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아주 깊은 숲 속에 오래된 성이 하나 있었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 이 성에 사람들은 들어가고 싶어했다. 성문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그러나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소리도 쳐보고, 안으로 무언가를 던져 보기도 했지만 성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누구는 성안에 괴물이 살고 있다고 했고, 다른 누구는 성안에 전염병이 창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깊고 깊은 숲 속에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오래된 성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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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지방선거가 끝난 지 2주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6•4 지방선거는 진보교육감의 대약진이 돋보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치적 의미를 별로 찾을 수 없는 선거였다. 지역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의 의미가 무색하게 정책과 비전은 뒷전으로 밀렸고, 이미지와 네거티브가 이를 대신했다. 특히 한국정치의 오래된 난제인 지역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쳤다. 삼국시대를 연상케하는 지역주의 구도가 무려 천 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는 불가사의에 가깝다. 남북분단이 현대사의 비극이라면 지역주의는 우리역사의 총체적 비극이다.
1987년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이 잠자고 있던 지역주의를 폭발시킨 후, 이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우며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 일회적 이벤트성으로 끝나거나 정치공학적 차원에서 정치전략의 일환으로 이용되었을 뿐,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를 버리고 부산을 택한 '바보' 노무현의 도전이 그나마 우리가 기억하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한 사례로 가끔씩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승리가 지상목표인 선거에서 '바보'는 돌연변이니거나 별종일 뿐 절대로 미덕이 될 수 없다. 계란으로 아무리 바위를 쳐본들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세상이치가 아니던가. '바보'는 그저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보'들의 무모한 도전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필자는 오늘 지역주의라는 괴물에 맞서 기꺼이 '바보'가 되어 대구시장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신 김부겸 전 의원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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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전 의원의 대구 도전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그는 2012년 총선에서 당선이 확실했던 자신의 지역구(경기 군포, 3선)를 버리고 대구 수성갑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40.42%를 획득,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52.77%)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에게 두 번의 시련을 안겨준 대구는 경북과 함께 야권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도시다. 죽은 독재자의 그림자가 여전히 지배하는 땅이며, 깃발만 꽂으면 견공도 당선되는 지역이라는 따가운 시선이 있을만큼 다른 어느 곳보다 지역색이 뚜렷한 곳이기도 하다.
"지역주의는 한국사회에서 꼭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나마 정치권에 있는 내가, 대구사람인 내가 마지막으로 몸을 바쳐보겠다는 거다. 나마저 이런 도전을 안하면 지역주의 문제는 아무도 깨지 못하는 현실이 된다"
그는 대구로 나아가며 장엄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대구는 주지한 바와 같이 외지인에게는 절대로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완고한 도시다. 외지인이 접근해서는 안되는 성역과도 같은 곳이며 금기의 땅이다. 따라서 그의 투지와 열정은 매우 신선하고 놀랍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다. 이와 반대로 선거는 결과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철저히 계산적이며 현실적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인 것처럼 선거의 패자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의 도전이 무모해 보이는 이유다.
사실 지난 두번에 걸친 선거승패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이는 김부겸 전 의원이 더 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난 총선에서 획득한 40.42%, 이번 지방선거에서의 40.33%가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구에서 정치인생의 끝을 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도대체 이 무모함과 끝모를 오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역시 그에게도 '바보'의 DNA가 흐르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정치인으로서의 책임의식과 소명의식만으로 이 무모함이 설명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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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역주의에 대한 그의 도전이 성공할 가능성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더 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직하고 뚝심있는 정치인의 무모한 도전을 지켜보는 일은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두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함에 대한 편견을 깨야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계란으로 바위가 깨질리가 없다. 아무리 부딪혀본들 깨지는 것은 계란 자신일 뿐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위에 남아있는 계란의 흔적과 파편들이다. 무쇠처럼 단단한 바위를 깨뜨리는 것은 계란이 아니라 그 뒤에 망치와 정을 들고오는 절대다수의 시민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부겸 전 의원에게는 계란으로서의 역할과 소임이 있고 결국 지역주의란 괴물의 심장에 칼을 꽂을 주체는 다수의 지역 시민이 될 것이다.
두번째는 지역주의를 깨뜨리기 위해 스스로 '바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김부겸 전 의원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험한 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항시 외로운 법이다. 역사적으로도 선구자와 선각자들은 예외없이 시련과 고난 역경의 풀 숲을 헤치고 나가야만 했다. 필자는 김부겸 전 의원처럼 책임의식과 소명의식이 뚜렷한 정치인들은 그에 합당한 정치적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바보' 노무현, '바보' 김부겸의 뒤를 잇는 또 다른 '바보'들의 행진이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김부겸이라는 이름 석자를 기억하고, 그의 무모한 도전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고 있는 이 사내의 무모한 도전이 기적처럼 현실에서 결실을 맺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가, 그저 생각만 해도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