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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세계적 민주평화구국적 지도자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 5주년이 되었다.2009년 8월18일 한국 정치사,세게 인권사,민족평화에 찬란한 업적을 남기신 김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신 이후 김 전 대통령의 빈자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진정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하루전인 17일 오후 5시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를 통해 개성공단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사무소를 방문한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과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전 의원,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등 방북단 일행에게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김정은’이라는 내용의 문구가 적힌 김 제1위원장 명의 화환과 조전문을 보내왔다.
김정은 위원장의 김 전 대통령 추모 화환 전달이 이명박 정권 이래 5,24조치라는 이름하에 원천 차단되어 전면전 일보전이라는 최악의 공멸적 대결구도로 후퇴한 남북관게 회복에 청신호가 되었으면 하는게 민족적 희망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광복 69주년 경축사를 통한 남북관계 개선 열망을 박근혜 대통령이 하나마나한 간보기식 남북 간 환경, 문화, 민생 분야 협력 제안으로 재를 뿌려 버렸기 때문이다.
북측은 이날 박 대통령이 경축사를 통해 제안한 북한 하천·산림 생태계의 공동관리, 문화유산 공동발굴 등의 사업에 관해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을 이용 '대결의 빗장을 그대로 두고 협력의 문을 열수 있는가'는 제목하에 "남조선 집권자의 '8·15 경축사'라는 것은 북남관계 문제에 대한 똑똑한 해결책은 없고 종전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것으로서 실속이 없는 겉치레, 책임 전가로 일관된 진부한 것"이라는 대갈일필(大喝一筆)로 거더차 버렸다.
북측은 구체적으로 " '경축사'의 그 어디에도 북남관계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위한 성의와 진지한 태도가 반영되여 있지 않다"면서 "지금 북남 사이의 불신과 대결이 해소되지 못하고 극단에로 치닫는 것이 과연 '환경, 민생, 문화의 통로'를 열지 못해서인가"라고 힐난했다.
이어 "북남 협력의 길이 반통일적인 '5·24 조치'에 의해 꽉 막혀버렸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고 '환경, 민생, 문화의 통로'를 열자고 했으니 모순도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라는 말로 '5·24 조치'의 해제를 통한 남북관계 악화의 근원인 정치, 군사적 대결을 해소하지 않고 대화, 접촉, 왕래를 정상화할 수 없다고 압박했다.
덧붙여 북측은 박 대통령이 경축사로 북한의 핵 포기를 강조한 데 대해 "더욱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남조선 집권자가 우리의 핵과 미사일을 걸고 들며 또다시 위협 타령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인천에서 곧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그것을 앞두고 '을지프리덤가디언' 합동군사연습의 총포성을 요란하게 울리는 것이 평화에 대한 위협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한미군사훈련을 강경 비난했다.
북측은 또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한미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에 대해 "미제의 날강도적인 대조선 적대시 정책과 그에 발벗고 추종해 나서고 있는 남조선 괴뢰들이 동족대결 책동에 따라 맞춤형 억제라는 기만적인 외피를 쓰고 우리 공화국에 대한 불의적인 선제타격을 노린 위험천만한 핵전쟁,북침전쟁연습"이라고 조선중앙방송을 이용 비난했다.이어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이 맞춤형 억제전략을 실전에 적용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선전을 포고해온 이상 우리식의 가장 강력한 앞선 선제타격이 우리가 선택한 임의의 시각에 무자비하게 개시된다는 것을 다시금 천명한다"고 밝혔다.
인민군 총참모부 선제타격 강경발언에 대해 합동참모본부는"북측이 도발할 경우 가차없이 응징하겠다"며 일전을 불사하는 초강경 경고로 맞받아 쳤다.민족이 열망하는 평화적 관계개선은 커녕 이판사판식 공멸적 전면전 일촉즉발 양상이 더욱 격화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니 남북관계 개선을 결단한 지하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지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통탄할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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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남북 사이가 전면전 전야라는 최악의 위기로 빠져 든 것은 이명박정권의 반민주 역주행으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민생지옥으로 화하고 대북강경 대결정책으로 남북관계가 파국을 맞는 총체적인 국정 파탄에 절망한 국민이 정권교체의 정치적 밥상을 차려 주었지만 민주 진영이 정권교체에 실패한 때문이다.
