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온 이 오래된 이야기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과 철학을 담고 있는 양서로 인식되고 있다. 필자 역시 이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 몇날 몇일을 헤어나오지 못한 기억이 아련하다. 삼국지는 한번 읽을 때와 두번 읽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른 책이다. 한 번 손을 대기 시작하면 좀체로 손을 땔 수 없는 땅콩처럼 한 번 책장에서 꺼내 읽기 시작히면 도무지 책을 덮기가 어려울만큼 재미있다.
아마도 삼국지를 읽었던 독자라면 대개 비슷한 감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삼국지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스펙타클한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그리고 이 드라마틱한 역사의 향연 속에 얽히고 설혀있는 인간들의 입체적인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것이 삼국지가 2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다.
삼국지에는 다양한 에피소드만큼이나 흥미롭고 유서깊은 고사들이 다수 등장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도원결의', '권토중래', '난공불락', '낭중취물', '삼고초려', '백미', '배수지진', '읍참마속', '비육지탄' 등의 고사들은 삼국지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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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오늘 뜬금없이 삼국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고사 하나를 소개하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고사가 비유하는 상황이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치적 입장과 너무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은 것은 이를 통해 그 세월의 무게만큼 켜켜이 쌓여있는 삶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포스팅을 음미하면 좋을 듯 하다.
'계륵'은 한중을 둘러싼 조조의 심경을 나타내는 고사이다.
'닭의 갈비'라는 뜻의 '계륵'은 촉과의 한중쟁탈전 와중에 계속 싸워야 할지 아니면 후퇴해야 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조조의 고심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이 고사는 유일하게 조조의 의중의 간파한 비운의 천재 '양수'의 죽음에 촛점이 맞춰져 있지만 사실 그 본질은 결국 한중이 조조에게 '계륵'같은 존재였다는 데에 있다. 취하자니 별 것 아니고, 군대를 물리자니 버리기엔 아까운 곳이 바로 한중이었던 셈이다.
전격적인 제3지대 창당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에게 6•4 지방선거에서의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은 바로 한중을 바라보는 조조의 심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문제와 관련해 영수회담을 제의하고 청와대를 전격 방문했던 안철수 대표가 "국민과 당원의 뜻을 묻겠다"며 다각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도 기실 그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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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야권의 문재인, 안철수 후보는 모두 중앙정치에 예속된 지방정치의 자립과 독립을 도모하고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을 내세웠다. (본 글에서는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의 옳고 그름을 논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공약이 지극히 '반정치적'이라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문제는
'습관적 공약 파기병'에 걸린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을 철회하겠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흔히 하는 말로
'차포 떼고' 장기를 치루어야만 한다. '차포 떼고' 장기를 두어서 그 게임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새정치민주연합에게 있다면 이 정당의 물밑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쯤은 그저 무시해도 된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하게 말한다면 '차포'를 하나씩 더 놓고 두어도 이기기 힘든 상황이다.
새 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새정치연합에게는 다소 억울할 지도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의 유권자는 낡은 정치의 구습에 치를 떨면서도 이를 단죄치 못하는 독특한 색깔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부정선거조차 용인하는 후덕한 아량과 관대함을 지닌 유권자에게 김한길 안철수 대표가 꺼내든 '기초선거 무공천 공약'은 무조차 썰 수 없는 무딘 칼과 같다. 그렇다면 이왕 칼을 꺼내들었으니
'무라도 썰어야 하느냐 아니면 과감하게 칼을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남는다. 김한길 안철수 대표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상황이 이렇다면 과연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을 끝까지 고집해야 할 당위가 있는 것인가를 고려해야만 한다. 당위는 반드시 해야만 하고 지켜야만 하는 것, 또는 있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지켜야 할 당위의 범주 속에 과연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이 들어가야 하는 지는 온전히 각자의 정치적 판단의 문제다. 알다시피 김한길 안철수 대표는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이 국민과의 약속이니만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책임정치가 실종된 대한민국 정치판에서는 보기드문 장면이다. 공약을 밥먹듯이 깨면서도 이를 당연지사로 여기는 후안무치한 자들과는 사뭇 다른 생경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당위의 문제가 남는다. 현장 정치의 현실을 뛰어넘기에는 그 당위가 초라하고 옹색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조조에게 한중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필자가 오늘 삼국지를 거론하며 '계륵'의 고사를 인용한 것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앞으로 취해야 할 태도를 말하기 위함이다. 김한길 안철수 대표가 지키고자 하는 원칙과 소신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더구나 국민과의 약속쯤은 언제든 당리당략에 따라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있는 집권여당의 3류 저질정치에 비한다면 비록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의 시비논란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전장에 임하는 장수의 제일 미덕은 언제나 승리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주지한 바와 같이 원칙과 소신만으로 선거를 치르기엔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의 당위가 소박하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패배가 뻔한 싸움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새정치민주연합은 그동안의 과정을 통해 충분히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을 이미 얻었다. 이만하면 된 것이다.
현 시점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기는 선거를 위해 당력을 집중하는 것 뿐이다. 창당 과정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최대한 추스리고,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이번 선거에 쏟아 부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따라서 한중을 바라보며 '계륵'이라 쓰고 과감히 발을 뺀 조조처럼 새정치민주연합이 지금 해야 할 첫번째 행동은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과의 결별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첫단추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