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난사 참사 22사단의 비극
국민에게 충격과 우려를 안겨 주었던 무장 탈영병 임모(22)병장이 사건 발생 42시간만인 23일 오후 2시 55분 가슴에 총을 쏴 자해한 상태에서 생포됨으로써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임병장은 21일 오후 8시 15분쯤 강원 고성군 22사단 관할 지역 GOP(일반전초) 소초에서 근무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복귀중 동료 장병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K-2 소총을 난사해 동료 장병 5명을 숨지게 하고 7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총기와 실탄 60여 발을 가진 채 도주하여 사고 현장 인근 주민들과 수색작전에 투입된 장병 부모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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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임병장이 무장 탈영 후 즉각 대간첩 침투작전 경계태세로 국지적 도발이나 적 부대 및 요원의 침투, 무장탈영병이 발생하여 대간첩작전이 전개 될 경우 발령하는 최고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헬기와 9개 대대 병력을 동원 수색작전을 펼쳐 왔다.
임 병장은 대규모 병력이 펼친 수색망을 휘저으며 부대에서 10㎞나 떨어진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 부근에서 수색대와 1차 교전후 5㎞쯤을 더 이동하였다가 수색대에 발각되어 완전 포위 상태에서 달려 온 부친과 형의 설득에도 투항을 거부하고 대치하였다.그러나 필기도구를 요청하여 30여분 동안 유서 형식의 글을 작성하여 남겨놓고 끝내 목숨을 끊으려 왼쪽 가슴부위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 했다.쓰러진 임병장을 급히 강릉 통합병원으로 후송하였으나 출혈이 심해 강릉 아산병원으로 이송하여 응급 치료 중에 있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것으로 알려졌다.
임병장의 생포로 총격전 등으로 인한 더 이상의 장병 피해와 혹시라도 있을 주변 민간민 피해를 막고 월북 사고 가능성을 원천 봉쇄 했다는 점에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총기난사 참사 사건으로 사고 부대인 보병 제 22사단은 최전선에서 국토 방위에 헌신하면서도 사고뭉치 부대라는 오명을 또 다시 덧씌웠다는 점에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총기난사 참사가 발생한 22사단은 '사단장의 무덤'이라고 불릴만큼 월북,경계실패,총기난사 등 심심하면 대형사고가 발생하는 것으로 오성대명(汚性大名)을 떨쳐 온 것으로 유명하다. 2012년 10월2일 북한군 병사가 철책선 경계를 뚫고 최전방 일반소초(GOP)까지 내려와 소초 생활관(내무반) 문을 두드리고 귀순 의사를 표명할 때까지 북한군을 발견치 못한데다 철책이 절단된 사실도 몰랐던 경계 실패가 문제되어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이에 앞서 2009년 10월 26일에는 22사단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민간인이 철책선을 절단하고 월북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북측 대남 방송으로 월북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등 5명이 경계 실패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경계 실패와 함께 병력관리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2년전인 2012년에 해안소초에서 경께 근무 중이던 박모 일병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는가 하면 2008년에는 경계근무 중이던 원모 이병이 선임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소총으로 목숨을 끊은 총기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또 그에 앞서 2006년에는 경계작전 중이던 김모 상병이 동료 사병의 오발로 복부 총상을 입은 총기 오발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각한 대형 총기난사 참사 사건은 30년인 1984년 6월 26일 건봉산의 22사단 56연대 4대대 최전방 관측소초(GP)에서 발생했다.당시 조모 일병이 근무 중 내무반에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해 병사 1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다쳤다.4년 뒤인 88년 9월에도 22사단 한 부대에서 이모 이병이 내무반에 수류탄 2개를 던져 2명이 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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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충격속으로 몰아넣은 총기난사 참사
이번 22사단 총기난사 무장 탈영사건은 특수한 일회성 돌발 참사가 아니다. 1980년대 이후 22사단에서 84년도에 발생한 대형 총기난사 참사에 버금가는 사건은 8건이나 더 있었다. 1993.4.19일 육군 모부대 소속 탈영병임모 일병이 서울 종로구 명륜동ㆍ혜화동 일대에서 총기를 난사하며 난동을 부려 수 명이 부상한바 있다..