1997년 정권을 봉헌하고 재보선 44전 전패를 기록하는등 정치적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친노진영의 패권욕때문이었다.스스로 폐족을 선언했던 친노파는 자숙과 반성,정권교체의 밀알로 백의종군을 해야했다.
그러나 친노진영에게 이와같은 최소한의 양심과 정치도의,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지지층과 당원의 뜻을 헤아리고 받드는 섬김의 정신은 존재하지 않았다.오로지 오매불망 가능치도 않은 친노중심 정권교체를 통한 친노 부활,친노패권에 집착하였다.
노무현 재단을 정치적 재기의 터전으로 삼아 친노 핵심 이해찬,한명숙,문재인,문성근 그리고 국참당의 유시민이 연합전선을 구축 전가의 보도인 패권적 정치공학의 결과물인 당심 들러리 친노불패 오픈프라이머리,모바일 투표제를 동원,민주당을 일거에 장악하고 총선공천을 독식하는 반당적 전횡에 분노한 민심이 과반수 총선승리 밥상을 뒤엎어 정권교체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총선 봉헌의 정치적 자살골에 책임을 지기는 커녕 대선 경선마저 모바일 꼼수로 친노 문재인 후보를 내세우고 당선 가능성 1위 무소속 안철수후보와 후보 단일화마저 마타도어식 버티기로 단일후보를 가로채 안철수후보의 지원유세와 호남의 절대적 지지에도 불구 박근혜후보에게 정권을 봉헌하고 말았다.
박근혜후보 집권이 국정원과 새누리당 대선캠프간 짜고친 헌정유린 국기문란 정치개입과 대선 공작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나고 남북관계의 최후 고리인 개성공단 잠정 폐쇄되고 박근혜 정권의 인사참사,세월호 대참사 등 정치적 퇴행사건이 연발하면서 유신왕조 부활에 의한 민주주의 실종,남북평화 혼돈 등 국가민족,민주평화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다보니 김 전대통령의 지혜,통찰력,구국적 지도력이 그 어느때 보다도 그리운 것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 <국민뉴스>가 지난 2012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3주기에 즈음하여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지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3개월간에 걸쳐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압도적인 비율로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지도자로 선정된바 있다.
본지는 2012년 5월17일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 하루전인 8월 17일 오후 4시까지 만 3개월간에 걸쳐 일제의 식민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운명을 짊어진 대통령으로 재임한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9명의 전직 대통령과 이명박 현직 대통령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동안 설문에 참여한 총 1585명 가운데 65.93%인 1045명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지도자로 선정하였으며 21.45%인 340명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 번째 훌륭한 국가 지도자로 뽑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4.73%인 75명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3위에 올랐으며 4위는 1.32%인 21명이 꼽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다.이외에 0.95%인 16명의 지지를 받은 이명박 현 대통령이 5위에 뽑였고 6위 김영삼 전 대통령(0.57%, 9명),7위 전두환 전 대통령(0.50%,8명),8위 노태우 전 대통령(0.38%,6명),9위 윤보선 전 대통령(0.19%,3명),10위 최규하 전 대통령(0.13%,2명) 순이었다.모르겠다는 0.13% 2명이었으며 3,72%에 달하는 59명이 훌륭한 대통령이 없다고 응답하였다.
