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때가 되면 정치권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삼국지연의의 고사가 바로 ‘삼고초려’와 ‘출사표’다. 공교롭게도 둘 다 제갈량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고사이기도 하다. ‘삼고초려’란 유비가 천하를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영입하기위해 제갈량을 직접 세 번 찾아가 보았다는데서 유래된 고사이고, ‘출사표’는 유비가 죽은뒤 제갈량이 후주(後主) 유선에게 자신은 선제(先帝)의 뜻을 이어받아 중원을 정벌해야 한다는 그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해 올린 표(表)다. 그 절박함과 제갈량의 지성(至誠)과 진정성이 느껴져서인지 훗날 ‘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다’라는 말이 생겨나기까지 했던것이 ‘출사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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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확실히 지방선거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는것중 하나가 언론과 방송뉴스에서 그 무슨 ‘삼고초려’를 했다느니, ‘출사표’를 던진다느니 하는 말이 자주 들려오는 점이다. ‘삼고초려’는 보통 주요정당들이 인재영입에 난항을 겪거나, 또는 인물영입이 그만큼 어려웠음을 역설하기 위해 ‘삼고초려’도 모자라 ‘오고초려’,‘칠고초려’ 심지어 ‘십고초려’를 했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고, 대통령이나 단체장 혹은 국회의원등에 출마하고자 입장을 밝히는 정치인이 ‘출사표를 던진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출사표를 던진다’는 표현은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놓고도 언론이 종종 그와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헌데 이 둘중 여러 가지로 묘한 생각이 드는 것은 역시 ‘삼고초려’ 고사가 정치권에서 인용되는 부분이다. 적어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정치권에게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가 만났다’는 일화는 명함도 내밀 수준이 안 되는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삼고초려도 모자라 심지어 다섯 번,일곱 번, 열 번 찾아가서야 겨우 인물영입에 성공했다며 ‘오고초려’,‘칠고초려’ 심지어 이젠 ‘십고초려’까지 나오고 있는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판이기 때문이다.
정당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고 정치적 비전을 제시해줄만한 사상가를 찾든, 또는 선거에서 이길만한 묘책을 제시해줄 책략가를 찾든, 하다못해 선거에 직접 내보낼 장수(후보)를 찾든 당사자들 입장에서야 꽤 난감한 일이 될수 있을것이다. 공연히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아봤자, 지금껏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구축해놓은 명예와 이미지만 실추시키는것은 아닌지...
그런 입장에서 정치권의 영입 제안에 거듭 난색을 표하는 당사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갈 법 하고, 그럴수록 더더욱 인물영입의 난항에 속이 탈 정치권의 입장도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따라서 삼고초려도 모자라서 다섯 번,일곱번 심지어 열 번까지 찾아가서 겨우 인물영입에 성공했다는 이야기.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면서도, 그런대로 이해해보자면 이해해볼수도 있는 일이긴 하다.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삼고초려’의 가치와 감동이 툭하면 오고초려,칠고초려,십고초려를 남발하는 정치권으로 인해 너무 싸구려 취급 당하는 측면도 있긴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인물영입에 그만큼 난항을 겪었다는 정치권의 고충토로임을 생각해본다면 그런대로 이해할수도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지하에 있는 제갈량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정치판을 보며 ‘나도 그때 몇 번 더 튕겨볼걸...괜히 세 번 만에 성급히 유비 따라 나섰나 ???’ 새삼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삼고초려’ 그 이상의 지성(?)을 기울였다는 정치권의 고백은 그런대로 이해해 줄법도 하지만 ‘출사표’의 남발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것 같다. 이쯤에서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렸던 그 당시의 배경과 출사표의 내용을 한번쯤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조조는 이미 천자를 끼고 중원을 장악했고, 강동에는 오나라라는 ‘튼튼한 지역기반’을 갖춘 세력이 있는 상황에서 아직까지는 조조를 대적할만한 마땅한 실력자가 나오지 않은 형주와 익주 지역을 장악해 ‘제3세력’으로 천하를 도모해 보자는 ‘천하삼분’의 제갈량의 비책. - 사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론’과 비슷한 이야기를 노숙도 손권에게 건의했다는 기록이 ‘정사 삼국지’에 나오긴 하지만 이 부분은 여기선 생략하겠다.
하지만 관우가 형주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촉나라는 사실상 익주 하나만으로 버텨야하는 절대절명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선주(先主) 유비는 물론 관우,장비등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제갈량은 한계에 내몰린 촉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위를 다시금 정벌해야 한다는 ‘출사표’를 올리게 되는것이다. 그 시작이 다음과 같다.
