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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 하라! 반항 하는 자 만이 고귀(高貴)하다." -니체-
-대한민국 전군 지휘관들에게 묻는다. 전우들 간에 폭력이 난무하는 군대에 부모들이 어떻게 자식을 보낼 것인가?
잔혹한 군대 폭력 소식이 연이어 보도 된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TV뉴스를 보는 부모세대의 마음은 괴롭다. 당장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 악마 같은 젊은X들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 자식이 당한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 건국 66년 만에 나라가 이렇게 망가질 수 있나. 순한 사람. 착한 사람은 못사는 불모의 땅이 되었단 말인가? 이 모두가 지금의 부모 세대의 책임이다. 또한 지금의 부모 세대의 부모 세대의 책임이다. 오늘날 나라를 망쳐 먹은 우리세대는 땡 볕 아래 아스팔트에 대가리를 박아야 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구천을 떠도는 나의 부모 세대, 할아비 세대는 그 알량한 이념 쪼가리를 위하여 머리를 굴리며 극좌, 극우 투쟁을 일 삼다가 북망산으로 갔으니 북망산 돌 바위에 극단적 이념으로 가득찬 대가리를 박으시오! 당신들의 증손자들은 당신들이 건국한 나라의 군대인 개병대(犬兵隊)에서 맞아 죽었고 또 죽어가고 있소이다.
한 때 해병대를 개병대(犬兵隊)라고 폄하 하던 시대가 있었다. 요즘 보니 국군 전체가 개병대가 되었다. 이런 개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기억나는 비디오 한 편이 있다. 1960년대 중 후반에 고등학교를 헉헉 거리며 다니고 있던 내가 숙식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일터(신문 보급소)가 소재한 한 곳이 하필이면 중구의 우범지역 이었다. 지금은 특급호텔이 자릴 잡고 있다. 온갖 잡X들이 섞여 살았다. 하지만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학교는 마쳐야 할 것이니 때로는 싸움질도 하면서 참고 지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8년도 가을께, 하루는 개병대원 세 명이서 멀쩡한 군복을 차려 입고 그 지역 대폿집에서 술을 퍼 먹다가 술을 콧구멍으로 먹었는지, 비위가 뒤틀렸는지 동네 불량배들 하고 시비가 붙었다. 몇 번 주먹질이 오가는가 싶더니 개병대원 셋이 그야말로 오뉴월에 개 맞듯이 마구 얻어터지기 시작 하였다. 지방에서 혈혈단신 올라와 온갖 세파에 시달린 그 동네 불량배들은 독하였다. 평소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려는지 쓰러질 때까지 마구 때렸다. 결국 셋 다 포장 안 된 흙바닥에 피를 뿌리며 뻗었다. 그 때만 해도 요즘처럼 자빠진 놈 발로 차는 풍토는 없었다. 동네 불량배 셋은 사라지고 구경하던 나는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잘난 척 하던 X들 잘 맞았다는 심사가 들었다. 그 때만 해도 그 군대에 들어가게 될 줄 몰랐다.
-군대 폭력의 참담한 추억
내가 1971년도 시월 이십오일. 스무 살 나이에 당시 개병대라고 폄하 당하던 군대에 지원 한 것은 단지 월남전에 지원 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한국 군대의 사병들 봉급은 기 백 원 안팎. 돈이 될 수가 없었다. 무식 했던 젊은이가 미국이 베트남 통일을 반대 하고 제네바 협정을 무시 하면서 베트남 분리정책의 바탕에서 통킹 만 자작극을 일으켜 베트남 민족주의 진영을 상대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정권이 국민에게 계몽하던 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싸움으로 알고 나는 반공투쟁 보다 학자금이나 벌 속셈 이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 했던 친구의 친형이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므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훈련소에 입소하여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두 달 전에 헌병 소대를 마지막으로 파병은 끝난 것이었다.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무교동에서 구두를 닦다가 입대 했던 동기생 하나가 훈련부대 소대장(고참 하사관)과 대판 싸우고 훈련소 내무반 빌딩 앞 진해 바다에 빠져 죽는 사고가 생겼다. 군대가 더럽고 치사해서 한 자살 이었다. 이래저래 삭막한 훈련소 생활이 이어 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엉뚱하게 동기생들이 비상집합을 당하고 기합을 받았다.
