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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에 기록된 번한국(기자조선)의 멸망과 남3한
BC 195년에 한나라의 연왕인 노관이 흉노로 달아 나자 그의 부하장수인 위만(衛滿)이 새(塞:산해관)→패수<浿水:진나라 당시의 패수였던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상하운장 <중전소동사하와 육율하(六율河) 사이>→왕검성<번한국의 수도인 광녕(廣寧)부근>으로 이동, 번한국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번한국(기자조선)의 마지막 단군 기준(箕準)이 그를 중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둔 상하운장에 봉하였다.
이들의 망명세력이 비대해짐에 위협을 느낀 번한국의 제후 최숭(崔崇)은 이 해 겨울에 낙랑(樂郞)으로부터 재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마조선(莫朝鮮)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현재의 평양(平壤)>에 이르러 최씨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 강단사학자들은 이 최씨 낙랑국의 유물가지고 전한군현의 낙랑유물이라고 날조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는 요서지역의 번한국 유민국가인 최씨 낙랑국의 이야기다. 북한지역 낙랑군은 최씨 낙랑국을 멸망시킨 고구려 대무신왕 초기에 후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최씨 낙랑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만든 군현이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전한군현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당시 이곳에는 진한국이 BC 238년에 망한 이후 마한국이 쇠약해져 그 일부는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고 잔류세력은 낙랑국에 흡수된 것 같다.
북부여 제 2세 모수리 원년(BC 194)에는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번조선(番朝鮮)을 멸망시키자, 그 왕 기준(箕準)은 바다로 달아 나고, 번한국의 상장(上將총사령관)인 탁(卓)이 그 무리들을 이끌고 마한의 목지국에 중마한(中馬韓)을 세웠으며 변한, 진한 역시 각각 그 무리로써 경상도지역에 봉함을 받고 도읍을 정하였는데 모두 마한의 명령을 들었으며 세세로 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동사년표(東史年表)에는 기준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파하고 금마군(익산/임금이 왔다는 어래봉이란 지명이 있다)에 도읍을 정한 후 죽자, 그 아들인 기탁(卓)이 BC 193년에 마한의 시조인 무강왕(武康王)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번한국이 위만에게 멸망당한 후 한반도 남한지역으로 이동, 마한을 세우고 만주와 요동에서 이동해 온 진한(진조선의 유민), 변한(번조선의 유민)을 다스린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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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중국의 중원지역으로 남하한 은나라는 단군족의 나라다. 그래서 은나라 왕족.귀족의 무덤의 머리방향은 모두 선조들의 고향인 백두산 지역을 향해 있다. 주나라 무왕에게 나라가 망하자, 번한국으로 망명을 하여 지금의 하남성 서화에서 죽은 은나라 왕족 기자는 단군한국의 수유족 출신이다. 그리고 그 수유족의 본거지가 하남성 지역이였다.
그러니까 은나라 왕족 기자는 자신의 조상의 땅으로 망명하여 살다가 죽어 묻힌 것이다. 무덤이 현재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기자가 단군족 사람이기 때문인지 무덤관리를 하지 못해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그런대도 은나라 왕족 기자가 북한 평양까지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세워 왕이 되었다고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국사교육을 하고 있으니 중국과 일본이 원하는 동북공정.식민사관의 역사교육이 아닐 수 없다. 당장에 중지해야 할 것이다.
[환단고기]북부여기 기록에는 수유족 사람들은 매우 부유하였다고 한다.
객좌(喀左)에서 발굴된 명문 기록을 보면 은나라가 한번 점치는 비용(卜費)이 5,6 붕(朋)일 때에 이 수유(기자)족은 200붕(朋)을 쾌척하였으니, 꽤나 잘 살았던 것이다.
소위 명도전(明刀錢)이라는 화폐가 제작되어 만주로부터 연(燕), 제(齊), 조(趙) 나라까지 유행하였고 이는 수유기자문화의 부와 무역의 상징이다. 명도전은 청동시대의 환수동도(環首銅刀)가 철기시대를 맞아 철도(鐵刀)로서 탈바꿈 한 것인데 실물 화폐로 이용되었다.
명도전의 명(明)자에 대하여 구구한 해석이 많은데 중국식으로는 당연히 국가 이름, 또는 군의 새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明)이라는 주원장의 명나라를 제외하고 고조선 당시 중국의 고대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주역(周易)]에서 지화명이(地火明夷) 괘에서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라고 했는데, 해가 땅속에 떨어지니 기자가 명이로 갔다는 말이다. 즉 은나라를 잃으니 기자가 떠나서 명이로 갔다는 것이다. <밝은 이족>을 의미하는 말로 밝한(불한.번한)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명이는 중국 고대 기록의 밝조선(發朝鮮번한국)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기자의 후손들은 명(明)이라는 번한 국호를 새긴 명도전을 사용하며 무역으로서 세력을 넓히면서 자기들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명도전은 한반도 구석까지도 나오는데 정치권보다 활발한 무역권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한 경제적 영향력이 후일 기자의 후손 기후가 번한국의 단군에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장사하는 <상인>이란 본래가 망한 은나라 백성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은나라 사람들은 주나라에게 나라가 망하자, 기자를 따라 번한국으로 이주한 후에 단군한국지역을 대상으로 무역을 활발히 했다는 반증이 바로 중국화폐로 날조되고 있는 명도전이라 할 것이다. 즉, 명도전은 중국화폐가 아니라 번한한국에 망명한 은나라 기자족이 중심이 되어 활발히 장사와 무역을 했던 고고학적 유물로 우리 단군한국의 화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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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로 망명한 기자조선(번한국)의 마지막 단군 기준의 후손들은 선우(鮮于)씨와 경기도 행주(幸州)의 기(奇)씨, 청주(淸州) 한(韓)씨 등 3파로 갈라 졌다. 고려 당시 전남 해남지역의 청주 한씨 귀족가문의 한씨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황후가 된다.
