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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웃음
우리나라에서는 듣기 힘든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그야말로 ‘대륙의 웃음’이었다. 7월 3일부터 1박 2일간의 일정으로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따라 사상 최초로 한국땅을 밟은 중국의 퍼스트레이디인 펑리위안 여사는 보통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소곳하게 웃는 우리나라 여성들과는 달리 웬만한 사내들 저리가라 할 만큼 큰 소리로 파안대소했기 때문이다.
금년은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두 갑자, 곧 120년이 되는 해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씨 척족의 조선 조정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려고 청나라의 군사개입을 요청하자 일본이 텐진조약을 알리바이 삼아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수십만 명의 농민군 병사들을 잔인무도하게 살육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부질없다고 하지만 만약 그때 청이 일본에 승리했다고 해도 한민족의 근대사는 질곡과 고통의 수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천황의 일본제국이나, 천자의 대청제국이나 우리민족에게는 자기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된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이라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던 이유에서다.
펑리위안의 호탕한 웃음은 한반도에서 쫓겨났던 중국세력이 120년 만에 화려하게 돌아왔음을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일화로 어쩌면 후세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을지문덕 장군의 동상이 없는 을지로 입구에 으리으리한 크기로 큼지막하게 들어선 주한 중국대사관의 위용과 마주하면 중화제국의 영광은 진즉에 굴기에 명백히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중화제국의 부활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작업은 전집 한 질 분량으로도 모자랄 듯싶다. 게다가 상대적 국력 쇠퇴에 직면한 미국이 집단적 자위권이라는 구실 아래 착착 진행되어온 일본의 재무장을 용인해가면서까지 중국 봉쇄에 나선 상황임을 생각해보면 우리들 머리는 더더욱 지끈지끈하게 아파오기 마련이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에 의지하는 한국으로서는 언제 어디에서 어느 사건을 계기로 가랑이가 찢어질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는 불안한 입장에 놓여있는 셈이다. 이렇게 꼬이고 저렇게 엉켜버린 한국의 복잡하고 심란한 처지는 북한이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마침내 화룡점정을 찍는지라 좌불안석도 이런 좌불안석은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게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대근씨는 ‘외교는 언제 하나?’란 제목의 기명 칼럼을 통해 난해한 고차방정식으로 이뤄진 국제관계를 북한식 선군사상을 연상시키는 군사적 해법만으로 단칼에 풀려고 시도하는 박근혜 정권의 무모한 발상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소설가 고종석씨는 세계정세는 물론이고 한국과 직결되는 동북아정세에조차도 무심하거나 무지한 정부와 언론을 신랄하게 질타했다. 그런데 고종석과 이대근 두 사람의 따끔한 일침으로부터 야당, 더 범위를 넓히면 야권은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울까?
내가 지인들과 만나 한국정치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빠짐없이 해주는 얘기가 있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30분만 가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사안의 성격에 따라서는 때때로 소말리아마저도 방불케 하는 대표적 실패국가인 (Failure State)인 북한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지적한 후에 곧바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뉴욕에서 차로 30분을 달리면 아프가니스탄이 나타날 경우 미국이 현재와 같은 경제체제를 채택할 수 있었겠느냐고?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백만 명이 넘는 양국의 젊은이들이 반세기가 넘게 중무장을 한 채 대치하고 있으면 대한민국의 야당 정치인들과 진보적 유권자들에 부단히 벤치마킹하려고 노력중인 서유럽 제국(諸國)들의 현존하는 사회시스템이 실제로 구현이 가능했겠느냐고?
유체이탈 패러다임
특정한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제공했거나, 어떠한 사건의 중심에 바로 본인이 자리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러한 사건이나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문학에서 사용되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 서서 마치 제3자 같이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방식을 우리는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를 한껏 끌어올린 이명박 대통령이 MB 정부는 도덕적인 정부라고 허세를 부렸을 때, 부정한 경제범죄를 저질러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국민들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는 자가당착의 궤변을 늘어놓았을 때 시민들은 전형적 유체이탈 화법이라며 이들의 발언을 비꼬고 조롱하였다. 실재의 현실과 주체의 인식이 터무니없이 따로 놀 때 유체이탈 화법은 생성되는 것이다.
북유럽식 복지국가는 지난 2012년의 18대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조차도 공약으로 채택됐을 정도로 이제 한국사회에서 거의 정설처럼 통용되고 있다. 특히 야권 내부에서는 이 모델에 대해 약간의 회의나 의구심을 내보이기만 해도 파탄난 신자유주의의 파렴치한 옹호자처럼 매도당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미꽃도 사막 한가운데에서는 이내 말라죽는 법이다. 관건은 그 모델이 20세기 중반,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눈 적이 있고, 21세기까지도 냉전체제의 구조가 여전히 온존하고 있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효과적으로 적용되고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여부다.
유럽형 복지국가 모델이 성립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안정된 대외환경이다. 한마디로 전쟁의 공포감을 상시적으로 느끼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 역시 전쟁의 공포에서 꽤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는 위험의 극복이 아닌 위험의 망각 내지 위험에 대한 불감증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고. 북유럽이 누리고 있는 평화와 협력의 대외관계는 따라서 아직은 언감생심 꿈일 뿐이다.
새누리당은 일촉즉발의 불안정한 한반도 안보상황에 힘입어 정권을 연장하고 지지기반을 재생산할 동력과 토대를 지속적으로 확보해왔다.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은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실현하고, 남북관계를 화해와 신뢰의 반석 위에 단단히 올려놓는 데에서 정권탈환의 발판과 에너지를 마련해나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야당 정치인들은 한반도가 북해나 발트해와 연접해 있다고 착각하는 눈치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계정세는 물론이고 한국과 직결된 동북아 정세에 대해 지금처럼 무심하게 지낼 수는 없으리라.
내수지향형 정치를 넘어서
내수시장을 키워야 우리 경제의 새로운 활로가 트이고 돌파구가 열린다는 진단과 처방을 내로라하는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지는 이미 오래다. 수출에 목맨 한국경제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정치의 관심과 시선은 철저히 내수에만 초점이 맞춰져왔고, 그 결과 인구 5천만에 달하는 거대 국가의 미래가 소박한 마을공동체 만들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한편으로는 매우 이상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이상한 담론마저 명색이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공공연히 운위되는 지경이다. 유체이탈 화법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유체이탈 패러다임이라고나 할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격언이 있다.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한 탓에 야당 정치인들의 초조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깊고도 높아진 상태다. 허나 그럴수록 인내심을 갖고 더욱더 돌아가야만 한다. 광화문으로, 청계광장으로 달려가 촛불을 흔드는 일은 시민사회에 맡기고 야당은 워싱턴을, 모스크바를, 베이징을, 도쿄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평양을 우회해 서울로 복귀하는 장기 레이스를 펼쳐야 한다. 한반도의 통일 문제와 동북아의 평화 문제에서 확실한 효능감을 유권자들에게 과시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에서 독일 통일의 교훈을 면밀히 연구하며 집권의 청사진을 차분히 그려나갔다. 한반도의 냉전체제를 근본적으로 해체시킬 실력과 비전은 선군사상으로 치닫는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과 그 구성원들에게 있음을 야당은 국민들에게 증명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