 이루어 졌다. 여기까지 자판을 두드리고 단식이라는 어휘를 잠시 생각하니 영어단어 fast가 연상되었다. 그러자 30년 전 쯤에 대충 읽었던 PhD. 무함마드 알리 알쿠리(파키스탄)의 저서 '이슬람은 무엇인가?"라는 영문서적이 생각났다.(What is the Islam?)'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그 내용이 제대로 기억날 리가 없었다. 희미하게 잘려진 기억을 이어 보려고 밖으로 나와 간이 의자에 걸터 앉아 담배를 두 대 이어서 피우고 있자니 얼핏 생각나는 내용이 있었다.
필부들이 유일신 알라의 사자인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물었다.
-"왜 단식을 해야 합니까?"
-단식은 마음을 정화 시킨다. 너희들에게 무모한 성욕, 물욕, 권력욕이 일어날 때 단식을 해야 한다.
-"비통한 자식의 죽음을 겪은 아비도 단식을 해야 합니까?"
-"원통한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신(알라)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단식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
교황은 김 영오씨에게 단식을 멈추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머리가 아둔한 나는 김영오씨를 생각하며 이것을 내내 생각하고 있었다. 떠나신 뒤에도 그 높으신 뜻을 풀길이 없었다. 왜 단식을 멈추고 건강을 추스르라는 충고를 하지 않았던가? 단식이 지속되면서 생체는 어느 순간에 급격히 망가질 수 있다.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폭력에 대하여 단식으로 저항한 죽음 중에서 북아일랜드 카톨릭 교도인 보비 샌즈의 죽음은 전 인류를 전율시켰다. 1981년 5월 5일. 보비 샌즈는 영국 치하의 북아일랜드 감옥에서 14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이었다. 그는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결국 감옥에서 단식 66일 만에 교황이 보낸 금 십자가를 손에 쥐고 숨을 거뒀다, 27살. 한 아기의 아비이고 한 여인의 지아비였다. 지극히 온순한 청년이었고 건실한 청년이었다. 종교적 편협도 없었다. 이는 한국에도 보도 되었다. 당시는 전두환 신군부 치하의 살벌한 정국이었다. 검열을 피했을까, 검열을 미처 못 했던가? 한국인들도 그 소식에 전율하였다. 따지고 보면 정치권력은 민중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무서운 매카니즘이고 시스템인 것이다.
|
철의 여인, 강심장의 수상 대처는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할 것 아니냐고 하던 세계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과 교황의 권유를 일절 모르쇠로 일관 하고 보비 샌즈를 정치범이 아닌 테러범으로 규정하며 열악한 감옥에 방치하였다. 그녀도 잔인하고 형무소의 간수들은 더 잔인하였다. 댓처는 과연 인정머리 없는 철심장의 여인이었다. 타고난 보수 꼴통이었다. 보비 샌즈는 대처가 죽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일벌백계는 원래 그들의 전가의 보도(寶刀)이다. 그러나 잔인한 철의 여인 대처도 죽을 때는 신의 형벌로 말 못할 고통을 받았다.
|
보비 샌즈의 저항은 영국 정부의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잔혹한 학살 때문에 시작되었다. 보비 샌즈의 죽음에 이어 10여 명의 아일랜드 죄수들이 단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국정부를 대표하던 대처는 말 할 것도 없고 아일랜드 인들도,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강제로라도 막지 않았다. 정치역학에는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었을까? 대처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시나브로 치매에 걸려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외신을 접하고도 나는 일말의 동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것이 왔다'는 감상이 있었다. '그래, 니가 결국 죄를 받는구나! 하늘이 무심하지는 않았다.' 뇌도 늙으면 치매에 걸린다. 언젠가는 치매에 걸려 죽을 줄 몰랐단 말인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살아 있는 모든 자들은 언젠가 감당 해야 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생신(生身)이 음식을 끊으면 언젠가는 죽는다. 단식 38일. 김영오씨는 이제 음식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더 이상 몸이 음식을 요구 하지 않는다. 김영오씨의 죽음이 닥치기 전에 우리는 그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 국민을 대표하여 민주당이 나서라! 모두 달려가 그 앞에 엎드려 사죄하고 단식 중단을 청원해야 한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할 것 아닌가? 당신들의 무능으로 이 지경까지 왔으니 누가 누굴 탓하랴! 당신들이 죄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