일년후인 1994.10.31일에는 경기도 양주군 황적면 육군 모 부대 사격장에서 문모 일병이 사격 훈련을 통제하던 통제관들을 향해 K-2 소총 난사하여 중대장 김모 대위와 소대장 황모 중위 등 2명 이 사망하고 6∼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96년에는 한해동안 3건이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그해 9월22일에도 강원도 양구군 동면에 위치한 육군 모부대에서 김모 이병이 취사장 및 내무반에 수류탄 2발을 투척하고 소총 20여발을 난사하여 9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열흘 뒤인 10월1일에는 강원 화천군 육군 모 부대에서 김모 상병이 중대 행정반에 총기를 난사하여 동료병사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또 12월22일 에는 강원 강릉시 남포동 인근 아파트 상가 앞길에서 육군 모 부대 소속 김모 대위가 시민을 향해 K-1 소총을 난사하여 1명이 중상을 입었다.
1996년을 고비로 뜸하던 총기난사 사건은 2005년 6월19일, 경기 연천군 육군 모 부대 전방초소 내무반에서 김모 일병이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하여 8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서 재발되었다.이어 다음해인 2006년 8월10일에는 경기 가평군 현리 육군 모 부대에서 이모 이병이 동료 병사 2명에게 사격을 가해 1명의 희생자를 냈다.
가깝게는 2011년 7월4일 인천 강화군에 위치한 해병2사단 해안소초 생활관에서 김모 상병이 동료 전우를 향해 K-2총기를 난사 후 수류탄을 투척해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하여 전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와같은 대형 총기 난사 무장 탈영사건은 1980년대 이전에도 다수 발생했다.무장 탈영하여 전국을 휘저으며 난동을 부려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는 사건도 많았고 군사정부의 강력한 보도통제로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총기 난사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22사단과 멀지 않은 중동부 전선에 위치한 모부대 철책 GOP(일반전초)상에 폐허 상태로 남았는 콘크리트 벙커가 있다. 벙커가 페쇄 된 것은 1970년대 초반 당시 서울 일류대 철학과과 출신인 일병이 동료 전우들이 잠자고 있던 벙커 안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사격을 가해 거의 몰살 시킨후 도주했다가 사살된 사건의 현장때문이었다.
당시 사고를 저지른 병사는 동료 장병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인격모독을 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너무 배운게 화근이었다.그 시절만 해도 소대원 가운데 대졸자나 대학 재학중인 병사는 소대에 많아야 한 두 명이었다.대다수 병사는 초등학교나 중학 졸업자가 대부분이었고 고교 출신도 많지가 않았다.이들 저학력 병사들에게 일류대 출신 후임병은 아니꼬운 존재였고 그러한 분위기는 해당 병사가 잘못하거나 실수할때 배운놈이 그것도 못하냐는 핀잔과 함께 고문관으로 낙인찍혀 바보 왕따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대학졸업후 입대한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선임병이 고참 행세하며 욕설을 하고 기합을 주는 인격모독을 겪으면서 문제의 병사는 자신이 대학에서 소크라테스,칸트,공자,맹자 등 성현들의 고차원적인 가르침을 배운게 고작 자신보다 못 배우고 나이도 어린 병사들에게 바보 왕따 취급을 받기 위해서였나 하는 깊은 인간적 회의를 가졌고 이렇게 군 생활할바에야 너희들 죽고 나 죽자 하는 인생 끝장 결심하에 참극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인 군 간부 100%완벽한 장병관리 한계 있어