3열종대로 부대 정열을 하면 늘 앞줄 3인 중에 하나였던 나는 교관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적당하는 일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므로 늘 순발력 있게 움직였다. 입대 할 때 두발을 깍지 않고 목덜미까지 기른 채로 입소 한 나를 지적하던 하사관 하나가 있었다. 훈련 중대 행정을 보는 2년차 하사관 이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자였다. 군대 밥을 따져보니 그 자도 나와 같이 스무 살쯤에 입대를 한 것이었다. 인생이 예측 불허인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 대한 음모와 계략이 진행 된다는 것이다. 행정 하사란 자가 나를 치기 위한 계략을 꾸몄던 모양이었다. 모자란 X.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훈련병을 상대로 계략을 꾸밀 수 있는 것인가?
식사당번 조장을 하던 그 때, 잠을 자다가 느닷없는 벼락이 치는 것이어서 비몽사몽간에 비틀 거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다시 가슴으로 군화발이 들어 왔다. 앉은 채로 다시 침대로 자빠졌다. 나중에 불침번에게 들으니 행정하사관이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내가 잠을 자는 침대로 쫒아와 그대로 나의 오른쪽 얼굴을 군화발로 내 질렀다는 것이다. “ 두개골의 두께가 조금만 더 얇았더라면 쟤는 즉사했다” 불침번이 나중에 동기들에게 한 분석 이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행정하사관이 술 먹고 새벽 두시에 들어와 불침번에게 나를 깨워 김치를 사무실로 가져 오게 하였다는 것이다. 불침번이 나를 깨웠다는데 나는 고단하게 자느라 아무 기억이 없었다. 불침번이 내가 안 일어난다고 고지식하게 전달 하니 행정 하사관 이라는X이 그대로 달려와서 내 얼굴을 질러 버린 것이다.
간신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경황이 없는 가운데 뭘 붙잡는다는 것이 나보다 키가 작았던 그 자의 양 팔소매를 꽉 붙잡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쓰러지지 않겠다는 의식 밖에 없었다. 뒤로 밀린 그자가 길길이 소리 지르며 팔을 풀려다가 머리로 내 이마를 그대로 들이 박았다. 머리에 별이 보였다. 천정이 높고 바닥이 넓었던 중대 통합 내무실 바닥에 별이 쏟아 졌다. 카바라도시가 토스카(Tosca)을 그리며 부르는 별이 빛난다는 아리아가 들릴 판이었다. 부지불식간에 팔을 놓았다. 그러자 그 하사관은 나의 멱살을 잡더니 풀쩍 뛰며 그대로 내 이마를 재차 들이 박았다. 그대로 주저앉았다가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는 나에게 내 무장에서 야전삽을 빼서 접힌 채로 마구 휘둘렀다. 머리를 안 맞으려고 팔로 막으면서 버텼다. 그 때 소대장이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행정하사를 뜯어 말렸다.
