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희 과장님 잘 계지지요?
오늘 아침 바삐 출근 준비를 하다가 문뜩 과장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한번도 만나뵌 적이 없는 분의 모습이 떠오르는 아침이라니요. 보통 정신없이 아침 출근 준비를 하는 터라 이런 일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집을 나서 일터로 차를 몰고가는 삽십여분의 시간 동안 내내 과장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우연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저의 생각을 과장님에게로 끌고 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잡목숲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생각해 봅니다. 왜지?, 왜 이런거지?.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즈음 사람이 그리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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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요? 제가 생각해봐도 생뚱맞습니다. 사람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람이 그립다니요. 마치 모래사장 앞에서 모래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네요. 하지만 주변에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해도 참다운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벌써 일년이 다 되어 가네요. 뜨거웠던 지난해 여름 국정원의 불법선거개입의혹을 밝히기 위한 국회의 국정조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장님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용기와 정의감에 감동하고 이에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더 놀란 것은 과장님의 한결같은 원칙과 소신 그리고 변치않은 태도였습니다. 문제의 오피스텔 앞을 지키고 있을 때도, 정치개입은 맞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는 경찰의 황당한 수사결과발표에 경찰수뇌부의 외압이 있었음을 폭로했을 때도,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참석한 동료경찰들 모두가 권력에 굴복하며 관련사실을 부인했을 때도, 전보조치와 승진누락은 물론 이후 정치권과 경찰내부의 압력이 있었을 때도 과장님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지 그저 놀랍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사실 과장님이 보여준 불의에 맞서는 패기와 용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믿음,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정의에 대한 소신이 보석처럼 빛날 수 있었던 건 바로 희소성 때문입니다. 정치권력에 복종하고 사람에 충성하는 자들, 보편적 상식과 원칙, 개인의 양심과 사회정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차고 넘치기 때문에 과장님의 행동이 고귀하게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런면에서 국정원 사건의 주범들과 이를 은폐•조작하고 외압을 행사한 경찰 수뇌부, 국정조사를 누더기로 만든 정치인들, 국정조사의 증인으로 참석해 영혼없는 멘트를 기계처럼 되뇌이던 과장님의 동료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덮기 위해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검찰과 사법부 등은 과장님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고 있는 조연들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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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창장에 대한 항소심이 있었습니다. 사법부는 역시 1심과 같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아마 최종심에서도 사법부의 판단은 동일할 겁니다. 이제는 정치적 사안에 사법부가 정치적 판결을 내리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하나의 현상으로 굳어진 느낌입니다.
씁쓸하더군요. 모래를 씹으면 이런 느낌이 날까요. 모르겠습니다. 끝모를 회의와 함께 깊은 상실감과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정말 난감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과장님 생각이 났어요. 많이 힘드시겠구나, 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마도 제가 느끼는 감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와 깊이의 상념에 빠지셨을 겁니다. 당사자시니까 더더욱 그러셨을거예요. 무엇보다도 무력감에 대한 걱정이 가장 컸습니다. 과장님이 믿어 왔고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가치들을 정치권력과 이에 동조한 무리들이 마음껏 조롱한 것이니까요. 무력감과 상실감은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중에서는 신념도 있지요. 제가 과장님의 원칙과 소신같은 변치않는 신념에 탄복했다고 했지만, 사실 무력감이야말로 변치않을 것만 같을 신념조차 단번에 무너뜨리는 몹쓸 녀석이거든요. 그래서 걱정했던 겁니다, 혹시 그러실까봐. 그런데 과장님께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이 드네요. 지금껏 과장님이 보여주셨던 모습들이 제게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제 걱정이 한낯 기우에 불과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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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희 과장님 참 고맙습니다. 불의의 시대, 진실이 천대받고 정의가 구박받는 시대, 원칙과 상식이 무너진 시대, 개인의 양심이 권력 앞에 굴복하는 시대, 반칙과 편법이 득세하는 시대에, 이같은 사회의 부조리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과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과장님이 몸소 보여주셨다고 봅니다. 물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요. 그러나 과장님의 올곧은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해지고 보다 정의로워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오늘 문뜩 권은희 과장님 생각이 나서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제가 오히려 더 단단해 지는 느낌입니다. 권은희 과장님, 지면을 통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과장님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항상 행복하세요.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