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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독립,민주투사 2014년 8월17일은 광복군 대위 출신의 독립투사로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1975년 오늘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추락하는 의문의 사고로 별세한 장준하 선생의 39주기 되는 날이다.
장준하 선생은 1918년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성면(古城面) 연하동(煙霞洞)에서 출생하였다.1938년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학생을 가르치다 1941년 고등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도요대학[東洋大學] 예과(철학)를 거쳐 니혼[日本]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 당국에 의해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조선군사령부 39여단 42연대에 배속되었다가 그해 2월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 쓰카다[塚田]부대에 배치되자 탈출의 기회를 엿보다가 7월 7일 홍석훈(洪錫勳), 김영록(金永祿), 윤경빈(尹慶彬)과 함께 일본군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에 합류했다.
이때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을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고 중국공산군의 습격으로 그의 부대가 괴멸되자 광복군이 있는 충칭[重慶]까지 6000리 길을 걸어서 이동하여 안휘성[安徽省] 린취안[臨泉]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 설치된 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기초적인 제식훈련을 받다 1945년 1월 31일 53명의 동지들과 걸어서 파촉령의 험준한 겨울산을 넘어 충칭[重慶]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 주석을 만났다.
그러나 임정 국무위원들과 갈등을 일으켜 중경을 떠났다가 1945년 4월 이범석의 제안으로 광복군 장교가 되었고 한국으로 잠입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된 미국 OSS대원으로 자원하여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았고 광복군 육군 대위가 되었지만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 진공작전은 취소되자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편으로 귀국하였으며 주석 김구(金九)의 수행비서로 활동하였다.
이후 이범석의 권유로 김구가 당수로 있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떠나 조선민족청년단(일명:족청)에 가입하여 교무처장이 되었지만 이범석이 이승만 측의 인물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데다 정권쟁취를 위한 독단에 환멸을 느껴 곧 그만두고 이후 그는 정치와 결별하였다.
정치를 떠난후에는 《사상계》를 통해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데 앞장서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장면 내각에서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을 맡아 국가 건설을 위한 정책기획을 담당하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자 민정이양을 두고 박정희(朴正熙), 김종필(金鍾泌) 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이로인해 장준하와 《사상계》는 위기에 몰렸다.박정희 군사정권의 탄압이 가중되던 1962년《사상계》가 이룬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한국인 최초의 막사이사이(Magsaysay) 언론상을 수상하였다.선생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에 더욱 강도를 높여 대일 굴욕외교, 월남파병 등의 정책에 대해 맹공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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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사로 위장한 권력의 장준하 암살1967년 들어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치를 재개하였으나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 사장으로 복귀하였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과 김지하의 오적 사상계 게재,김대중,함석헌,윤보선 등과 범민주세력 통합 등을 통해 박정희정권에 맞서면서 선생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눈엣가시같은 최대 정적의 한사람이 되면서 신변의 위협이 따르던 중 1975년 오늘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선생의 죽음에 대해 당국의 수사결과 약사봉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사한 것으로 결론지었으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추락사했다는 장소가 추락사할 정도로 위험지역이 아닌데다 선생의 시신의 상처,선생을 안내했다는 인물의 신상의혹 및 신뢰성이 빈약한 오락가락 진술도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당시 수사기관의 수사결과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투사이자 민주운동가이며 언론문화 활동가인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반민주 친일 군사독재정권의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 역사적 철퇴를 내리쳐 민주정의를 세우는 국민대중의 중차대한 책무라 할 것이다.
필자는 1993년 펴낸 정치소설<권력중독.전4권 > 제2권 88~98페이지에 걸쳐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당시 육군정보사 소속 첩보수집 및 요인 암살 전문 공작원에 의한 테러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을 게재한바 있다.필자가 정보사 공작원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으로 본 것은 대위시절 정보부대 근무시 북한 124군부대 요원의 1.21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해 정보사 요원들이 155마일 전 전선에 걸쳐 휴전선을 넘어 북한군 부대를 보복 공격한 일화를 듣던 중 요인 암살 무기로 소가죽으로 감싼 쇠망치를 사용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요인암살 전용 공작원 가죽 쇠망치
소가죽으로 감싼 쇠망치로 사람의 두개골을 내리치면 퍽 소리도 안나고 맞은 부위가 찢어지거나 터져 상처가 나거나 피가 흐르지 않고 표면상 멀쩡하지만 안으로는 두개골이 뻥 뚫어져 구멍이 나면서 즉사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 해당 간부로부터 소가죽 쇠망치,임무가 끝난 공작원은 해체명령에 따라 비밀유지를 위해 쥐도새도 모르게 처치하여 묻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는 말을 토대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소재로 쓴 정치소설에 상당량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비슷하게 바꾸어서인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필자의 책이 나온지 20여년만인 지난 2012년 8월16일 선생의 37주기를 맞아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선생의 묘소를 장준하공원으로 이장하던 중 두개골 부위가 지름 6㎝ 크기 원형으로 함몰돼 있는 선생의 유골을 확인하고 선생의 유골 사진과 유골을 검시한 법의학 교수의 소견서를 토대로 인공적인 물체로 가격당해 타살됐을 것이 확실하다며 ‘국가가 책임지고 즉시 장 선생 사망 사건에 대한 전면적 재조사와 진상 규명에 착수할 것’을 촉구한 사실을 접하고 필자의 판단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장준하기념사업회가 밝힌 선생의 두개골을 보면 두개골 오른쪽 원형으로 금이 간 상처 부위가 또렷했으며 깊이 1㎝가량 들어간 상태였고 상처 오른쪽 위 45도 각도로 금이 가 있고, 위쪽과 아래쪽으로도 갈라져 있는것을 보면 정보사 공작원들이 사용하는 소가죽 쇠망치에 가격당한 것이란 개연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장선생이 의문사를 당한 약사봉 근처 계곡 개천에서 장선생이 별세한지 몇년후 정보사 요원이 자살한 변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언론 보도다. 왜 정보사 요원이 그곳에서 변시체로 발견되었을까? 양심의 가책? 임무해체 희생?