‘ 선제께서는 창업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분열되고, 익주는 피폐해졌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폐하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궁궐안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실한 장수들은 궁궐밖에서 자신의 몸을 잊고 있습니다. (중략)
시중,시랑 곽유지,비의,동윤등은 모두 선량하고 착실하며, 뜻은 충실하고 성실합니다. 이 때문에 선제께서는 발탁하여 폐하께 남겨주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궁중의 일은 크고 작음에 상관하지 말고 모두 이 사람들과 상의한 연후에 시행하면 반드시 부족한 점을 보충받아 널리 유익함이 될 수 있습니다. (이하생략) ’
제갈량의 위나라 정벌은 ‘천하통일’이란 대의명분과 함께 한계에 내몰린 촉나라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자신은 떠나니 그동안 이런이런 사람들을 등용하여 내치를 잘 좀 해달라는 부탁을 제갈량은 후주 유선에게 하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북벌에 나서는것이 곧 선제의 은혜를 갚는 길이란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 신은 본래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남양(南陽)에서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혼란스런 세상에서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면서 제후에게 가서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천하다고 생각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몸을 굽히고 세 번이나 신의 오두막을 찾아오셔서 저에게 당대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부터 감격하여 선제께서 있는곳으로 달려갈것을 허락하였습니다...(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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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출사표는 절박할수밖에 없다. 한실의 부흥이란 대의명분을 내걸었건만 변방의 서촉으로 내몰린 촉나라의 상황. 중원을 차지하고 마침내 후한(後漢)으로부터 제위까지 찬탈한 위나라와, 드넓은 강동의 평야지대에서 충분히 수성(守成)을 할수있는 느긋한 오나라와의 경우와는 달리 촉은 위나라나 오나라나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정벌할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세력으로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갈량은 한 국가의 운명을 걸고 결국 대대적인 ‘중원정벌’에 나선것이다. 제갈량은 한마디로 ‘중원정벌’은 촉나라와 자신의 남은인생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것이다.
제갈량의 중원정벌은 그야말로 국운(國運)을 건 결단이고 전쟁이 될수밖에 없다. 이 정벌의 성공여부도 장담할수 없지만, 실패할 경우에 그 미래 역시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벌에만 나선다고 모든 것이 무난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내치(內治) 역시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 내치를 함에 있어 이런이런 사람을 등용해 쓰면 능히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어나갈수 있는 당부를 제갈량은 유선에게 하고있는 것이다.
제갈량의 국운을 건 북벌. 그리고 그에 앞서 올려진 출사표. 천 수백년전 사람과 오늘날 세상의 의식과 가치관은 많은것이 다를 수밖에 없음으로 ‘눈물까지 흘릴’ 지경까지는 되지 않지만, 그래도 그 당시 촉나라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출사표를 올리는 제갈량의 그 절박한 심정은 1,800년의 시간을 타임슬립하여 충분히 다가오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선거에 출마하면서 ‘출사표’ 운운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은 그 지나침이 정말 너무 과한것 같다. 까짓거 대통령쯤 출마하는 사람이 ‘내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것 같아 나섰다’는 식으로 기염을 토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해 볼수도 있다. 허나 기껏 무슨 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정도에 출마하면서 그게 무슨 한 나라의 국운(國運)을 걸만한 큰 일이라도 된다고 툭하면 출사표 운운하는가. ‘출사표(出師表)’의 사전적 정의는 ‘출병에 임하여 임금께 그 뜻을 올리는 글’이다. ‘스승 사(師)’자를 쓰고 있긴 하지만 사(師)에 ‘어른’이란 의미도 포함되니, ‘임금께 올리는 글’이란 의미로도 갈음할 수 있을것이다.
제갈량이 위나라 정벌에 앞서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렸던 당시의 그 절박함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선거출마 앞두고 함부로 ‘출사표’ 운운하는 모습은 좀 삼가 주었으면 좋겠다. 국제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을 두고 ‘출사표’ 운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론이야 선수들이 비장한 각오와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출사표’를 운운하는 것인지 몰라도, 솔직히 국제대회에 출전해서 입상하고 못하고 하는 여부가 국운을 결정지을만한 중대사안도 아니지 않는가.
고사(故事)의 인용은 때론 어제의 일을 빗대어 오늘날의 모습을 돌이켜보거나 반성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개개인의 어떤 결심이나 다짐을 더 굳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된 고사의 인용이나 불필요한 곳의 인용은 사람의 꼴만 더 이상하게 만들어 종종 세상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고사의 지나친 잦은 인용 역시 자칫하다간 본래 존재했던 그 ‘옛일’의 가치와 감동마저 퇴색시킬 우려가 있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인물영입에 대한 난항을 토로하며 무슨 ‘오고초려’를 했다느니 ‘십고초려’를 해서라도 모셔와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것, 당사자들의 고충을 생각한다면 그와같은 비유를 입에 담는것 이해 못할일은 아니다. ‘출사표’의 경우도 당사자가 그만큼 비장한 각오와 결의를 다지면서 나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야 그런대로 이해해줄수도 있다. 하지만 작금의 ‘삼고초려’나 ‘출사표’의 잦은 인용은 아무래도 그 본래의 존재했던 고사의 가치마저 떨어뜨리고 있는것은 아닌지 좀 생각해 봐야할 문제다. 정히 그와같은 고사를 입에 담는다면 그 고사와 관련된 옛 이들의 모습 수십분지 일이라도 닮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