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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가 가져 온 폐해에 대해서는 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양극화가 우리나라, 그리고 제가 사는 미국 뿐 아니라 거의 세계 어디에서나 심해졌고, 특정 국가들이 자신의 경제가 아니라 자신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나라의 경제 시스템 자체에 예속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게 되어 버렸습니다.
일례로, 미국은 에콰도르에서 자라는 바나나를 대부분 수입합니다. 미국에 있는 저는 덕분에 바나나를 굉장히 싸게 먹습니다. 한 번치에 1달러 조금 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바나나는 너무나 흔한 먹거리지만, 정작 바나나가 그 나라에서 그렇게 싸게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국제적 수탈이 너무나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의 그림자는 이런 모습입니다.
개인적인 불평등의 세계화. 그리고 극단적인 양극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최악의 경제 시스템이 바로 이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윤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집단을 위해 디자인되어 있는 이 시스템은 자연히 못 사는 사람들의 등골을 빼 먹는 기형적인 체제로 되어 있고, 나아가 잘 사는 국가가 못 사는 국가를 착취하는 국제적 양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죠.
이 체제는 필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을 불러옵니다. 기업, 즉 대자본의 이윤 축적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탈은 대규모의 사회적 변혁을 수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몇해전 일어나 중동의 정세를 보다 복잡하게 바꿔 버린 자스민 혁명,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월드컵 개최를 반대하는 브라질 민중의 시위 같은 것은 결국 그 심각해진 빈부 격차와 여기서 발생하는 불평등에 분노한 민중들이 일어났던 겁니다. 그리고 그 민중의 봉기들은 그 원인이 내적인 요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발원지는 결국 신자유주의 체제가 거대 다국적기업의 지배 권력 강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에 기인합니다.
이런 면에서 바라보자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어 발생했던 양차대전이나 식민지 경영은 그 포맷만 진화했을 뿐 여전히 같은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권력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이젠 거대 자본으로 바뀌었다는 차이점만 존재할 뿐. 오히려 세계인들에게 꾸준히 위협적 존재가 되어 온 냉전 구도와 거기서 파생됐던 핵전쟁의 공포는 냉전을 이끌었던 양대 체제의 군비 경쟁은 물론 체제 경쟁까지도 만들어 내어 각종 복지 제도와 시민의 삶의 개선을 위한 장치들을 낳아 오히려 아이러니컬하게도 '없는 사람이 가장 살기 좋았던 때'를 잠깐이나마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요즘 회자되는 피케티의 자본론에 따르면, 이 시기는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례적이었던 때로 이야기되기도 하지요.
서두에 이 이야길 꺼내는 것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회재정부 장관 후보의 경제적 소신을 듣고 나서 참 적지 않은 반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LTV와 DTI 완화가 실물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것이 결국 어떤 해악으로 나타나는지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잠깐 반짝 경기를 살리자고 규제를 풀자 하는 것은 결국은 양극화-사회불안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닦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까요. 이런 정책은 결국 가진 자에게만 유리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진 자'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데 그 심각성이 더욱 큽니다.
내가 연간 5천만원을 버는데, 그중 3천만원을 이자 원금 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이미 여러 번 아이티 버블을 통한 거품경제 호황과 몰락을 통해 경제 기반이 취약해진 미국은 담보 기준과 대출 기준을 완화해 이 버블을 부동산으로 유도했다가 이른바 서브프라임 사태로 거대한 경제대란의 쓰나미를 자초합니다. 그 파도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경기 전체를 흔들 정도의 것이었지요. 유수의 은행들의 도산이 속출하고, 어떻게든 원금을 회수하려는 소규모 은행, 특히 커뮤니티 중심 은행들이 제일 먼저 나자빠집니다. 그 은행들을 살리겠다고 인수했던 더 큰 규모의 은행들의 차압과정은 무자비했습니다.
부동산을 건드린 것은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집은 사면 돈이 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규제는 완화됐고, 은행은 쉽게 돈을 빌려줬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꿈이 깨졌을 때, 사람들은 빚을 갚을 수 없는 현실을 너무나 처절하게 실감해야 했고, 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쓰러져가야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망해나간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한 예를 들어드릴까요. 오래 전부터 제가 알고 있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경기가 한참 좋던 시절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동산 불패론'을 믿고 있던 시절이라 사방에서 건축 붐이 일어 콘도미니엄(매매 가능한 아파트, 우리나라의 일반 아파트 개념)을 사방에 새로 짓고, 또 기존에 있던 아파트(임대만을 하는)들을 다시 콘도미니엄으로 개축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새로운 주택 단지들도 여기저기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자 당연히 건설업계는 노동력이 부족했고, 일당을 주고 고용하는 멕시칸 등 라티노계 노동자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교적 적은 임금으로도 불평 없이 일했습니다.
이들이 건축공사 현장마다 넘치게 되자, 그 주위의 비즈니스들도 활기를 띠었습니다. 이들은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보다는 델리라고 불리우는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파는 가게들에서 간단한 먹거리들을 사다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로서리(작은 식료품점, 우리나라의 수퍼마켓 개념)와 델리를 겸하는 가게들은 이때 정말 호황들을 누렸습니다. 또, 모텔 비즈니스도 이때 함께 동반호황을 누렸습니다. 이유인즉, 주거지가 일정하지 않고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라티노계들 중에서는 서류미비 이민자(흔히들 불법체류자라고 부르는)들이 많았고, 이들은 일터 근처에서 모텔을 잡고 일이 끝날 때까지 장기투숙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임금을 받게 되면 그 돈을 멕시코 등으로 송금하고- 그래서 보통 작은 식료품점에는 국제전화 카드들을 많이 팔았고, 송금 비즈니스를 함께 운영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 남은 돈으로 생활을 했는데, 이들은 낙천적이고 돈도 기분파 스타일로 쓰는 경우가 많아서 색다르고 예쁜 물건들을 보면 그냥 가격만 괜찮다 싶으면 샀고, 일 끝나고 나면 같은 라티노 동료들과 함께 모여 술판을 벌이곤 했습니다. 아마 그때가 사회 전반이 뭔가 흥청망청한 분위기로 넘쳐나던 시절이다 싶습니다.
공사가 한참이던 어느 큰 주택단지, 그리고 상업용 빌딩 옆에서 델리와 그로서리를 함께 경영하던 중년 부부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과도 어느정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그때는 저희 부모님께서도 비슷한 업종에서 일을 하시던 때라 그 집에서 조언을 꽤 받았습니다. 부모님은 건강상 이유로 은퇴를 하셨지만, 그 중년 부부는 우리가 가게를 판 뒤로도 계속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늘 장사 잘 된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마침내 '올 것'이 왔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진 것입니다.
이 부부는 한참 호황일 때 모아둔 돈으로, 부동산 불패론을 믿고서 시애틀의 고급 콘도미니엄 몇 채에 투자를 해 두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뚝뚝 떨어지는 부동산 가치는 그 부부에게 가정불화와 걱정거리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은 결국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다. 이유를 들어본즉, 다운타운에 투자했던 최고급 콘도미니엄 중 두 채는 애초 구입가격이 채당 80만달러가 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물건들의 가격이 말 그대로 반토막 나버린 것입니다. 앉아서 1백만달러 가까운 돈을 까먹고 말았으니, 그 충격이 오죽 컸겠습니까.
그런데 이 부부의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서브프라임 사태의 여파로 인해 가격이 떨어진 부동산을 팔지도 못했고, 매달 부담해야 하는 은행 대출금 이자가 부담스러워 계속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가게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던 공사들이 모두 중단되어 라티노 손님들이 말 그대로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들 임금 노동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