행정하사가 소대장과 함께 사무실로 사라지자 비참한 정적이 남았다. 훈련병들도 모두 잠이 깨어 입을 다문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견병대, 개병대 하더니 바로 이런 꼴을 보고 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서 갈등이 시작 되었다.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팔 여기저기가 쑤시고 머릿골이 쑤셔 왔지만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폭력은 보복을 부른다. |
겨우 훈련소 입소 한 달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정머리 없고 막 되먹은 쌍X이라는 결론밖에 없었다. 당장 야전 삽을 꼬나들고 사무실로 달려가 머리통을 갈겨 버리고 피를 흘리며 내 앞에서 기는 꼴을 보고 싶었다. 빈 칼빈 총을 들고 달려가 총구로 그 뺀질뺀질한 얼굴을 가격하고 싶었다. 불침번이 뭐라고 위로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의미 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갈등에 시다리다가 기상 시간에 일어났다. 아프다고 드러누우면 그 자에게 지는 것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기상 집합에 나가 줄을 섰다. 동기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태연 하려고 애를 썼다. 특기 훈련소로 갈 때까지 한 달 남았다. 언제고 기회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철저히 마주치는 행정 하사를 무시하기로 하였다. 마주치는 그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경례도 하지 않았다. 나의 얼굴은 나날이 경직 되어 갔다. 한 번 만 더 나를 치기를 기다렸다. 그 때 둘 중에 하나는 크게 당한다고 다짐 하였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겠다고 오기를 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그자가 더 이상 나를 치지 않았다. 그 자인들 사고치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한 달이지나 기본 훈련 수료식 준비를 하는데 난데없이 못 보던 아이들 둘이 나타나 사령관 표창을 받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한 아이는 라면집 사장 아들. 한 아이는 5.16쿠데타 세력에 영관급으로 참여한 자의 아들 이었다. 수료식 준비를 하는 동기생들 간에 ‘씨X! XXX들!’ 이라는 불평이 쏟아졌다. 빽 없는 아이들은 박박 기고 배경 있는 아이들은 두 달 간 어디 가서 펑펑 놀다가 사령관 표창을 받는 군대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개병대 인가, 봉숭아 군대인가? 그 아이들과 특기 훈련소에 같이 입소하였다. “너희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 난 것이냐?” 따지듯 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그 아이들과 김포 여단까지 같이 올라와 나는 최전방으로 그 아이들은 보안부대로 직행 하였다.
제대할 때까지 행정하사에게 군화발로 당한 오는 쪽 뺨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았다. 거울로 그 상처를 볼 때마다 보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하지만 진해에 근무 하고 있는 그 자와는 국토 끝에서 끝으로 서로 상거하고 있었다. 그 자를 만날 길이 없는 가운데 하사관들과 제대할 때까지 여러 번 충돌이 있었다. 하사관들에게 집단 폭행도 당하고 부대에서 쫒겨나기까지 하였다. 남쪽에서 뺨 맞고 북쪽에서 화풀이 하는 격이 되었다. 섭리의 작용이란 묘한 것이다. A와의 인과 관계가 엉뚱하게 B와 C와의 관계로 연결 되는 것이다. 섭리라면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군대생활이 30개월로 접어 들었다. 제대를 네 달 정도 앞두고 하사관으로부터 생긴 트라우마를 해소할 기회가 왔다. 근무하던 최전방 소대에 평소에 공연히 사병들을 트집 잡아 때리고 괴롭히고 닦달하던 하사관이 하나 있었다. 뒷구멍으로 선임병장인 나를 비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초 봄에 달도 없는 새벽에 농로 위에서 그와 맞닥뜨렸다. 격투를 할 기회가 왔다. 훈련소의 하사관처럼 야비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상대에게 먼저 치라는 말을 던졌다. 당당하게 맞서 농수로 아래 논바닥 물에 쳐 박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사법처리 없이 제대 하게 되었다. 폭력에의 스트레스 장애를 말끔히 해소하고 사연 많은 군문(軍門)을 나섰다.
각종 보도를 종합해 분석해 보니 이 나라 군대 지휘관들은 초급부터 고급 지휘관들까지 사병들의 안위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40년 전 지휘관들의 책임 의식보다 더 후퇴 하였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분석이 불가능 하다. 인문교육을 강화해서 해결 하자는 소리가 들린다. 허무한 진단일 뿐이다. 수천 만 인구의 인문 교육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진도 유족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사발 라면을 끓여 유족들 약 올리듯이 퍼 먹던 교육부장관이 할 것인가? 논문 도용이나 하던 교육부 장관이 할 것인가? 문화융성 시대라니 음주 운전이나 하면서 경찰관에게 기자 신분을 과시하던 자가 할 것인가? 잔인한 폭력을 당하다가 비극적으로 죽어간 일등병의 죽음을 놓고도 전군 비상을 걸지 않았던 전직 국방장관에게 60만 대군의 인문교육을 맡기나?
