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대하사극 ‘정도전’이 막을 내렸다. ‘정도전’은 엄연히 객관적 기록으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적 사실들마저 제멋대로 왜곡시키는 단소경박한 변태 사극들이 ‘퓨전 사극’이라는 미명 하에 횡행해온 우리나라 방송계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맛볼 수 있는 중후장대한 정통 사극이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시청자들의 열광과 유명 평론가들의 찬사를 얻어내면서 시청률과 작품성에서 전부 성공한, 그야말로 두 마리 토기를 잡은 명품 사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내게는 정도전이 실권을 쥐고 조선왕조의 건국 작업을 본격적으로 주도하는 극의 후반부보다는, 이인임을 필두로 하는 권문세족들의 집요한 견제와 탄핵으로 말미암아 관직에서 쫓겨나 야인 신분으로 영락한 그가 천하를 주유하는 전반부가 더욱더 인상 깊은 장면으로 각인돼 있다. 요동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저 광활한 요동 벌판까지도 시야에 집어넣고서 새로운 나라를 설계할 수 있었던 고려 말 상황이 어쩌면 조금은 부러웠는지 모른다.
좁다. 좁아도 너무 좁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로 지금 야당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인사들의 시선은 가면 갈수록 좁아져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야당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입장에 놓인 유수의 진보언론과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인식의 넓이와 생각의 확장성은 이보다 더 좁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 영역은 오래된 농성장이나 몇몇 ‘대안’공동체들로부터 벗어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간판 아래 주로 모여 있는 야당 정치인들이 지난 수년간 국민들에게 보여준 축소지향의 행보가 향후에도 상당기간 동안은 멈출 기세가 없음을 알려주는 달갑지 않은 예후라고 하겠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의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이 주장해온 정책들을 본인의 고유한 공약인 양 교묘하게 인수ㆍ합병함으로써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문재인 의원에게 나름 여유 있게 승리를 거뒀다. 경제민주화 추진과 유럽식 복지국가 실현이 그것들이다. 물론 야당으로부터 가로채간 화려한 정책과 장밋빛 공약들은 박근혜 정권의 출범과 더불어 공공연히 폐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야당이 여당에게 눈감고 도둑맞은 의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있었으면 땅을 치면서 분해했을 중요한 화두 하나가 남아있는 이유에서다. 바로 ‘유라시아’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0월 18일 서울에서 개최된 유라시아 국제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를 공식 발표했다. 경제협력을 통해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한다는 궁극적 지향점을 지닌 이 구상에서 특별히 신선하거나 획기적 내용은 발견하기가 어렵다. 막무가내의 대북강경책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다가 남북관계를 무모하게 경색시켜 북한의 핵무장 능력만 되레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초래한 이명박 정권의 ‘비핵개방 3000’의 표현만 온건한 확장판이라고 해석하면 큰 무리가 없으리라.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부분은 박근혜 정권의 유라시아 구상의 맹점과 모순을 신나게 까발리고 사납게 물어뜯는다고 하여 한민족의 장기적 미래와 지속적 생존가능성이 달린 유라시아라는 주제가 야당의 품안으로 자동으로 성큼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박근혜 정권은 비록 서투르고 성급하게나마 한반도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건만, 야당은 우물 안 개구리 역할에 여전히 만족하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 대중에게 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의 중심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북한이라는 커다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아니, 북한을 관문으로 여기는 발상 자체부터가 원천적으로 오류다. 북한은 내 몸의 반쪽과 같은 존재이니까. 그리고 북한 너머에 거대한 몸뚱이를 똬리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심원한 안목과 면밀한 청사진 역시 필요하다.
유라시아 대륙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인 ‘북방 문제’에 관해서 현재의 야당 정치인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은 내가 여의도와 워낙 담을 쌓고 지내는 탓인지 아직은 들리지 않는다. 그 대신 최근 거의 대세라고 할 만큼 유행의 흐름을 타고 있는 현상이 ‘소규모 마을공동체’이다.
물론 취지는 좋다. 지역사회를 가꾸고, 주변의 이웃들과 함께 의미 있는 사회적 활동을 해나가는 것에 대해 그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허나 우리가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할 냉엄한 현실이 있으니 우리가 발 딛고 생활하고 있는 여기 이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자동차로 30분만 달리면 시리아와의, 이라크와의, 혹은 아프가니스탄과의 황량하고 살벌한 국경지대가 을씨년스럽게 등장한다면 그네들 바이킹의 후예들이 우리나라의 야당 정치인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이 유토피아적 이상향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화목하고 평화로운 마을공동체를 가꾸는 일에 과연 태평한 심정으로 모든 역량과 인력을 모두걸기로 투입할 수가 있을까?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냉전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시대에 이는 엄청난 긴장과 부담을 우리에게 강요하였다. 그렇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과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키시면서 서해 건너의, 휴전선 너머의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이 우리에게 더 이상 공포와 위협의 근원만은 아니게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자랑거리라고 할 한류가 유라시아 각국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에게 새로이 열린 기회의 창 저쪽에 얼마나 귀하고 커다란 보물이 한국을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절로 흥분될 지경이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일종의 수단으로서만 유라시아를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당당한 목적으로서의 유라시아를 말해야 한다. 목적으로서의 유라시아를 개척해야 할 막중한 사명과 무거운 책임이 야당에게 주어져 있다. 정도전이 새 왕조를 개창할 것을 꿈꾸며 당대의 고려에서 일개 군벌 정도로 평가절하되었을 동북면의 실력자 이성계를 찾아갔듯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야당 정치인들은 베이징과 모스크바와 울란바토르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수도들을 내 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다양한 유목부족들과 농경민족들을 자신의 나라 안에서 조화롭게 공존시키면서 당제국과 자웅을 겨뤘던 발해왕국을 가슴속의 꿈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언제나 역사는 이왕이면 더 크고 멀리 꿈꾸는 자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임을 늘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