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 있는 한 행복하다. 하지만 행복은 그 자체가 인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행복이란 결심이요 결정이다.’라고 한 앤드류 매튜스라는 사람의 말에 보다 더 공감이 간다.
“왜 정치를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새정치민주연합 고연호 은평을 위원장에게다. 그녀는 “우리 부모님은 평생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셨지만 저는 초등학교서 고등학교 때까지 한 번도 등록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우리부모님을 보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 일을 제가 해야 한다고 다짐했고요. 이 결심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고연호 은평을 위원장이 정치를 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렇다. 고연호 씨는 90평생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단하게 일하고도 딸자식에게 학비는 물론 용돈 한 번 제 때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고뇌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고뇌를 바탕으로 정치가로서의 꿈을 키우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건설하청업자들 그리고 노인과 어린이며 장애인들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같은 포부가 있었기에 누구보다 당찬 젊은 시절을 보낸다.
60년대 태어나고 80년대 대학을 다녔으니 흔히 말해서 그녀도 486이다. 전두환 독재정권을 살면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은 당연히 제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녀지만 486 운동권이라 해서 다 똑같은 길을 가진 않는다. 고연호는 졸업 후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남들처럼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서 위장취업이나 공장에 취직하거나 야학활동을 하기위한 말하자면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우선 어려운 살림을 일으켜 다만 얼마간이라도 부모님을 부양하는 일이 목전에 닥친 의무라 생각했다. 그래야 부모님에게는 “잘 키운 딸자식 열 아들 부럽지 않은” 기쁨을 선사하는 일일 테고, 고연호도 자식으로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인륜에 부응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특히 운동권에 있던 486 남학생들은 나름대로의 연대나 동지애를 통해서 NGO 활동이든 정치활동이든 그들만의 패턴이 있었다. 하지만 고연호는 느슨하나마 그러한 고리조차 유지할 틈도 없이 손수 회사를 설립하여 여성 사업가로서 무역업체를 이끌어간다. 그게 24살 대학을 막 졸업한 20대 때 일이었다. 은평구 구산동에서였다. 딱히 몇 년이라는 기약은 없었지만, 사업이 번창하여 40대 초반까지 20여 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열중했다.
그렇다면 고연호는 언제 어떤 계기를 맞아 정치계에 입문 했을까. 그녀의 정치관은 무엇이며 이때까지 민주당(즉 새정치민주연합)에 몸을 담고서 은평을 지역위원회를 어떤 마인드로 이끌고 있을까 고연호 씨를 만나서 현안문제와 함께 그 궁금증을 풀어본다.
-정치는 언제부터 하셨는지요?
“2004년도였습니다. 열린우리당 때였지요. 초등학교 3학년 학력이 전부인 분의 딸자식으로 우리부모님처럼 열심히 일하면 잘 사는 사회가 돼야한다. 그 일을 내가 한 번 해보자 하는 이유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뜻을 포기하지 않고 잘 가기위해서라도 가족부양을 좀 해 놓고 민주화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요. 20여 년간, 처음엔 저도 그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죠. ㅎㅎ”
-은평을을 지역구로 삼은 이유가 있나요?
“당시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 양쪽이 다 어려운 때여서 제 작은 힘이나마 보태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입당한 시점이 정동영 당의장 때였습니다. 지역구 활동은 2004년 전국구의원에 탈락을 하고나서 사업을 하면서 처녀 때부터 살던 은평을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됐습니다. 2006년엔 다들 어렵다고 할 때 총대를 메고 구청장에도 나섰지요. 당시 25개 서울시 소속 열린우리당 구청장후보로서는 서울시에서 최다득표를 했지만 상대 당 후보에게는 밀렸어요. 처음 나가본 선거였구요. 많이 배운 선거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국회의원서거를 준비해오고 있었습니다.”
-청치인 생활 10년인데 시련은 없었습니까?
“시련요? 저희 정치인들에게는 공천문제가 늘 뒤따르지요. 아시는 대로 2010년 재보선 때는 장상후보가 저희 지역에 전략 공천으로 왔다가 실패했고, 2012년 선거에는 야권연대라는 이유로 당의 잘못된 결정의 한복판에서 또 밀렸고요. 그게 다 시련이고 우여곡절이지요. 지역에서 다년간 거리에서 골목에서 고생을 하고도 자기편 아니면 무조건 죽이는 패거리정치와 끼리끼리 패권문화가 사라져야 합니다. 원칙이 서면 억울한 사람이 없고, 남의 꿈을 빼앗는 것 나쁜 짓입니다. 이번 7.30재보선 선거에서도 보셨듯이 원칙 없는 공천과 감동과 필연성도 결여된 선거공학적인 측면에서의 야권연대라는 것이 얼마나 유권들을 식상하게 하는지 제대로 목격했습니다.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하나같이 지적하는 사항이니까요.”
-6.4 지방선거는 어떻게 치르셨습니까?