설문 결과 압도적인 표차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대통령으로 선정된데 대해 그동안 보수성향의 언론매체와 여론조사기관이 수시 여론조사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조사 결과를 접한 일부 국민과 또 친노 여론조사 기관이 나서서 노무현 대통령 서거일 앞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대통령이 역대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선정되었다는데 고무되었던 친노진영에서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본지의 편집경향이 민주평화진보 성향이 강한 나머지 방문자,구독자층 또한 친 김대중 성향의 전통적 민주진영 지지층이 다수를 점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해가는 측면이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본지<국민뉴스>가 진행했던 설문은 의도적,기획적으로 특정 대통령을 띄우려는 여론 조작성 의혹 등 여론조사결과 신빙성,진정성에 의문이 가는 보수,친노진영의 여론조사와 달리 자발적인 설문조사에 참여 표현한 자유의사 결과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또 결과가 압도적이라는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국가 지도자로 선정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자부하였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되풀이 되었지만 그동안 보수진영과 친노진영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띄우기 위해 일방적,편파적,의도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결과로 여론을 오도한 측면이 있다는 점을 두고 볼 수 없어 진행한 본지의 설문조사 결과가 역대 대통령에 대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평가로 국민인식의 올바른 기준이 되고 역사적 평가의 잣대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자평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와같이 역대 가장 훌륭한 민주평화구국적 국가지도자로 선정되기에 이르기까지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인권평화에 일생을 바쳐 헌신한데다 오로지 야당 외길을 통해 반세기만에 정권교체에 성공,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서 환란 극복,획기적 남북관계 개선등 성공적인 국정 수행 결과를 인정 받았기 때문으로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역대 최고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이처럼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새겨가며 5주기 추모일을 맞아 김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시금 되돌아 보는 기회를 통해 의미와 자부심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최고의 대통령 김대중을 모독하는 현실 이제 사라져야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국정을 맡은 국가 지도자 가운데 최고의 대통령이다.평생을 이땅의 민주화와 인권신장,평화적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세계적인 민주평화인권 지도자이기도 하다.또한 초지일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행동하는 양심에 입각한 야당 외길을 걸어 반세기반에 친일 반민주 보수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 현대 정치사에 한획을 그은 정치거목이다.
집권후에는 역대 권위주의 보수정권의 누적된 권력형 부정부패,관치경제의 적폐가 전임 김영삼정권의 경제실정과 맞물려 야기된 오천년 역사상 미증유의 국란인 외환위기를 국민과 함께 조기에 극복하면서 경제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성공적인 월드컵,아시안게임등 국제적 행사 개최,빛나는 글로벌 외교로 국가위상을 만방에 떨치고 정권을 재창출한 성공한 구국적 대통령이다.
한편 해방 이후 외세에 의해 남북이 분단된채 금수강산이 초토화되어 수백만명의 인명과 엄청난 재산피해를 부른 민족적 비극인 한국전쟁을 치르는등 남북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해오던 남북관계를 역사적인 6.15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여 평화통일의 주춧돌이 될 수 있도록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민족적 지도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세계적 민주평화인권 지도자인 김대중 대통령을 아직까지도 친일반민주 극우 보수진영은 광란적인 묘소 방화테러,일감베스트저장고의 인격모독 인터넷 테러 등 반인간적 패륜 망동으로 모독하고 반민주독재 정치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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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편안한 세상 만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김대중
이러한 상황하에서 1954년 임시정부가 위치하고 있었던 부산에서 발생한 '부산정치 파동'은 사업가였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에 본격 투신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권을 연장하려는 목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 게릴라를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산일대에 비상게엄을 선포하여 정치적 대혼란을 야기하였다.
부산 정치파동 사건을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은 전쟁직후인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처음 금뱃지에 도전하였지만 낙선하고 말았다.낙선후 목포에서 가산을 정리하여 서울로 올라온 김 전 대통령은 노동문제연구소를 차려 사상계등에 노동관련 글을 쓰는등 노동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그즈음 민주당 신파였던 장면박사를 만나 1957년 중림동 성당에서 그를 대부로 토머스 모어라는 영세명으로 카톨릭 영세를 받는등 장박사의 인연을 통해 민주당 대변인을 맡기에 이르렀다.
그후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민주당 후보로 59~60년 제4,5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잦은 선거 패배로 가산을 탕진하는등 불운이 계속되는 와중에 첫부인인 차용애 여사와 여동생을 잃기도 하였다. 4.19혁명으로 다시 치러진 1961년 5월 인제 보선에서 민주당 바람을 업고 처음 당선되는 기쁨을 맛보았으나 당선 사흘후에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금뱃지를 달아보지도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혁명 사건에 연루되어 한달반동안 수감되기까지 하였다.
