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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살생부(殺生簿)’라는 게 화두로 떠올랐다.
살생부란 ‘죽이고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둔 명부(名簿)’다. 이런 게 요즘 여의도 정가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살생부의 유래는 조선 단종 때 벌어진 계유정난에서 한명회가 만든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당시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될 인물과 도움이 될 인물을 가려 죽일 자와 살려둘 자를 구분한 살생부를 작성해 수양대군에게 바쳤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가 영의정 황보인 등과 모의해 안평대군(수양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북방 육진을 개척해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여진족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김종서를 철퇴로 참살했다. 이어 왕명을 빙자해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 살부(殺簿)에 포함된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인 후 차례로 제거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살생부가 지금 새누리당 전당대회 경선과정에 등장했다.
물론 정치적 살생부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당권을 잡으면 반대편에 서있던 의원들은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주지 않겠다는 뜻으로 정치인들에게 있어서는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다.
바로 그런 살생부가 새누리당 당권주자인 김무성 의원과 서청원 의원 쪽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 의원 측에선 ‘김무성’에 반대하는 친박 핵심 의원들을 적시한 ‘친박 3적(賊)’ ‘친박 5적’ 등의 말이 나온다. 또 “김무성이 당 대표가 되면 3개월 안에 끌어 내겠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영남 모 의원이 ‘살생부 1순위에 올랐다’는 소문도 있다.
서 의원 측에서도 한반도 산악회 줄세우기 의혹을 제기한 모 재선 의원을 손봐줘야 할 인사 1순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살생부가 실제 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김 의원이나 서 의원이 직접 작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들어졌다면 계유정란 당시 살생부를 수양대군이 아니라 한명회가 작성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김 의원이나 서의원의 측근에 의해서 작성됐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런 살생부를 만든 사람의 삶이 과연 순탄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살생부 작성의 원조인 한명회의 삶 역시 그렇다.
한명회는 권람 등을 통해 수양대군과 사귀게 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는데 1등공신으로 큰 공을 세운다. 이후 한명회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부와 명예를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좋지 않았다. 성종 시대 사림파 등의 등용과 맞물려 비난을 많이 받게 되었다.
심지어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몰락시킨 유자광으로부터도 모함을 받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예종비, 성종비로 들인 딸들이 일찍 죽으면서 실질적으로 외척의 자격을 상실하기도 했다. 한명회 사후로도 한명회의 자손들이 크게 등용된 바가 없다.
살생부를 만들어 수양대군의 신임을 얻고 승승장구하지만 막바지에는 노회하고 실패한 권력자로서 인생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경고하거니와 만에 하나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무성-서청원 양강 주자들에게 살생부를 만들어 건네는 측근이 있다면 그는 한명회의 실패한 인생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김 의원과 서 의원 모두 공천권을 당원에게 돌려주는 ‘정당 민주주의’를 반드시 실현시키겠다거나 ‘상향식 공천제’의 틀을 확실하게 마련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신의 반대편에 섰던 인사들을 공천에서 제외시키겠다면, 이런 약속은 모두 거짓말 이라는 걸 스스로 입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김 의원과 서 의원은 요즘 중위권을 형성하고 있는 홍문종 의원과 이인제 의원에 대한 당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반성해야 한다.
당원들 사이에서는 김 의원과 서 의원 중에 누구 한 사람은 당 대표가 되고 누구 한 사람은 최고위원이 될 경우 당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홍 의원이나 이 의원 같은 사람이 당 대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보고도 김 의원과 서 의원이 반성하지 못한다면, 전당대회에서 당원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살생부가 존재한다면 즉각 폐기하라.
<고하승:시민일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