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에 불법 개입했던 국정원은 정부 여당이 주축이 된
'국정원 살리기' 프로젝트 속에 기사회생 할 수 있었다. 국정원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의 국정조사는 새누리당의 온갖 방해공작 속에 누더기로 끝이 났고, 이후 국정원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했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비롯하여 일선에서 수사팀을 꾸렸던 윤석열 수사팀장과 박형철 수사부팀장 등은 정권의 눈에 거슬려 찍혀져 나갔다.
반면 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던 관련자들은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 파면, 징계, 좌천되는 이상한 신상필벌이 일어났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사건은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 비정상적인 흐름의 중심에 남재준 국정원장과 박근혜 대통령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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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준 국정원장은 지난해 국정원의 대선개입사건으로 박근혜 정부가 사면초가에 빠지자 느닷없이 남북정상회담 대회록을 공개했다. 그가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정쟁에 뛰어든 이유를 필자는 곤경에 처한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서였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한 애정은 아주 각별하다. 국정원 개혁과 남재준 국정원장 경질 여론이 비등해졌을 때 박 대통령이 꺼내든 방안은 놀랍게도
'셀프 개혁'이었다.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 집단에게 스스로 알아서 개혁안을 마련하라는 이 파격적인 조치는 박 대통령과 남재준 국정원장 사이의 신뢰가 얼마나 탄탄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둘 사이의 신뢰는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하며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때도 박 대통령은 묵언수행을 고집했다. 국정원이 공문서 위조를 했다는 증거가 드러났을 때에도
"조사 후 책임을 물을 일이 있으면 묻겠다"며 여전히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는 검찰의 고전적인 꼬리짜르기 수사결과 발표 이후 어제(15일) 있었던 박 대통령의 사과같지 않은 사과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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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어이없게도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셀프 개혁'을 주문했다. 국정원의 간첩 증거조작이 명백히 밝혀졌음에도
"조사 후 책임을 물을 일이 있으면 묻겠다"던 말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렸다. 이 정도면 박 대통령의 남재준 국정원장에 대한 신뢰는 가히
'금강불괴' 급이다. 박 대통령은 어제 국무회의를 통해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됐다.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에 허점이 들어나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돼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또 다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국정원의 범죄행위를 다시 한번 용인해 주었다. 국정원을 향한 이 끝모를 자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진심으로 송구스러움을 느꼈다면 남재준 국정원장을 이처럼 감싸고 돌 수는 없는 일이다. 국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이미 바닥인데
'다시 한번' 면죄부를 준 것 역시 박 대통령의 인식이 국민정서와는 수십억 광년은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 대통령의 변치않는 신뢰 때문인지는 몰라도 국정원 몰락의 일등공신인 남재준 국정원장의 행동 역시 여전히 뻣뻣하기만 하다. 국민 앞에 석고대죄를 해도 모자랄판에 그는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준비된 원고만
'달랑' 3분 동안 읽고 퇴장해 버렸다. 이런 후안무치한 행동 앞에
'참담', '책임통감', '뼈를 깎는 개혁' 등의 수사는 빛좋은 개살구처럼 느껴진다. 박 대통령과 남재준 국정원장은
'송구함', '책임', '참담', '통감' 등의 단어를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 단어들은 저 따위 영혼없는 기만행위에 사용되는 저급한 단어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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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의 부정선거의혹 이후로 시민들의 목소리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졌다. 이들의 요구를 요약해 보면 대체로 강경파들은 박 대통령의 퇴진과 재선거, 관련자 처벌, 남재준 국정원장의 해임과 국정원 개혁을 요구했고, 온건파들은 박 대통령의 사과와 관련자 처벌, 남재준 국정원장의 해임 및 국정원 개혁을 요구했다. 강•온의 차이가 있지만 남재준 국정원장의 해임과 국정원 개혁이 시민들의 한결같은 요구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재준 국정원장이 퇴진하고 국정원이 개혁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국정원 개혁이 아무리 시대적 과제이며 당위일지라도, 국정원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국기문란사건에 누가, 어디까지 개입되어 있는지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전혀 없는 가운데 국정원 개혁에 촛점이 맞춰지는 현 상황을 필자는 납득하기 힘들다.
사건처리의 본말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퇴진과 국정원 개혁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이루어질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해도 지난 대선의 부정선거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퇴진과 국정원 개혁은 지난 대선의 진상규명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과정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이를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