5.16군사 정권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던 1962년 평생동지이자 반려자인 이희호 여사를 정일형박사의 소개로 만나 재혼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침내 1963년 7월 치러진 제6대 총선에서 전남 목포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걷게 되었다. 타고난 웅변실력과 달변,뛰어난 지략으로 첫출발부터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던 김 전 대통령은 1964년 김준연의원의 구속 동의안 처리를 무산시키기 위해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무려 5시간19분 동안 의사 진행 지연작전(필리버스터)연설로 단번에 정치권의 혜성같은 존재로 부각되었다.
당시 의사진행 지연 발언은 세계 최장이라는 기록을 인정받아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바쁜 의정 생활 중에도 시간만 있으면 국회 도서관을 찾아 외교,국방,예산,건설,금융등 다방면에 걸쳐 관련서적을 섭렵,이를 바탕으로 상임위등 의정활동은 물론 당대변인으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급성장하였다.
시련과 고난,도전과 응전의 정치인생
박정희 군사정권은 뛰어난 의정활동으로 국정수행에 부담을 주는 눈엣가시 같은 김 전 대통령을 낙선시키기 위해 1967년 치러진 7대 총선에 공화당 중진이었던 김병삼을 후보로 내세워 목포에서 국무회의까지 개최하면서까지 정권차원의 낙선전략을 집중 펼쳤으나 김 전 대통령은 김병삼후보를 누르고 당당히 재선에 성공하면서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당내 재정통,대변인,정책위의장으로 중진 정치인의 반열에 오른 이때부터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다고 두사람의 관계를 표현했던 김 전 대통령의 평생 동지이자 정치적 숙적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본격적인 경쟁관계가 시작되었다.두사람의 첫대결은 원내총무 자리를 놓고 벌인 경쟁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1968년 신민당 원내총무로 지명되었으나 의원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어 치러진 당내 경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면서 원내총무 자리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40대 기수론'을 구호로 내걸고 치러진 제7대 신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 세가 약했던 신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결선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끝에 이철승과의 연합을 통한 불가사의한 대역전극으로 구파출신으로 승리가 유력했던 김영삼 후보를 물리치고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듬해인 1971년 3선개헌을 통해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그유명한 일백만시민이 모인 장충단 공원유세에서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미.일.중.소 4대국 한반도 안보보장론,예비군 폐지,남북교류,유신독재를 예고한 총통시대 주장을 사자후 같은 열변으로 토해내며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쳤다.그러나 이효상 국회의장등의 지역감정 자극과 정권프리미엄등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박정희후보에게 94만표(46%득표) 차이로 분패하고 말았다.
관권선거에 힘입어 투표에서 지고도 부정개표를 통해 가까스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3선에 오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선을 통해 나타난 김대중 후보의 위협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그냥 놔 두었다가는 정권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김 전 대통령의 정치생명을 끊는것은 물론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공작정치가 모습을 드러낸게 대선 한달후인 1971년 5월25일 치러진 제8대 총선때였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대선 패배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총선 지원유세를 다녔다. 그러던중 승용차편으로 목포 지원유세차 전남 무안을 지날무렵 갑자기 화물차가 들이받는 두번째 죽을 고비였던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고관절 변형증이라는 중상을 입고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죽을 고비를 넘기며 제8대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 치료를 위해 1972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투옥,가택연금,망명,사형선고로 점철된 반독재 민주인권 투쟁
일본에 머물고 있던 1972년10월1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인 유신헌법 강행처리를 통해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해산과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자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은 유신 반대성명을 발표한후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망명생활을 하며 해외에서 유신 반대 투쟁에 나섰다.
