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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에서 실향은 슬픔이기 전에 위험한 꼬리표였다[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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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는 말하련다"
<기획> 7.4공동성명 42주년, '분단시대의 천형 이산' (1)
이미혜 2014.07.02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963
‘월북’만큼 위험한 꼬리표 ‘실향민’
아버지는 6.25 참전 군인이셨다. 그리고 군인 정신에 충실한 직업 군인이셨다. 평생 조선일보만 보셨으며, 종종 요즘 젊은이들의 사상을 개탄하셨고, 6.25 때면 퇴역 군인들의 거리 행진에 함께하시곤 했다.
'잊지 말자 6.25'를 외치며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빛바랜 군복의 가슴에 과거의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시가 행진을 하는 모습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지, 최루가스 가득한 교정에서 대학시절을 보낸 딸로서는 참으로 곤혹스럽고 마뜩잖은 일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군복은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5.16 혁명이 5.16 군사 쿠데타로 명칭이 바뀐 순간 멋진 군인 아저씨에 대한 환상은 깨져 버렸다. 그 이후 매사 조금씩 어긋나고 불편했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구시대의 낡은 유산으로 치부해 버렸는데, 그렇게 냉랭한 딸을 아버지는 1년에 한두 차례씩 아버지 고향 사람 모임에 부르시곤 했다. 거기서 듣는 소리란 게 뻔해서 어르신들은 끝없이 과거를 회상하며 곱씹기를 반복하거나, 여전히 6.25 직후의 비분강개를 담아 준여당 조직 수준의 시국 방담을 펼치곤 했다. 거기에 내가 귀 기울일 만한 미래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마지못해 끌려 나가 무의미하게 시간을 때우다 돌아오곤 했다.
실향민 모임의 분위기가 다 그러했지만, 아버지 역시 이북의 체제와 정권을 몹시 싫어하셨다. 아버지와 나의 의견 차이 끝은 늘 아버지의 ‘자유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의 철없음’에 대한 훈계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이북 정권에 반감을 가질 만한 경험적 근거는 없어 보였다.
가난에 이골이 난 아버지는 고향에 밭 한 뙈기 가진 것 없는 무산자(無産者)셨다. 말년에 어머니 따라 교회를 다니긴 하셨지만, 종교적인 믿음이 아버지를 지배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고향은 산간벽지였고 아버지는 월남 당시 기껏 열여섯 소년에 불과했으므로 새로 들어선 사회주의 체제나 정권에 대해 어떤 인상적인 경험을 갖기도 어려웠다. 가난으로 중단한 학업을 이어 가고 싶은 마음에 고향을 떠났으나 부두에서 드럼통 굴리며 학비를 벌기는 너무도 힘겨웠는데, 군에 지원하면 월급도 주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해서 아버지는 직업 군인의 길에 들어서셨다. 정치적 지 실향이나 이념적 신념을 가지신 건 아니었다.
추측건대, 아버지가 세상 물정을 익히고 당신의 가치관으로 사리 판단을 하게 되셨을 때쯤에는 아버지가 접하는 고향 소식은 다 흉흉한 것들뿐이었으리라. 뒤늦게 월남한 사람들이 전하는 소식이나 군에서 주어지는 정보가 다 그러했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지배해 온 레드 콤플렉스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는 완고하고 맹목적인 사상에 갇혀 이남의 현실을 보지 못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주 최근에야, 내가 젊은 혈기로 겁 없이 좌충우돌할 때, 아버지가 신봉하던 그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공포스런 이면이 딸을 삼킬까봐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 졸이셨는지를 어머니께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속속들이 알고 계셨던 것이다.
