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최경환 원내대표가 결국 6•4 지방선거에서 기초의원 무공천 공약을 철회하기로 공식선언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로써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내세웠던 대선공약 중 하나인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공약은 '대선 공약집'에서 '대선 공약 파기집'으로 자리를 이동하게 되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면 공약도 안 했을 것", "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고, 한번 약속한 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켰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해야 약속을 지키겠다는 심산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속을 다 헤아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것 한가지는 분명하다. 필자는 이렇게 무책임한 대통령은 지금껏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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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공약은 박근혜 대통령이 본인의 입으로 대한민국 정치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를 바로잡겠다며 내세운 정치혁신 공약 중 하나였다. 그런데 대선 당시엔 잘못된 관행과 제도였던 필요악이 지방선거가 가까와지자 선거의 혼탁을 방지하고 지역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을 바꾸고 있다. 물론 정치환경과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공약은 수정할 수도 불가피하게 파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공약 수정'과 '공약 파기'에 대한 국민의 동의와 양해를 구하고 이해시키는 절차와 과정이 반드시 뒤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바로 이 절차와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문제는 또 있다. 바로 태도와 방식의 문제다.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내세웠던 대선 공약 중 하나가 다시 지켜지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야 어찌되었든 공약파기에 대한 책임은 참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무 장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약 설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따라서 공약파기에 대한 사과는 대리인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대통령 스스로 해야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하늘이 무너질 지언정 고개를 숙이는 법이 절대로 없다. 인수위 시절부터 시작된 역대 최악의 인사참사에도, 전대미문의 윤창중 대변인 성추행 사건에도,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간첩조작사건에도, 기초노인연금을 비롯한 수많은 대선공약의 축소와 파기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대리인을 내세워 '대독사과'를 하거나 비서관 회의를 통해 '간접사과'를 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이는 사과란 두 대상 간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대통령이 모르고 있거나, 뻔뻔하고 오만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가만, 그런데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 대통령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인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대선자금 차떼기로 존폐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헌금 파문이 일어났을 때, 지난 대선을 앞두고 과거사 논란으로 지지율이 급락할 때 등의 경우에는 사과를 했었다. 이를 보면 대통령이 사과의 의미와 방식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대독사과'와 '간접사과'를 선호하는 이유는 두번째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로버트 달(Robert A. Dahl)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선거와 선거 사이, 즉 평상시에도 선출된 지도자가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현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지도자라는 생각이 든다. 뿐만 아니라 책임정치를 구현하지 못한 도의적 책임까지 대독사과를 하게 함으로써 대한민국 정치의 저급•저렴화를 부추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항상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박근혜 대통령을 지칭함에 있어 이 수식어를 사용하는 일은 가급적 없기를 바란다. 빛나는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이 단어를 이처럼 무책임하고 뻔뻔한 정치인에게 훈장처럼 달아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랜 세월동안 인간의 내면에서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만들어지는 저 빛나는 단어에 대한 모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