이듬해인 1973년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 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한후 일본내 반박정희 세력을 모아 한민통 도쿄지부를 만들어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투쟁을전개하였다. 그러자 당시 중앙정보부(부장 이후락)가 도쿄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팔레스 호텔에 머무르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했다.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한 중앙정보부는 동해상에서 바다에 수장시키려 하였으나 당시 하비브 주한대사를 비롯한 미국의 개입으로 포기하고 납치 5일만인 8월13일 서울로 끌고와 동교동 자택에 가택연금시켰다.
세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 김 전 대통령은 중정과 경찰을 동원한 박정희 정권의 철저한 가택연금 속에서도 민주화 투쟁을 계속하였다. 1974년12월 재야단체인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재야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민주 구국선언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78년 12월까지 2년9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석방후에도 가택연금은 계속되었다. 가택연금중이던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정부장에 의해 정적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조성된 '서울의 봄'을 맞아 가택연금 해제와 함께 사면복권되어 정치 재개에 나섰으나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12.12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사회혼란및 학생,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하였다.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연행된 사실에 격앙한 광주시민들이 다음날인 5.18일 깅대중 석방,전두환 타도를 외치며 광주 민주항쟁에 나서자 신군부는 즉각 공수여단과 20사단등을 진압군으로 투입,광주 무력 살륙진압에 나서는 한편 연행됐던 김 전 대통령에 대해 '광주 민주항쟁'을 배후조종했다는 내란음모 죄를 덧씌워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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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또 월드컵과 아시안 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월드컵 4강 신화창조를 통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대한민국의 국가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치기도 하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외에도 기초생활 보호자 지원과 의료보험 개선등 사회 안전망 구축을 통한 생산적 복지,민주화 운동 보상법,의문사 진상규명법,국가인권위원회법등 민주화 입법을 추진 민주,인권 신장에도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 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대구 섬유 테크노밸리,안동 하회 문화권 조성등 동서화합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기말에는 영남 출신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내세워 광주 경선 승리,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등 치밀한 대선 프로젝트를 통해 정권재창출에 성공함으로써 제2기 민주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대통령임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퇴임전 아들들이 관련된 '홍삼게이트'와 퇴임후 도덕적 정권 차별화에 승부를 건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민주당 분당,국정원 도.감청 사건등으로 곤욕을 겪기도 하였지만 서거후 공개된 일기에서 "내가 살아온길에 다소 흠이 있으나 후회는 없다"고 심경을 밝힌데서 보듯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남긴 거목이요 민족적 지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생,정치,삶의 지표이자 대한민국의 큰스승김 전 대통령은 정치 인생 내내 정적과 보수진영으로 부터 인간의 신뢰와 관련된 거짓말쟁이 빨갱이 등 색깔론에 시달리고 55차례의 가택연금,6년간의 옥살이,납치,사형선고등 갖은 핍박과 탄압을 받았지만 공개적으로 그들은 비판한적이 단한번도 없었다. 깊은 신앙심과 자신이 겪은 고난,고통이 다른사람에게도 되풀이 되어서는안된다는 화해와 용서 정신을 일관되게 지켜온 때문이었다.
김대통령은 또 투사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연설이나 토론회 때마다 적절한 유머를 통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도 하였지만 시대를 관통하는말 한마디 한마디는 반복어법을 통한 대세화를 만들어내 한국 정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통찰력이 담긴 영구불변의 명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서울역 광장 분향소에서 이명박 정권을 질타하면서 자신의 평생 인생철학인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편이다" 또 정치의 속성을 한마디로 간파한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 같다" 정치란 "서생의 문제의식과 장사꾼의 상인정신으로 해야 한다"거나 "무엇이 되기 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인생의 지표를 제시한 말들은 촌철살인의 명언이 아닐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의 소탈하고 소박한 삶 또한 존경의 대상이다. 비판자들은 김 전 대통령 사저가 아방궁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영결식후 공개된 집안내부는 값비싼 가구나 화려한 치장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만주지역이 포함된 고조선 영역을 표시하는 지도가 벽에 걸려 있었고 십년 이상을 신었다는 구두,줄이고 늘이기를 반복해 가며 입었다는 잠옷과 양복,목이 늘어진 양말등 근면검소한 삶을 살아왔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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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주 진영 김 전 대통령의 정신,유지 계승위해 떨쳐 일어나야
서거 직전까지도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 역주행을 우려하며 민주주의 위기,서민경제 위기,남북 관계위기등 3대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며 범민주 진영의 대단결을 호소하던 김대중 전대통령,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초인적 의지로 병마와 싸워가며 민주주의 인권,화해,평화의 등불이 되고자 했던 국가와 민족의 스승이자 세계적 지도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표적 수사로 자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앞에 "내몸의 절반이무너져 내린것 같다"며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끝내 우리곁을 떠나고만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하면서 까지 북측 특사 조문단을 불러 남북관계 회복 선물을 마지막으로 남긴 민족 영웅 김 전 대통령이었다.