공권력을 집행하면서 벌어먹고 살던 자들이 공권력의 힘을 믿고 죄 없는 국민들을 법의 이름으로 잔인하게 고문하고 매질하고 전기고문 하던 현대역사를 정리하지 않고 인문학 교육이 될 일인가?
민주주의의 회복과 역사의 진실을 알리다가 도합 5년 의 징역을 사시느라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신 고 이영희 선생이 최초로 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수사주임을 했던 자가 있었다. 1964년도 당시의 50세정도. 그러면 그 자가 왜놈들 군대의 헌병 노릇을 할 때는 30세 전 후였을 것이다. 그 자가 체포 영장도 없이 잡혀온 이영희 선생을 지하 고문실에 앉혀 놓고 겁을 주던 말은 이것이었다.
“이 기자, 까불지 마!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여기 들어 왔던 놈들 중에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놈들이 얼마나 되는 줄 아나?”
“내기 기왕에 해방 전 만주에서 헌병 노릇을 할 때 내 손에 죽어 나간 소위 독립운동 하던 놈들이 몇 명인지 알기나 해? 너 까불지 마! 똑바로 진술 해!” 이영희 기자는 명색이 민주주의 헌법 하의 국가에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소임을 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보부의 공권력을 믿고 왜놈 헌병 노릇을 하던 친일분자가 해방 된 조국에서 순수한 언론인에게 그렇듯 협박을 한 것이다. 해방 전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 노릇을 했던 노덕술(松浦鴻마쓰우라 히로) 은 예사로 식민지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자들을 붙잡아다가 닦달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공투사의 칭호를 내리며 그들 중용 하였다. 이것이 잘못 꿰어진 이 나라 역사의 단추인 것이다.
나라가 되려면 언젠가 군대 폭력 문화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 때까지는 병사들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
병사들아, 반항 하라! 폭력에 반항 할 때만이 고귀하다.
선임 병은 상관이 아니다. 전우인 것이다. 설사상관이라 한들 폭력을 받아 들이지 마라! 적을 목전에 두고 전우끼리 폭력이 행사 된 다는 것은 군대의 망조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전우를 때리는 것도 얻어맞는 것도 정상적인 군대의 궤를 한참 벗어나는 비정상인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는다는 것은 진정 코 인간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비정상을 정상으로 하자는 정부의 주창이 있지 않은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하기 위하여 반항 했을 때 누가 그대들에게 형벌을 내리겠는가? 국군 통수권자에게 거역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단호하게 선임자의 폭력에 대항 하라! 반항하고 저항 하라! 때리는 자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 받아라! 야전삽을 들고 대항 하라! 군화발로 야비한 상대의 불알을 걷어 차 버려라! 지휘관에게 뛰어가 담판을 지어라! 군대를 정상으로 할 것이냐 폭력을 방임 할 것이냐를 물어라! 너희들은 너희들의 인권과 부모님의 명예를 위하여 그렇게 할 권리와 자격이 있다. 나라를 위하여 징집된 군인에게는 마땅한 권리와 자격이 있다. 적을 앞에 두고 전우를 짓밟는 자는 내부의 적이다. 프락치다. 적을 이롭게 했으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야 할 주적이다. 주적은 쳐야 한다. 과감하게 주적을 쳐라!
병사들아!
폭력은 폭력에 반항함으로서 멈춰지는 것이다. 무력한 피학자(被虐者)는 가학자(加虐者)의 폭력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폭력의 본질이다. 그러니 병사들아, 부디 용기를 가져라! 힘을 내라! 이것이 죄 많은 부모세대의 간절한 부탁이다. 더 이상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