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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1조]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자유광명의 빛으로써 우주본체인 양심은 생명의 근원이다.
정도전/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대왕 세종/백성은 하늘이다.
제갈 윤대중(DJ)/최후 승자는 양심가진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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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치권은 입으로는 국민을 잘도 팔면서 왜 국민을 무시하고 우롱하며, 아무 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노예취급하며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정치와 공천을 하는 것인가!그리고 패거리 정치의식으로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지식인.언론인 등 노예 국민 역시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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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왜 책임지지 않으려는 국정운영을 하는가! 특별법 제정은 국민의 명령이다!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들 처벌하고 국민이 안전한 나라을 만들고 부패와 탐욕과 독식을 척결하여 국가기강 확립과 함께 모든 지역이 더불어 살아 가는 복지국가를 만들자!
세월호 유가족의 마음으로 특별법 국회통과에 목숨걸지 못하고 선거에 악용하려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대패한 건 당연한 것이다.
지구행성이 빛의 광자대로 진입한 시대는 거짓없이 투명하고 공정한 국정운영과 정치만이 살아 남는 양심정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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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의 승리를 충무공 이순신은 이렇게 고백했을 것이다.
"30배의 숫적 열세에서 부하 장수들도 승리가 불가하다고 전투를 포기하고자 했지..나를 음해하고 비방한 조정의 간신배들도 선조 왕에게 간언하여 바다를 버리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했다.. 그러나, 바다를 잘 아는 호남 백성들이 알려 준 지형정보를 통하여 울둘목의 빠른 조류만 잘 이용하면 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조선백성 모두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기에 싸워야만 모두 살 수 인지못한 왕과 부하장수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지..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하 장수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대장선이 최선두에서 싸웠다..
나를 죽이겠다고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보낸 왜구(노랑개족)출신의 구루지마가 이끄는 선단 30여척을 대포로 격파해 버리고 구루지마의 목을 베어서 걸었지..그러자, 나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었던 왜수군은 물러나고 말았지..그래서 진도와 해남을 걸었다던 진정한 쇠줄은승리에 대한 나의 용기와 결단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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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사즉생 정신과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여 30배 차이가 난 수군의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여 전쟁을 종지부찍게 한 영화<명량>잘 보았습니다.
4색 당파로 나뉘어 당쟁으로 날밤샜던 무능 무책임 패거리 정치가 만든 외세의 침략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살륙당하고 수탈당하게 할 수는 없다는 애민의식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 가지고도 거대한 왜수군에 맞서 사즉생으로 싸워 승리하겠다는 진정한 고구려의 상무정신이였다. 탈영하거나 군율을 위반한 자들은 가차없이 목을 베어 버렸다. 무장 이전에 철저한 원칙주의자 이순신의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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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7.30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왜 대패하였는가?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원칙주의가 상실했기 때문이다. 즉, 통합의 명분이 되는 당헌에 의거한 민주적인 경선이 아니라, 전략공천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낙하산 공천(독재공천)으로 인한 내분과 지역구에 뿌리 받으며 지역민과 함께 해 온 지역후보를 내세우기 보다는 정치적 명성만 앞세워 타지역 후보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손학규.김두관이라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역민을 섬기고 봉사해 온 지역후보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헌이라는 원칙을 위반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것은 마땅하다. 헌법과 당헌은 국가와 정당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반드시 이행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고로 주권과 권력의 주인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헌법 1조에 반하는, 지역민과 국민을 우롱하고 무시하는 전략공천은 반드시 백전백패일 수 밖에 없다. 유가족의 통한을 최우선시하여 세월호 참사 특별법 국회통과를 위한 사즉생 정치를 보여 주지 못한 점 또한 대패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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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하여(현장상황도 모르는 선조의 명을 따르면 패배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음) 조선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여 하옥당하여 고문을 받을 때 조선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왜수군에 대패를 당하자,
다시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되면서 전라도 해안지역을 돌면서 흩어진 수군과 군선들을 모으고 전남 완도 고금도을 조선수군본영으로 삼고 진도 벽파진에서 명량해전을 준비할 때, 두려움에 질린 수군이 탈영을 하고, 조선조정과 부하 장수들이 불가한 전투라며 바다를 포기하고 육군에 편입하자고 요구했지만, 이순신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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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뛰어난 전술을 기반으로 하는 승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죽겠다는 사즉생 정신이 결국 30배가 넘는 왜수군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리더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순신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영화 <명량>은 난중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바탕으로 철저히 고증하여 300여척의 왜 수군에 맞서 빠른 조류를 최대한 활용한 전술을 전제로 <사즉생>의 각오로 최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여 두려움에 떨었던 조선수군에게 담대한 용기을 줌으로써 결국 이순신을 죽이고 서해를 타고 한양으로 진입, 선조를 잡아 항복을 받아 내고 한반도를 당시 명나라와 대륙을 정벌하는 후방기지로 삼겠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찬 망상을 단번에 무너 뜨려 버리고 말았다.
충무공 이순신 죽기를 각오하고 최선두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명량대첩은 없었고, 서남해 마고성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제목을 <사즉생>으로 정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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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승리 분석자료]난중일기의 기록과 함께 해남 우수영 울돌목(명량)의 지형을 따라 한 번 그 날의 승리를 추론해 가 보자.