비록 몸은 가셨지만 그분의 정신과 유지는 이땅의 민주주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한 밀알로 쓰여질 것이다.이제 그 밀알을 가꾸어 김 전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는 알찬 민주,민생,민족,평화의 열매로 결실을 맺도록 만드는 역할과 책임은 살아 남은자들의 몫이다. 이희호 여사는 영결식후 서울광장에 들러 국민에게 감사의 말을 하면서 "화해와 용서"가 김 전 대통령의 유지임을 강조하였고 박지원의원은 영결식 다음날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이 세브란스 입원중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기던 기회를 이용"민주당은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단합하고 야4당과 시민사회와 연합하여 민주주의 위기,서민경제 위기,남북관계위기 극복에 나서라"는 유언을 남긴 사실을 공개하였다.
그러나 박지원 의원이 공개한 김대통령의 유언은 얼마전 이희호 여사께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 전대통령께서 병원 입원후 목에 산소 호흡기를 꽂아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어 유언을 듣지 못한게 가슴에 맺혀 있다는 말씀을 한 것으로 미루어 사실관계가 불투명하고 정치적 발언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은게 사실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남기신 유지와 정신,정치적 자산은 정말 소중하다.그러나 정권교체의 결정적 시기였던 2012년에도 김 전대통령의 유지는 말뿐 제대로 계승되지 않았다.오히려 그동안 유시민중심의 국민참여당이 창당되었는가 하면 친노당권파의 전횡을 참지 못한 한화갑 전 대표가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는등 분열상이 노출된데 이어 친노진영의 민주당 무혈점령에 이은 4.11총선 친노독식 공천 민주호남 숙청으로 따논 당상이던 총선 승리를 박근혜 새누리당에게 봉헌하여 대선 승리를 통한 3기 민주정부 창출에 재를 뿌리고도 대권을 먹겠다며 친노후보들이 대선마당을 활개치는 참담한 개판정치가 횡행하였다.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단합을 위해 총선당시 비민주적 공천에 불복 탈당한 인사나 파벌정치 이해 문제로 복당을 불허한 인사,정동영 최고위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재보선 당시 당 지도부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해당행위로 낙인 찍혀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모든 인사들과 화해하고 원할 경우 당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조치를 취하고 다시 민주개혁진영 대단합에 나서는게 정상인데 스스로 폐족을 선언했던 친노가 패권공학을 동원,전면에 나서면서 정권교체에 또 다시 실패하게 된 것이다.
지난번 실시된 6.4지방선거 압승실패,순천-곡성 새누리당 이정현 후보 승리가 보여준 텃밭 붕괴 7.30 재보선 참패의 근본원인도 범친노의 추악한 기득권적 계파주의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게 지지층은 물론 일반 국민의 대체적인 여론이다.
친노가 재 등장하면서 김 전 대통령과 정치를 함께하며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고 국정을 보필했던 동교동계 핵심 한화갑,한광옥,김경재,이윤수씨와 적지않은 국민의 정부,전통 민주당 인사들이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박근혜 캠프에 합류하는 반정치도의적 사태까지 발생하였다.정치인생을 함께했던 동지들의 변절에 지하의 김 전대통령께서 피눈물을 흘렸을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권교체에 실패한 상황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와 유언을 받드느냐 아니면 묵살하느냐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민주당이 김대중노선에 충실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김한길 전 대표가 지난해 이명박근혜정권의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한 헌정유린 국기문란 국정원 정치개입,대선공작,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정치적 악용사태에 적극 대처하겠다고 했지만 용두사미로 끝났던게 아쉽다.