더욱이 장 선생의 두개골에 나 있는 상처는 1975년 장 선생 운명 직후 유족의 의뢰를 받아 주검을 육안과 손으로 만져 살펴 본 조철구 박사가“직접 사망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된다며 “후두부 골절 부위가 해부학적으로 추락으로 인해 손상당하기 어려운 부위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고 밝힌 머리 부위 검안 소견과도 거의 일치한다. 장 선생의 유골을 검시했던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도 소견서에서 ‘뒷머리 함몰에 의한 사망’이라는 의견만 확정적으로 밝혔었다.
참고로 국군정보사의 전신인 육군정보사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고 노태우가 직선제 선거에서 당선된 가운데 5공 청산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높아져 가던 상황에서 군사정권하에서 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를 비판하는 "오홍근이 본 세상" 이라는 칼럼을 월간 중앙에 게재하던 당시 중앙일보의 자매지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사회부장을 1988년 테러한 적이 있다.
필자는 제언한다.장준하선생의 죽음은 정권에 의한 암살이 분명하고 두개골의 함몰,함몰이 요인암살 소가죽 쇠망치 가격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만큼 당시 육군정보사 요원에 의한 암살에 촛점을 맞춰 재조사가 즉각 이루어 지길 바란다.당시 정권 핵심부에서 지시한 것인지 아니면 중앙정보부가 사주한 것인지 아니면 암살을 행동에 옮긴 조직이 충성차원에서 가한 것인지 다방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장준하기념사업회는 물론 새정치민주연합 등 정치권도 즉각 정치 문제화하여 정부가 장선생 사인 규명에 나서도록 촉구하고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연대하여 조속히 장선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 찾기에 총력전을 펼쳤으면 한다.당시 육군 정보사,중앙정보부 등 관련자들의 양심고백이 이루어진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다음은 1993년 필자가 펴낸 <권력중독> 2권에 포함한 장준하 선생에 대한 죽음을 소설로 구성한 전문을 소개한다...............................................................................................
김국구와 10여명의 청년동맹사건(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사형집행소식은 주선일보에 의해 대서특필되었다. 헌정질서 문란및 정부전복기도 청년동맹관련 주모자 사형집행 제하의 막대중 기자의 기사는 국가안녕질서를 해치는용공불순 세력에 대한 철퇴,정부의 강력한 의지천명, 차제에 유사한 불순세력 척결촉구등 동원 가능한 최대한의 수식어를 동원 정부조치가 당연한 조치였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산우이 주필이 정부의 조치를 정당화 합리화시켜주는 방향으로 단독 논설을 실었다. 초여름 더위를 부채바람으로 쫒아 가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던 최대의 선각자이자 민주투사인 장진하(장준하)가 신문을 와락 찢어발겨 똘똘뭉치더니 사정없이 마당으로 집어 던졌다.
"천벌을 받을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단 말인가"
장진하는 장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자기가 그토록 아꼈던 금주하(김지하)는 반병신이 되다시피 하여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고 나머지 자신의 뒤를 이을 제목으로 여겼던 김국구가 서른한살의 나이에 북정후(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민주화의 제물로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으니 통분한 심정을 금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내가 죽어야 되는데 아까운 젊은목숨이 죽을때까지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장진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모종의 비상한 결심을 한 표정이 역력하였다. 더이상 방치하였다가는 이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일이 다. 내가 나서서 북정후 정권과 정면대결하여 결판을 내리라 장진하는 무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뛰어 다녔다. 재야 민주화 세력을 결집시켜 강력한 대정부 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장진하는 나름대로 보안을 유지하고 극비리에 행동하였다. 공권력의 감시체제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