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키 -누구의 말이던가. “베토벤은 기왕의 작품으로 충분히 천재이지만 합창 교향곡에 이르러 神이 되었다.”
베토벤 못지않게 도스또예프스키도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평가 한다. 천재적 인물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를 비롯한 이 세상의 수재들이 그의 저작을 읽고 내린 한결 같은 결론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을 포함하여 다 불살라 버리더라도 도스또예프스키의 책 만큼은 남겨야 한다고 말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만치 최소한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알아보는 식견은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독해력이 부족하지만 심난할 때는 그의 소설을 읽는다. 책에 삽입된 말년의 그의 초상을 보고 위안을 삼는다. 그의 초상을 보고 있으면 깊은 생각에 잠긴 그 옆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는 톨스토이처럼 인생독본 같은 글은 쓰지 않았다. 독본을 보고 인생을 꾸려갈 수만 있다면 인간의 삶이 어려울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멘탈은 과연 무엇이냐고 독자들에게 과제를 주는 작가이다. 그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 정답이 있을 리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 같다. 톨스토이는, 필부가 삶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이렇다 저렇다 하는 답을 주지만, 도스또예프스키는 이렇게 말 할 것이라고 한다. “인생이 쉬울 까닭이 없지 않느냐?”
그는 진정 고난의 삶을 살았다. 그는 톨스토이가 살았던 장원에서의 삶을 꿈꾸었지만 박한 그의 원고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속절없이 상떼페테부르그 도시 뒷골목 허름한 아파트에서 도시의 잡답 속에서 시궁창 냄새를 맡으며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도박 중독증은 단지 지병인 간질병에 기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그의 작품들은 그 고난의 삶 속에서 피어난 위대한 문학이다. 살아있는 우리는 그가 남긴 작품을 읽어야 한다고 믿는다.
1849년 4월 23일 새벽에 촉망 받던 28살의 젊은 작가 도스또예프스키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그의 좁은 아파트에서 체포 연행 되었다. 처녀작품(가난한 사람들)이 성공을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는 그는 그 전날 자정이 다 돼서 피곤에 지쳐 들어와 정신없이 자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비몽사몽간에 이런 소리를 들었다.
“일어나!”
부드럽지만 기름지고 위압적인 목소리였다. 죠지 오웰의 '1984년' 식으로 하면 사상경찰일 것이고, 현대식으로 하면 정보부의 비밀경찰 정도 될 존재들이었다. 때는 제정러시아 니꼴라이 1세 치하였다. 명령을 한 경찰의 어깨에는 무궁화 두 개가 달려 있었다. 허리에 찬 사벨이 간단없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가 평소에 읽는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된 일체의 책을 몽땅 압수 당 하였다. 압수 수색 이었다. 심지어는 탁자위에 굴러 다니 던 동전 한 잎 까지 압수물에 포함 되었다. 방안은 난장판이 되었다.
곤히 자다가 일어나 창졸간에 끌려간 도스또예프스키는 그 새벽으로부터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 형을 받고 지옥 속에서 연명하게 되었다. 그가 다시 상뜨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38살이 다 되어서였다. 체포의 빌미가 된 것은 폐뜨라셰프스키라는 동갑내기 지인이 주선하는 모임(금요일의 모임)에 여러 번 참석 했다는 것이었다. 폐뜨라셰프스키는 귀족출신 이면서 넉넉한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귀족신분 이라는 이점 때문에 외무성 외사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모임은 그의 집에서 있었다. 그의 친구들, 지인들이 대부분으로 그저 이 십 명 안팎이었다. 그 중에 밀고자가 있었다. 그들은 내란 혐의로 모두 체포 되었다. 그 모임의 성격과 모임에서 나온 발언들은 도스또예프스키의 진술서 내용으로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28살의 그가 체포 된 후 열악한 수감생활과 심문 고문에 피폐해진 정신과 몸으로 써 낸 그의 진술서는 훗날 그를 연구하는 지성들의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도스또예프스키는 진술서를 반성문으로 이용해 선처를 바라는 따위의 비굴함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제정러시아의 시대상에 비추어 이는 실로 위대한 정신인 것이다. 그의 진술서, 간략한 편지 등이 전부 시대를 초월하여 남아있는 것은 러시아인들의 사료를 중시하는 문화정신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문화융성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제정러시아의 고문 행위도 악랄 하였다 .
-밤새 감방 벽을 쳐서 잠을 안 재운다. -며칠 씩 밥을 굶긴다. -음식에다 화공약품을 넣어 내장기관을 상하게 만든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때린다.
이러한 고문으로 인하여 완전히 발광한 자가 하나. 뇌졸중으로 쓰러진 사람이 서너명. 내장기관의 기능이 약화된 자가 여럿이 나왔다. 발광한 자는 있지도 않은 비밀결사대 존재를 집요하게 강요받다가 발광 했는데 실성한 후로는 자신이 비밀결사대원 이라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그의 진술서를 대략 정리하여 올린다.
- 진술서-
나는 투옥된 후로 금요일 마다 폐뜨라셰프스키의 집에 드나든 인물들에 대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그들의 모든 것을 쓰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내가 폐뜨라셰프스키를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서로간의 지성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존경해 왔다. 그의 집회에 참석한 것도 그 이유가 크다. 그의 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그의 친구들이었다. 간혹 낮선 사람들이 오곤 했지만 드문 경우에 속했다. 거기서는 갖가지 의견이 나오기도 했는데 한번도 의견의 일치를 본 적은 없었다. 그 모임에는 어떠한 의견의 일치도 하나의 경향도 항차 공통목적 같은 것도 없었다. 어느 문제를 두고 세 사람 이상이 같은 의견을 갖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토론이 치열했고 견해의 대립이 있었다. 나도 토론에 종종 참여하기는 했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토론이 생기고, 그 토론에 내가 참가했는가를 말하기 전에 나의 죄상으로 되어있는 사실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나의 죄상은 그 모임에 참가하여 자유주의적인 발언을 하고 문학 논문‘벨린스키와 고골리의 왕복서신’을 읽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자유주의 또는 리버럴리스트란 말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가 그 모임에서 발언 한 것은 딱 세 번 이었다. 한번은 에고이즘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은 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내 말 가운데 자유주의적인 내용이 있었는지 정치에 관한 것이 있었는지는 지금 기억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밀고자가 들은 내 말의 편린을 모아서 나에 대한 혐의가 성립된 것이라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어떠한 의도로 누구를 상대로 말 한 것이라는 것을 배제 시키고 단지 남의 말을 훔쳐 듣고는 그 말의 조각을 엮어 그것을 토대로 범죄혐의를 씌우려는 일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따위 행위는 겁내지 않는다.
가령,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이 자유주의라 한다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조국에 대한 사랑이 있고 아직 조국에 대해서 한번도 죄 지은 바가 없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탓에 내겐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고 조국에 대하여 선(善)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내가 미움과 분노를 가지고 폭력적이거나 혁명적 변화를 바라고 내란음모에 가담 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제시해 봐라. 그러나 나는 그러한 모략적 증거 따위를 겁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열한 밀고도 나로부터 무엇 하나 빼앗을 수도 없고 보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밀고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탤 수도 뺄 수도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침묵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내가 말 했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자유주의자로 증명 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런 사고방식이야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