야당의 정체성은 선명성,투쟁성성,대의와 명분정치,행동하는 양심정치다.김 전 대통령께서 살아 계신다면 집권세력의 헌정유린 국기문란이 부른 사태앞에 굴욕적 타협아닌 선명하고 강고한 투쟁으로 정면돌파를 강행 하였을 것이다.
민주주의 없이 민생은 있을 수 없다.박근혜정권의 대국민 민생사기술에 넘어가서는 결단코 안된다.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가 신장시킨 민주주의를 유신왕조 부활의 제물이 되도록 방관하고 타협한다면 민주역사의 죄인이 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국정원 헌정유린,국기문란 선거공작은 문재인후보 낙선,박근혜 당선이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절차,나아가 민주주의 운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세월호 대참사 상황,투쟁적 이미지 개선을 이유로 우야무야 끝내서는 안된다.
만약 국정원 국기문란 반국가적 범죄를 척결하지 못한다면 정치개입,선거공작은 계속 되풀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할 경우 민주적 표심을 강탈당하는 결과를 낳아 정권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것이므로 더욱 투쟁강도를 높여 끝장을 봐야 한다.
상황이 이처럼 엄중함에도 파벌정치에 급급하고 적전분열 행태를 보인다면 민주당은 물론 범민주 진영의 운명은 이명박 박근혜 부수집단에게 정권을 봉헌한데 이어 박근혜 유신왕조 민간독재정권의 정치적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이와같은 최악의 상황을 자초한다면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배신이요 지지자,당,국민,국가,민족,민주주의를 독재의 수렁으로 몰아놓는 용서받지 못할 만인공노할 정치적 죄악이 될 것이다.
비록 김 전 대통령이 남북관계 물꼬를 선물로 남기고 가셨지만 천안함,연평도 안보국난을 불러 조성된 일촉즉발의 전면전 위기상황이 계속된데 이어 개성공단 가동중단 사태 발생 등 박근혜정권의 흡수통일 추구 대북강경 전략으로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다행이 화해협력,신뢰회복에 바탕한 평화적 민죽통일이라는 지엄한 민족과 역사의 명령에 굴복하여 박근혜정권이 사이비보수 강경 패권세력의 경제적,군사적 고립화 주장과 거리를 두고 개성공단 정상화가 이루어 지긴 하였지만 5.24조치를 헤제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향적인 화해기조를 기대하긴 어렵다.
김 전 대통령이 자서전을 통해 우려한 대북 강경책을 박근혜정권이 완전히 거두지 않는다면 남북관계 파국은 물론 북을 중국에 봉헌하는 매국을 자초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운명은 존망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보수 영구지배를 목적으로한 엄혹한 반민주 역주행,민생경제 파탄으로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제 양극화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인권,평화,용서,화해,서민경제로 대표되는 김 전대통령의 정신과 철학을 계승,발전시켜 모두가 잘사는 통일된 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고인의 뜻을 기리고 정신을 계승하는데는 여야 ,국민이 따로 없어야 하겠지만 선도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은 아무래도 민주당을 중심으로한 범민주진영의 몫이다.고인의 숭고한 뜻을 실천적 행동을 통해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게 헌정유린,국기문란 박근혜정권을 강고한 투쟁으로 싸워 이겨 민주평화적 정국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명박 민간독재정권에 이어 박근혜정권의 권위주의적 유신왕조 부활 수구 연합전선의 총력전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국정원 국기문란 규탄 시국선언 및 촛불시위,세월호 특별법 막말비판으로 날을 새는 정권 홍위병 황색 저널리즘이 판을 치는 언론지옥하에서 공정보도가 종적을 감출만큼 민주주의 건강성의 척도인 언론자유를 짓밟는 왕조독재라 하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