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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전쟁을 아느냐? 그것도 진짜 전쟁을. 하고 묻는다면 혹자는 뭐라 대답할까. 사람에 따라서 대답하는 내용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관점이 다르고 생각하는 틀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 다르다. 국가도 그렇다. 그러나 현대는 분명히 말하지만 “역사 전쟁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을 혼을 잃은 민족’이기에 우리는 현재의 거울인 역사를 들여다보고 한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다. 열흘 가는 꽃 없듯이 시간 앞에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역사상 가장 넓은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제국도 몽고제국도 지금은 한 낱 건축물이나 유물 같은 얼마 남지 않은 흔적들로 그 실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없는 민초들의 삶은 무엇으로 찾아야 할까. 찬란한 문화재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함께 누리지 못했던 민중들의 저항은 어디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할까? 만감에 젖어 갑오농민전쟁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1894년 농민 전쟁은 조선 말 외세를 물리치고 압정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한 민중 항쟁이고, 봉건적 신분제를 철폐하여 민중이 사회의 주인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자 하는 혁명 운동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이 집결했던 곳,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던 황토현, 이런 곳엔 애초부터 무슨 볼만한 유적이 남아있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이 밟았던 땅에 발 딛고, 그들이 바라보던 들판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으로 흙과 삽과 괭이를 버리고 죽창을 들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목숨을 걸었는지를 떠올려 볼 뿐이다.
동학유적지 황토현(黃土峴)은 글자 그대로 황토로 덮인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태인에서 고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해발고도 35.5m의 야트막한 고개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산면 하학리에 있는데 전에는 ‘진등’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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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못 이겨 봉기하여 이듬해 정월에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무기고(武器庫)를 파괴하고 무기를 빼앗았고, 수세곡(水稅穀)을 창고에서 꺼내어 원래의 주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마항 장터에 장막을 치고 사태를 엿보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조사케 하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일체의 잘못을 동학농민군에게 전가하고 탄압하니 전봉준을 중심한 동학군은 격분하여 인근의 접주(接主)들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처음에는 고부읍 북쪽의 백산을 점령하였다. 이때 수만 명이 모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강령(綱領)을 선포하고 격문을 사방에 띄워 호응을 얻었다. 이어 전봉준은 부안관아를 점령하고 다시 돌아와 도교산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부안이 점거 당했다는 소식에 급히 별초군 250명과 많은 보부상(褓負商)을 이끌고 동학군을 토벌하러 나섰다.
동학군(東學軍)에서는 4월 6일(5월 10일) 어둠을 틈타 보부상을 가장하여 황토현(黃土峴)에 있는 관군을 살피고, 관군이 깊은 잠에 빠진 이튿날 이른 새벽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편성한 후, 일대는 서쪽과 남쪽의 정면에서 들이치고, 또 하나의 대오는 동북쪽의 뒤쪽에서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백 명의 관군(官軍)은 목숨을 잃고, 많은 무기와 곡식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혁명군은 황토현의 승리로 사기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져, 그날로 정읍을 점령하고 죄 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하였다. 5월 12일에는 흥덕과 고창, 무장을 석권하고, 이곳에서 동학군이 봉기한 취지를 재천명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은 처음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는데 1981년 12월 10일에 사적 제 295호로 격상되어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기념관 40평을 비롯하여 3월의 백산봉기, 전주집강소, 9월의 삼례 봉기, 우금치전투 외 유품자료 등을 비치하였다. 그 바로 옆에는 높이 2.7 m 좌대 3.7m의 전봉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우리나라는 4대강국에 들러 싸여 예나 지금이나 결코 순탄한 세월을 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문제에서도 그렇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기에 우리역사의 보존과 바로 알기에 기울여야 하는 지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역사를 모르는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혼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 이기에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지키려는 정신으로 우리 역사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야겠다.
정녕 그렇다. 뿌리 없는 생명은 없다. 뿌리는 생명의 근거이자 삶의 원천이다. 역사는 민족의 뿌리를 말해준다. 우리역사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농민전적지인 황토현과 고부관아와 만석보를 둘러보면서 새삼스럽게 그날의 정신을 되새긴다.
박정례/ 기자,르포자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