도민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보니 휴전 직후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 한 여성의 기구한 사연이 실려 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그 여성은 학업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에 전쟁을 피해 내려오지만 여성의 몸으로 피란살이를 헤쳐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후에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하여 일신의 안정을 도모하던 중 중부지방에 침투한 여간첩이란 혐의를 받고 긴급 체포된다. 말 한 마디만 실수해도 인생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녀는 엄청난 집중력과 강단을 발휘했다. 그녀는 밤새 각기 다른 일곱 명의 형사에게 반복해서 자신의 인생을 진술했는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7장의 진술서가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고서야 누명을 벗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혼자 월남한 여자, 가족 없이 떠돌아다니는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수사 대상으로 지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70년대 남북이 경쟁하듯 간첩을 파견할 때, 실향민에겐 그리움조차 멸족(滅族)의 화근이 되었다. 아버지 같은 고급 장교의 신분이라면 더더욱 표적이 될 위험이 컸을 것이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하교길에 낯선 아줌마가 접근한 기억을 갖고 있는데, 그 날 몇 번이나 우리를 단속하던 어머니의 엄엄(嚴嚴)함이 떠오르면 지금도 심장이 쫄깃해진다. 유괴범보다 더 무서운 ‘간첩’이란 두 글자는 고슴도치처럼 실향민의 삶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었다.
실향민에게 ‘월남’이란 ‘월북’만큼 위험한 꼬리표였다. 평생의 멍에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극우 반공이란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신분증명서나 마찬가지였으며, 적극적으로 체제에 대한 충성을 내면화시키는 것은 자아가 분열하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빨갱이에서 종북으로 표현은 달라졌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색깔론 공세 앞에 실향민 집단만큼 취약한 곳은 없었으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반공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 수호라는 신앙을 부추기며 결속을 다져야 했다. 내가 그 살얼음 같은 세월을 어찌 다 상상할 수 있으랴.
너희 아버지, 가면 안 돌아오신다
물론 실향민의 보수성이 보신주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고향을 떠날 때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그들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분석하고 판단할 예지를 갖추기에는 너무 젊었다. 실향의 동기도 각각이었을 터, 종교적 이유나 체제에 대한 반발 같은 것들은 남쪽 사회에 정착하면서 의식적으로 강화되었고, 실향 이후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란 북쪽 사회에 대한 의구심만 증폭시키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혈육과 이웃의 안녕에 대한 걱정이 깊어질수록 북측 사회 체제에 대한 불신도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북쪽이 겪는 기근이나 경제적 곤란은 산악지대 주민들에겐 훨씬 치명적이었다. 내가 머리로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으로 북쪽 정권을 원망하고 계셨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아버지 인생에 드리워진 비극을 찬찬히 되짚어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급기야 먹고 살기 위해 군에 지원하셨다. 그때 6.25가 터졌다. 아버지 몸에 아로새겨진 총상과 함께 그 시절의 무용담을 흘려듣던 기억 중에는 아버지의 형제 누군가가 인민군으로 입대했다는 소문 때문에 아버지가 괴로워하셨단 이야기도 들어 있다. 제발 전장에서 마주치지 말기를, 가슴 졸이며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바라셨다고 했던가.
며칠 전에는 한국전쟁 와중에 국군으로 참전하면서 고향을 떠난 것으로 짐작되는 분들의 추모 행사를 알리는 초대장을 받았다. 내가 아버지 대신 면민회에 이름을 올린 덕일 게다. 거기 <남은 자의 노래>라는 제목을 단 당시 참전 군인의 시가 실려 있다.
“3일 안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 믿지 못하는 어머니는 / 동구 밖에 서서 울고 계시고, / 국토는 양단되고 / 민족은 분열되고 / 자유는 박탈되고 / 동족상잔의 전쟁이 터지고 / (중략) / 3일의 약속은 반세기가 지나고 / 전사하고 병사하고 / 남은 자도 늙고 병들어 /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제2의 고향에 추모비를 세운다는 사연이었다. 3일의 약속이 30년이 되고 60년이 되는 시간 동안 이분들의 가슴 속 돌은 집채만 한 바위가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한 번 떠난 고향을 살아생전 두 번 다시 밟지 못하게 되실 줄 꿈에도 모르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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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겐 세상 그 어느 산보다 칠보산이 제일이었다. 함북금강이라는 칠보산의 빼어난 경치 때문만은 아니었으리가. 어려서 들었던 고향의 산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사진은 ‘칠보산의 여름’- 북.공훈 예술가 김순규작 [통일뉴스]
아버지는 말년에 등산에 재미를 붙이셨다. 워낙에 사진 찍는 걸 좋아하셨으니 운동 삼아 다니시며 좋은 풍경 사진도 찍으시면 노년에 심심치는 않으시겠다 했는데, 아버지의 등산은 산책 삼아 뒷동산 오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전국의 유명한 산이란 산은 다 순례하시는데, 험준한 산과 험악한 등산 코스를 가리지 않고 무슨 산악 훈련하시듯 강행군을 하셨다. “아버지, 금강산이 그렇게 좋다는데 한 번 안 가보세요?” 하면, “야, 그거 금강산 그게 무슨 산이냐, 뭐 경치 좋다고 해도 칠보산만 못하지, 산은 칠보산이 제일이지.” 하시더니, 어느 겨울 관악산 중턱에서 눈을 감으셨다.
