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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오니 만화책 한 질이 서가에 꽂혀 있었다. 거의 2시간 가까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어릴 때부터 낯익고 익숙한 만화였다. 원로 만화가 고우영 선생이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초한지』가 그것이다. 지금처럼 이른바 19금의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지 않았던 시절,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세간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여성가족부, 약칭 여성부가 출범하기 한참 전이었던 시대에 나온 콘텐츠인지라 고우영이 그려낸 만화들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는 태어나서 최초로 합법적(?)으로 접해본 성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에서 숨이 턱 하고 멎으면서 해당 장면을 두 번, 세 번 연거푸 되풀이해서 봤다.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퍼뜨린 것으로 만화에서 묘사된 동요에 초패왕 항우가 심리적 동요를 일으켜 고향인 팽성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대목이었다. 작중에 실린 노래 가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부귀 부귀 높은 부귀 고향 가서 웃고 살지. 고향으로 아니 가면 비단으로 밤길 걷기”
천혜의 요새로 불리는 함곡관을 일거에 깨뜨리고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해 천하를 자신의 수중에 거머쥔 항우는 이 모든 승리의 영광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일처럼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된 것이다. 한마디로 고향에 가서 뽐내지 못하면 출세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다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항우가 고향에서 자기자랑을 마음껏 못해서 초조하고 안달이 날 정도의 협량한 깜냥과 낮은 포부를 지닌 일개 필부에 불과한 사내였다면 그가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시황제의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역발산기개세의 위용과 성과를 세상에 보여주진 못했으리라.
항우가 범했던 치명적 오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진나라가 무너진 직후 혼란스럽게 소용돌이치는 당시의 정세에서 천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거나, 그 중심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항우가 고향인 강동땅으로 돌아가면서 중원 한가운데 남긴 권력의 진공지대는 유방이 이끄는 신흥 세력에 의해 순식간에 채워지고, 초패왕은 그 와중에 유방에게 패배해 홍콩 배우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로 각색되어 더 유명해진 ‘패왕별희’처럼 그와 우미인을 소재로 하는 비장미 넘치는 몇 개의 예술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는 영감의 원천만을 후세에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이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왜 장황하게 옛날 중국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내게 면박을 주실 분이 물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 나는 케케묵은 고사를 구차하게 동원하면서까지 내 주장을 뒷받침해야 할 만큼 너무나 절박한 심정이다. 왜냐면 현재의 야당 또는 야권으로 불리는 정파는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을 맞이하는 한국정치의 태풍의 눈이 어딘지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집단적 무지로 말미암아 야당 성향으로 분류되면서도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는 정치평론가들조차 “영남의 지역주의와 싸워 호남을 감동시켜…”로 서두를 떼곤 하는 2002년의 정치모델을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들이 현역에서 은퇴했거나, 혹은 선수생활의 막바지에 들어선 아직까지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타성에 젖어 여전히 관습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성공은 실패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일 게다. 2002년에 민주당은 정말 크게 성공했다. 영남 태생의 민주당 대선 후보가 호남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델이 그러한 성공을 낳은 기반이자 원동력이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이를 계기로 호남 유권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놀라운 결집력을 발휘한다는 전제 아래 영남에서 적당히 표만 뽑아오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안일한 정치공학이 야권에서는 오랫동안 신줏단지처럼 모셔져왔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영남 후보가 새누리당이 아닌 민주당에서 더 각광받는, 매우 엽기적인 사태가 지난 몇 년간 야권에서 벌어져왔다. 성공이 실패의 아버지도 모자라 할아버지가 될 때가지 낡은 성공법칙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다.
참여정부의 퇴장과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래로 보수 우위의 정치구도가 더욱더 고착화된 이유는 호남이 민주당을 버리거나, 새누리당이 영남에서 종전과 비교해 더 큰 정치적 지지를 확보한 데 있지 않다. 영호남에서의 몰표로 상징되는 지역주의는 비록 미미하나마 서서히 완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 원인은 야당이 중원인 수도권에서 점점 더 약세를 드러내는 것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여촌야도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야당은 서울시장 선거에서조차 반타작에 지나지 않는 저조한 승률을 보이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야당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야권 내에서 나름 기획력과 전략적 안목을 갖췄다는 인물들조차 중원을 텅 비운 채 고향인 초나라 팽성으로 돌아간 항우처럼 “영남의 지역주의와 싸워 호남을 감동시켜~”로 시작되는 외곽지향적 고정관념에서 좀처럼 탈피하지 못해온 탓이다. 힘은 항우장사도 아닌 사람들이 작전만 초패왕을 따라해 구사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호남에서는 충분한 결집이 이뤄졌고, 영남에서는 어느 때보다 민주당 후보가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에게 100만 표 차 이상으로 지고 말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패배는 수도권에서의 부진을 빼면 달리 패인을 해명할 방법이 없다.
관건은 수도권이고, 결론은 서울이다. 수도권 유권자들은 정치인에게 뜨거운 감동보다는 차가운 능력을 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들은 “한 국가를 책임감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총체적 역량”을 의미하는 수권능력을 핵심적 잣대로 삼아 정당을 고르고 후보자를 선택한다.
나는 신당은 철저히 수도권에서 승부하는 정당으로 발전해나가야만 한다고 믿는다. 이는 흔히 지방으로 불려온 지역의 존재와 의의를 무시하거나 폄하하자는 뜻이 아니다. 가면 갈수록 냉정해지고 매서워지는 유권자의 눈높이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력과 내공을 쌓는 데 주력하자는 취지의 제안이다.
대장정을 떠나 수천 킬로미터를 강행군한 끝에 모택동의 홍군이 도착한 곳은 저 멀리 고비사막이나 머나먼 북쪽의 시베리아 벌판이 아니었다. 기회만 닿으면 중원으로 삽시간에 밀고 들어올 수 있는 섬서성 연안이었다. 민주당은 외곽에서의 측면대결을 선호하다가 총선과 대선에서 연패했다. 필자는 새롭게 출범한 새정치민주연합은 중원에서의 대마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면대결의 자세로 수도권 선거에 당의 명운을 걸기 바란다. 바야흐로 이제는 수도권에서 경쟁력을 증명하지 못하는 정당은 결코 집권할 수 없는 시대다.
* 月刊글돌(www.letterstone.net)에 기고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