요즈음에 비해 군기가 셋다는 소위 쌍팔년도 군 시절에 이처럼 대형 총기난사 무장 난동 사건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발생하는 총기난사 참사 사건이 빈발한다고는 말하기 어렵다.민주화 바람이 군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시쳇말로 기합과 구타,체벌이 횡행하는 까라면 까 식의 강압과 계급이 깡패라는 식의 군대문화가 인권 중시,합리적인 리더십,가족적 병영생활로 바뀌면서 사건,사고가 많이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적 인권중시,핵가족화에 따른 장병 무사 전역 중요성 증대,전투력 저해 비전투 손실방지 차원을 고려 말단 소대장부터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사건,사고 방지를 위한 장병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지휘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성장,생활환경이 다르고 성격,개성이 천차만별인 장병 더욱이 부모도 포기한 장병의 경우 신이 아닌 인간인 지휘자,지휘관이 100% 완벽하게 사건,사고를 막을 수 있을만큼 성공적으로 장병을 관리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번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임모병장의 경우가 잘 말해주고 있다. 임모병장의 경우 지난해 1월 이 부대로 전입한 이후인 2013년 4월 인성검사를 통해 세가지 관심사병(특별관심 대상자 'A급', 중점 관리대상자 'B급', 기본관리대상 'C급')가운데 자살 가능성이 높은 특별관심 대상자인 'A급'으로 분류되어 지휘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한다.
특히 A급 관심병사는 GOP 근무가 불가능하지만 B, C급은 근무할 수 있는 관계로 A급 관심 사병으로 지정돼 근무 부적격으로 분류됐지만 7개월후인 11월 2차 인성검사에서 B급 판정을 받아 12월에 GOP 근무에 투입 되었고 올 3월 실시된 인성검사에서도 임 병장은 별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말년 병장의 극단적인 총기난사 원인은 누적된 자존감의 폭발
이처럼 신상관리에 별 문제가 없고 전역을 88일 앞둔 고참 병장인 임 병장이 총기난사,무장 탈영 사건을 일으켰다는건 상식의 범주를 뛰어 넘는 특수한 경우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전역을 앞두고 원치 않은 돌발 사고가 발생하거나 긴장이 풀려 느슨해지다 보면 실수로 숨지거나 병원 신세를 지는 '말년 징크스'로 군생활을 불행하게 마무리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 떨어지는 낙엽에도 맞아 죽을 수 있다며 대부분 몸조심을 하고 매사 몸을 사리는데 임모병장은 이와 다른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동료병사 그것도 군 생활 대부분인 일년반 동안이나 같이 생활해 온 동료 전우들을 향해 수류탄을 까 던지고 총구를 들이 댄 극히 비상식적인 임 병장의 행동을 그냥 정신병적인 돌발 행동으로 규정하기에는 섣부르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물론 적이 아닌 동료 전우에게 총격을 가한 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임병장의 행위가 정상적인 정신 상태하에서 저질러 졌다고 보는것도 적절하지 않다.
대학 행정학과 재학중 입대한 것으로 알려진 임병장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고 한다. 고교 시절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2학년때 자퇴하여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 자격을 획득할 정도로 친구 관계가 넓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나홀로 인터넷문화에 익숙한 세대이면서 골방형 소심한 성격을 가졌다면 통제된 공간안에서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합숙형 군대 생활패턴에 적응하기 힘들 개연성이 없지 않다.
사실 임병장 소속 부대원들은 임병장이 평소 불안해 하고 부대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군측이 임 병장의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1차 면접 조사에서도 "임 병장이 자주 열외됐다" "단체생활을 못하고 소수하고만 어울렸다" "선임병한테 왕따를 당했고 후임병한테 인정 못 받았다" 등의 증언이 나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임병장은 부대장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도로 상태가 좋아져 A급에서 B급 관심사병으로 재 분류되면서 GOP근무조에 편성되었고 이상없이 초병임무를 수행해 온 것으로 알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