노인네가 하필이면 그 추운 날, 거기 등산길이 험하다는데 거기를 가실 게 뭐냐고 주변에서 혀를 차는 걸 보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가 고향에 돌아가면 옛날 그 칠보산 자락 다시 오르시려고 그토록 기를 쓰고 등산을 하셨던 게구나. 혹시나 기력이 쇠해 고향에 못 가실까봐 젊은 사람도 오르기 힘들다는 산을 숨이 차도록 오르며 체력을 비축하고 계셨던 거구나.
아버지가 그렇게 안 가겠다던 금강산 관광을 가겠다고 하셨을 때, 어머니는 펄쩍 뛰셨다. 건강상의 이유로 따라나서지 못하니 공연히 어깃장을 놓으시나 보다 했는데, 어머니 표정이 그게 아니었다. “너희는 모른다. 이 양반, 가면 안 돌아온다. 아버지 잡아라.”
“아버지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 안 하세요?” 하면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 말꼬리를 흐리곤 하셨는데, 아버지가 상봉 대상자로 거의 다 선정되었다가 포기하셨단 사실도 최근에야 알았다. 어렴풋한 기억에 상봉 가려면 선물값이 많이 든다고 한탄하시던 생각이 나 “돈 때문에 안 가신 거래요? 아, 그럼 말씀을 하시지.” 했더니, 어머니께서 그게 아니다 하신다. 이것저것 짐까지 다 챙겼다가 막판에 포기하셨단다.
아버지, 정말 가면 안 돌아오실 것 같아 그러셨나요? 다시 헤어져 돌아오는 걸음을 뗄 자신이 없어 가방 다 싸셨다가 내려놓으신 건가요? 묻고 싶지만 아버지는 이미 안 계시다, 한스럽게도.
그런데 이 나라에서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관계 개선용 이벤트에 불과하다. 일 년에 두 차례씩 명절 때마다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수십 년 헤어진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간절함과 절박함에 대한 공감은 야박하기 짝이 없다. 기껏 이산가족 상봉을 취재하면서도 체제 선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느니 하며 저 통한의 오열을 흠집 내느라 여념이 없다. 일 년에 한두 번 제사나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도 반갑다고 손 흔들다가 얼굴 붉히고 헤어지는 경우가 흔한 법인데,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가족들의 낯섦이야 오죽하겠는가마는, 이 나라 언론의 행태는 이질성을 확인하기 위해 만남의 자리를 주선하는 것 같아 보인다.
뿐인가, 교과서에서 정지용의 <향수(鄕愁)>를 가르쳐도 저 현실 속 이산가족의 가슴에 끓어 넘치는 향수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죽은 향수를 논하면서 살아있는 향수에는 감응하지 못하는 교육 앞에서 학생들이 묻는 건 당연하다, 통일 그거 왜 해야 돼요? 지금도 불편한 거 없는데, 괜히 우리 경제에 부담만 주고.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제 아버지는 안 계시다. 해마다 효창운동장에서 열리는 이북오도민회 체육대회 날이 돌아와도 불러 주는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 그리운 아버지를 찾듯 이북오도민회 체육대회가 열리는 효창운동장을 찾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버지와 함께 앉았던 자리에서 아버지를 느낄 때, 열여섯에 부모 형제를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온 아버지는 어느 자리에서 그 그리움을 추스르고 계셨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분들을 찾아, 노인들이 과거의 회억담(回憶談)에 지치지도 않나 하며 아버지의 구태의연함의 한 징표로만 여겼던 면민회를 제발로 기웃거리게 되었다.