명량해전이 일어난 1597(정유)년 (음) 9월 16일 난중일기의 첫 머리를 보면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아침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의 시각은 대략 오전 8시 전후, 당시 왜 수군은 어란진에 주둔해 있었고, 공격 당일 왜 수군의 본대 330여척은 이른 새벽 횡렬로 이동하며, 진도 벽파 해협을 거쳐 울돌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이 공격선으로 선택했던 건, 둔탁하게 움직이는 대형 안택선보단 울돌목의 물살과 지형을 고려해 기동력이 빠른 중소형 돌격선인 세키부네였다. 또, 명량의 좁은 물목은 세키부네 133척이 한꺼번에 전투력을 발휘하기에는 비좁았기에 기동전술에 능한 해적출신 구루지마 함대의 세키부네 30여척을 먼저 울돌목 안쪽으로 출항시켰고, 곧바로 전선 100여척을 뒤 따라르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습을 보고 조선수군의 정찰대(별망군)는 신기전을 쏴 올려 적함대의 발진과 그 규모를 이순신에게 급하게 보고했다. 이어지는 난중일기엔 이충무공이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고 적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명량해전에 있어 가장 미스테리 한 부분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조선수군의 전술운용과 아군의 정보와 관계된 것은 명쾌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또 조정에 보내는 장계에도 어떤 전술과 의병술을 써 적군을 물리쳤는지 세세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혹여나 아군의 정보가 적군에게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일부러 그러한 것으로 엿보인다. 그로 인해 많은 학자들과 연구가들은 명량해전의 승리가 우수영 울돌목의 해류를 이용했다는 것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만 “먼저 기습을 당했다” “또 전술적 운용 형태에 대해선 일자진이다 학익진이다” 아니면 각기 다른 주장을 펴며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사실 명량해전에서 어떤 승리를 이뤘느냐가 설명되기 위해선 ‘해전이 일어난 장소가 정확히 어디였느냐? 울돌목 주위로 조선수군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느냐? 또 조선수군의 첫 공격시점은 언제 시작되었느냐?’이다.
현재 명량해전이 일어난 장소를 정확히 추정해보면, 진도대교에서부터 양도 사이가 전투의 중심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울돌목 안쪽에서 지점에서 싸운다면 왜 수군이 일단 진도대교를 넘어와 버리면 물살이 역방향이기 때문에 다시 왜 수군의 본대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 자연스레 울돌목의 물살 속에 갇히게 된다.
또, 울돌목 안쪽에서 양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전투선의 총합은 30~40여척 정도, 그 정도면 더 이상 들어 올려야 들어 올 공간이 없다.
실지 명량해전에서 격퇴시킨 왜 함선의 수는 30여척정도다. 이는 결국 실제 싸움에서도 30~40여척과 싸웠다는 이야기인데, 이충무공이 싸우기 전 그렸던 전투의 그림 또한 왜 함선 100여척은 울돌목에 끌어들이지 않고 왜 수군의 선봉 부대인 30여척과 싸움, 바로 1대3 정도라면 능히 해볼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고, 이충무공의 예상처럼 그 30여척이 진도대교를 먼저 건너 왔을 것이다.
다음은 조선수군의 주변배치, 당연히 지형에 숨는 엄폐 된 상태였을 것이다. 싸움에 있어서 적에게 최대의 치명상을 주기 위해선 단 한 번의 강력한 기습선제공격, 그 일격을 위해선 당연히 기습작전이 필요했을 것이고, 기습작전은 그 지역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엄폐 속에서라야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미 전술전략에 있어 신의 경지에 이른 이충무공이라면 의당 울돌목의 지형과 지물을 최대한 이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조선 함대가 포진해 있던 배치도를 그려보면, 우선 이충무공의 대장선이 엄폐했던 지역은 울돌목의 바로 뒤편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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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명량해전에 참전한 김응함과 안위, 김억추의 선단은 이충무공이 난중일기에서 <한참 싸우다 여러 장수들을 돌아 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는 말을 말미암아 양도 뒷부분에 감추어 두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왕조실록에 일반 어선들이 후미에서 싸움을 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수군을 도왔던 일반 어선은 아마도 적이 쉽게 보일 수 있도록 먼 바다에, 추정하면 임하도 부근 정도에 정렬시켜 허장성세(虛張聲勢)로써 활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수군 함대가 항로를 잡을 때는 미리 척후병을 보내 상황을 점검케 하는데, 당시에도 왜수군의 척후병은 미리 울돌목을 점검했을 것이다. 그리해 조선함대는 왜 수군이 다가올 때까지 최대한 우수영에 집결해 있다가 짜여진 각본 아래 순식간에 엄폐할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나타나 있듯 이 충무공은 진도 녹진방향(육지) 쪽과 우수영, 양도에다가도 화포를 숨겨둬 첫 공격시점에서 공격의 예봉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다.
첫 공격의 시점은 울돌목 안으로 들어온 적선 30여척에게 가장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그 거리에 맞췄을 것이다. 공격은 30여척의 구르지마 선단이 울돌목을 통과한 후 양도와 울돌목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공격의 시작 신호는 대장선인 이충무공의 함대의 첫 발포를 신호로 하여 일제히 각 함대와 육지의 숨겨둔 화포 공격이 시작됐을 것이다.
본래 이순신의 함대에서 첫 포격이 시작되면, 양도 뒤편에 숨어있는 김응함과 안위가 항진하는 왜 수군 앞을 막아서며 포격을 가하거나 양도를 돌아서 나와 구르지마 선단의 상단부위를 화포공격 후 돌진, 그 즈음 이순신은 곧바로 구루지마의 후미를 돌진해 초전에 30여척의 배를 무기력화 시켜버리기로 약속되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