“이번 6.4지방선거는 시작 전에 이미 승리가 보이던데요?”
|
-그러게요. 정말 그랬는지 두루 아울러서 고위원장님 의견을 좀 말씀해주십시오.
“그런 여론의 지지위에서 당내 민주적절차로 좋은 후보를 내고, 세월호 심판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려운 시국을 이러저러하게 풀어가겠다고 하는 비전과 희망을 국민들께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그런 점만 잘 다듬어졌더라도 큰 차이로 승리를 할 것이라 자신했었는데, 저희 당이 이겼다는 평가가 흔쾌히 내려지지 않는 선거로 끝나서 조금 아쉽습니다.”
-며칠 전에 끝난 7.30 재보선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중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요. 저라면 몇 가지 원칙 외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는 실정입니다. 뭐냐면 어떤 선거든 원칙이 바로 서야 하기 때문이죠. 첫째 전략공천이 없어야 하고, 둘째 모바일선거에 반대합니다. 체육관 선거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처럼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도 모바일 선거 없이 다 자기 발로 걸어가서 체육관이든 학교강당이든 직접선거를 하니까요.
당원이 당대표를 뽑지 않고 불특정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자기 당의 대표든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다는 것은 정당의 존립을 뒤흔드는 거라고 봐요. 바로 말해서 의사협회 회장선거에 약사들이 나서서 뽑는 거하고 뭐가 다르냐 말이에요. 제대로 된 경선 룰에 의해서 올바로 뽑고 깨끗이 승복하는 문화가 정착해야 합니다. 어디서건 누군 된다. 누군 안 된다 말릴 필요도 없습니다. 선거에 나오고 싶은 사람들은 해당 지역에 가서 주민들과 밀착해서 살며 부대끼면서 인정받고 검증을 받는 겁니다. 미국이 좋은 예죠. 클린턴이 이름도 없는 아칸소 주에 가서 터를 잡은 이유가 뭐겠어요? 거기서 잘하니까 전국적인 지도자가 되지 않습니까?
좋은 선례 좋은 시스템도 중요합니다. 조지 워싱턴이은 왕으로 등극하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세웁니다. 그래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그 나라 정치는 법과 시스템과 반칙 없는 룰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가고 있어요.
총선이든 대선이든 일관된 원칙과 좋은 선례에 따라서 스케줄대로 가야한다는 거지요. 한 번 잘못하면 물러나야 한다?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거에 지면 공동 책임을 지고 자숙하는 게 맞고 세월호 사건이다 열차탈선이다 윤일병 사건 등으로 국민은 정부도 못 믿고 속상해 하고 있는데 그들의 삶을 담아낼 그릇인 공당인 야당이 안 보인다는 말이죠. 야당이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니까 국민들의 눈높이를 못 맞추니까 저희 생정치민주연합이 신뢰를 못 받은 결과가 이번 7.30재보선에서 11대 4의 참패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봅니다.”
고연호 씨의 말을 듣다 보니 신뢰받는 야당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행복하게 지내는 자는 대게 노력가라고 한다, 고연호 은평을 지역위원장이 딱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정치발전에 천착하며 적지 않은 고민과 함께 쌓은 내공이 뚜렷해 보여서다.
이뿐만 아니다. 학교를 졸업하기 바쁘게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며 한국여성경제인연합에서 부위원장의 반열에 오르며 여성 사업가로서도 바쁜 일정을 보내왔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는 크고 작은 선거를 치루면서 더욱 단단해졌고 이번 6.4지방선거에서는 당의 공천심사위원에 소속되어 좋은 인재를 뽑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지금 현제는 9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며 양녀 여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작년에 작고하신 부친은 평생 가난하고 검소하게 사셨지만 건강 하나는 타고나신 분답게 생애에 여하한 흠결도 남기지 않으시고 대과(大過)없이 천수를 누리다 가셨다.
여기서 고연호 은평을 지역위원장만의 특이점이 부각된다. 고연호는 누가 뭐해도 때 묻지 않은 마지막 남은 486이다. 지금 우리 정치사에서 486 만큼 이중적인 이미지로 조명되는 정치집단은 다시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때로는 격렬하고 순수하게 이 나라의 민주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이름으로 불리는가 하면 오늘 날엔 계파정치의 일원으로서 권력의 단맛을 뒤늦게 알아버린 패권집단으로 일컬어지기에 말이다.
하지만 고연호 그녀만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신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그 흔한 국회의원 한 번 한 적도 없다. 파벌 없고, 줄 없고, 든든한 선후배도 밝히지 않기에 그렇다. 그녀가 오직 추구하는 것은 지역민들을 상대로 생활정치에 헌신하는 것이다. 고연호가 정체계와 새정치민주연합과 은평을에 큰 자산이고 희망인 이유다.
고연호 은평을 지역위원장에게 탄탄하고 다부진 행보를 기대한다.
인터뷰어 박정례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