백석은 <고향>이라는 시에서, 타향에서 만난 낯선 이가 우연히 아버지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손길이 따스하고 부드러워 /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라고 썼다. 면민회를 찾는 아버지의 마음도 그러했을까. 이용악은 함박눈을 보며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라며 “너를 남기고 온 /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어쩌자고 잠을 깨어 /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이용악, <함박눈>)이라고 읊었다.
아예 제목을 ‘향수’라고 단 정지용의 시는 고향에 대한 원초적 그리움을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고 몇 번이나 되뇌고 있고, 황해도 장연이 고향인 노천명은 <망향>이라는 시에서 “언제든 가리라. /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중략) // 언제든 가리 나중엔 / 고향 가 살다 죽으리.”라고 수구초심의 절절함을 토해 냈다. 가난한 함경도 산골 소년이 어떻게든지 학업을 이어가 보려 열여섯 어린 나이로 혈혈단신 고향을 떠나왔을 때, 그것이 세월이 흐를수록 몸부림치게 그리운 회한으로 남게 될 줄 어찌 알았을 것인가. 아버지가 ‘6.25 참전 군인’이기 이전에 ‘실향민’이셨음을 나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거의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나는 여기 실향민 모임에서 다시 듣게 되었다. 무슨 행사를 치를 때마다 국민의례로 시작하는 식순은 꼭 빠뜨리지 않고 폐회사 다음에 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식을 끝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여기서 이 노래를 부르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메어진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노래도 이어지면 나는 어김없이 눈시을이 화끈거린다. 여기가 남한의 서울 맞나 싶은 사투리와 낯선 이북의 지명들이 스스럼없이 오가는 걸 듣다 보면 나는 이미 통일이 된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여기, 실향민 모임에서 나는 온전한 민족의 실체를 느낀다. 이들에게 통일은 이해타산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명제이다. 떠나온 고향과 혈육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인데 여기 무슨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원래 하나였는데 남의 힘에 의해 둘로 쪼개진 것이거늘, 하나로 돌아가자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닌가.
통일 비용이 든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제껏 치러 온 분단 비용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세상에 공짜가 없어 분단이든 통일이든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같은 돈으로 어느 쪽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겠는가? 셈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라도 답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래도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이 통일의 실익을 저울에 올리고 싶어 한다면, 우리 주변국 중에 우리의 통일을 지지하는 나라가 하나라도 있는지 묻고 싶다. 주변 국가들이 왜 우리의 통일을 원하지 않지? 그야 우리가 강해지니까요! 그게 바로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야!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답해 주곤 한다.
헤어지기 아쉬워 꼭 잡은 손. 다시만나자고 부여잡은 손. 기여코 하나되자고 약속하는 간절한 손. [사진자료:통일뉴스]
이산가족의 비원(悲願)을 풀어주는 일은 통일로 가는 첫 단추를 꿰는 일이다. 양보할 수 없는 인도주의적 정신의 발현이다. 또한 이산가족의 상봉과 자유 왕래, 나아가서는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통일의 완성태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정착하든, 고향의 가족과 함께 이남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든, 가족들이 모여앉아 회의를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는가.
지금 ‘통일’이란 말은 이미 한물 간 유행어 취급을 당하거나, 속빈 강정이 되어 정부와 여당의 현안에 대한 관심 돌리기용으로 회자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우리가 죽기만을 기다리나?”고 분노를 토했듯이, 지금 우리 사회도 고령의 실향민들이 다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 중 하나인 실향민 모임에서는 오히려 통일이 절박한 민족의 현안으로 여겨지는데 말이다. 7.4 남북공동성명과 6.15 남북공동선언, 그리고 10.4 남북공동선언이 말이 아니라 정신으로 살아있는데 말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는 말하련다, 가족은, 민족은 만나야 한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