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과 딴지일보가 공동주최한 ‘야간분만’이라는 기획취지의 이른바 ‘국론출산토론회’를 보게 되었다. 야당들의 경기도지사 예비후보들이 모여서 하는 토론회였다. 보고 나니까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민주당 김진표도, 국민참여당 유시민도, 진보신당 심상정도, 그리고 화면으로 처음 대면해본 민주노동당 안동섭도 소속 정당이나 정파가 매일 하는 얘기를 또다시 지루하게 반복했을 뿐이다.
토론에서는 대개 두 가지가 남는다. 메시지와 이미지. 둘이 모두 남는 경우가 있고, 둘 가운데 하나만 남는 경우도 있다. 내가 워낙 토론회란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토론회 분위기마저 무겁고 어두울 수밖에 없는 까닭에 한 10분 대충 보다가 그만둘 작정이었다. 심상정 후보가 가슴에 달은 ‘謹弔’라는 리본처럼 나라 전체가 슬픔에 잠긴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의 토론회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다. 내용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이건 정말 막장 중의 막장을 시범했던 탓이다. 이 행사를 통해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토론회 무용론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아니, 무용론 정도가 아니라 토론회란 토론회는 무조건 깡그리 금지하고픈 무지막지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구리. ‘뭇매’를 이르는 말이다. 보통은 비속어처럼 쓰이지만 엄연한 표준어다. 국론출산토론회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남자 셋이서 여자 한 명 신나게 다구리 놓은 자리였다. 여자 한 명을 잔인하게 린치해댄 세 명의 야당 후보자들, 또는 세 명의 남자들은 마치 적의 대군을 헤집고서 적장의 목을 따온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해하는 것이었다.
어리석은 세 남자들은 후보 단일화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심상정을 통쾌하게 KO시켰다고 참모들과 쾌재를 불렀으리라. 왜냐? 논리상으로는 자기네가 그녀를 압도했다고 믿을 터이므로.
그러나 세 남자는 착각한 점이 있다. 논리는 짧고 인상은 길다는 것. 그들이 심상정을 윽박지르면서 개진한 번드르르한 논리는 금세 잊히고 만다. 반면, 남자 셋이서 여자 하나 치사하게 다구리 놓았다는 이미지는 두고두고 남는다. 그래서 이런 토론회를 왜 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구리당한 심상정이 상처를 입음은 물론이고, 안동섭과 유시민과 김진표에게는 여자 한 명 가운데 불러다 앉혀놓고 다구리 놓은 치사한 놈들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릴 토론회였던 이유에서다.
대한민국에서 출세깨나 했다는 사내들 세 명이 여자 한 명 다구리 놓은 것과 엇비슷한 시기에 수십 명의 젊은 청년들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연약할 이들을 보호하려다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내놨던 것이다. 꽃다운 나이의 해군장병들이 목숨과 바꿔가며 지키고 싶었던 조국은 과연 남자 셋이서 여자 한 명 다구리 놓는 비열한 사회의 나라였을까?
토론회를 보는 내내 나도 모르게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아마 심상정이 살아오면서 국론출산토론회에서처럼 수치스럽고 모멸적 경험은 하지 못했을 듯싶다. 봉변을 당해도 엄청나게 참혹한 봉변을 당한 셈이다. 그가 좀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필시 문귀동 사건이 연상되었으리라.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는 출세하고 성공했다는 인간들일수록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하다. 명색이 진보정당의 대표까지 지냈다는 여인조차 수만 명이 시청했을 토론회에서 저렇게 공공연하게 능욕을 당할 지경이니 강호순과 조두순과 김길태 같은 망종들이 날뛸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페미니스트들을 이따금씩 만날 때마다 한 대 때려주고픈 감정이 솟구치곤 한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여자 한 명 데려다놓고서 단체로 다구리 하는 만행에는 절대 찬성하지 않는다. 김진표 씨에게 묻는다. 유시민 씨에게 묻는다. 안동섭 씨에게 묻는다. 여자 한 명 힘 합쳐서 다구리 놓으니까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그게 바로 행동하는 양심이 할 일입니까? 깨어 있는 시민한테 어울리는 짓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