몽골제국(원)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다. 아버지는 기자오(子敖)이며, 기철(轍)의 누이이다. 1333년(충숙왕 복위 2)에 원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의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1335년 순제의 정후(正后)인 다라시니[笞納失里]의 일족이 축출되자 황후로 책봉될 기회를 맞았으나 바얀[伯顔]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獵]를 낳았다. 반대세력인 바얀 세력이 물러나게 되자 1340년 4월에 순제의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바로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는 등 전권을 행사했다.
기황후의 세력이 강력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도 오빠 기철을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강력한 세력을 행사했다. 1365년에는 전례를 깨고 정후가 되었으나,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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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DNA,후손에게 이어지는 피(기질.성품DNA)는 절대로 속일 수가 없다
단군왕검이 건국한 단군한국은 3신1체 사상에 따라 땅을 3개로 나누고 만주지역은 진한이라 칭하고 자신이 직접 다스리고, 한반도.열도는 마한이라 칭하고 웅백다에게 다스리게 하였고, 요서지역은 번한이라 칭하고 치우천왕 후손 치두남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황제헌원과의 10년간의 전쟁으로 번성한 치우족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던 황하 이남지역은 번한 단군의 관리감독하에 단군한국의 신하였던 유호의 아들인 유순에게 맡기니 하-은-주로 이어지는 중국사에서 유명한 순임금이다.
하.은(상).주는 단군한국의 제후국에 불과하였으며, 눈치를 봐야 했던 단군한국이 쇠락해 가자, 주나라가 동이족을 통합하여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중국사에서 황제라 칭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 때부터다. 그 전에는 동방 한국의 기세에 억울려 감히 천자.황제라 칭하지도 못했던 중국사다. 진시황도 출신이 만주족이라는 주장을 중국학자가 제기했다.
만주를 다스리는 진한의 임금은 천왕(대통령)이라 불리였으며, 마.번.진 3한의 인사.군사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부통령들이 되는 마.번한의 단군들은 단군천왕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200년경에 황권다툼이 벌어지게 되는데, 요서 고리족의 색불루와 하남 수유족의 황권다툼이 그것이다. 결국 고리족의 색불루가 승리하고 수유족 서우여는 번한의 단군으로 봉해진다. 번한에 봉해진 수유족의 서우여가 바로 기철집단의 선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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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몽골의 황후를 배출한 기철[奇轍]집안은 그 선조가 수유족 출신으로 21대 소태 단군천왕의 지원을 받으며, 22대 색불루 단군천왕과의 황권다툼에서 패하여 요서지역의 번한국 단군에 봉해진 서우여의 후손이다. 서우여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奇자라 불리웠고, 서우여가 번한국 단군에 봉해진 이후 번한국을 기자한국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은나라에서 망명한 기자하고 서우여는 모두 수유족이다. 은나라 기자는 수유족의 본거지 하남성에 서화에 묻혔고, 기자후손들이 북쪽으로 이주하여 수유족이 왕노릇하고 있던 번한국에 정착하여 연나라가 단군한국을 침략했을 때 군사를 일으켜 격퇴하고 번한국 단군에 즉위하여 마지막 기준까지 이어지게 된다. 기원전340년에 번한국에는 수한(水韓)이 단군으로 즉위하였다.
이듬해 연나라의 배도(倍道)가 안촌홀(安村忽)=(안덕향 추정)을 공략하고 뒤이어 험독(險瀆)=(번한국 왕검성)을 노략질하였다. 이 때 수유에 살던 은나라 망명객 기자의 후손 기후가 군사를 일으켜 번한국을 도왔다.
기원전323년 연나라의 공격을 받고 번한국의 수한 단군이 죽으니 기후가 단군한국(대부여)의 보을(普乙) 단군천왕으로부터 번한국의 단군으로 책봉을 받았다.
마침내 은나라망명객 기자의 36세손 기후가 41대 기자번한국(奇子番韓)의 왕위에 올라서 자기 앞의 35명의 기奇씨 선조를 모두 왕으로 추존한다.
은나라 망명객 기자후손인 기후씨의 유물이 많이 나온 백록산의 객좌현(喀左縣) 대성자(大城子)가 기후의 중심 지역으로 고려된다. 그로부터 난하, 백랑수 등을 영유하여서 하북성 노룡현(盧龍縣)의 고죽성(孤竹城)과 객좌현(喀左縣)의 백랑성(白浪城)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 때 그들이 사용한 청동기물의 수준이나 제사지낼 때 복비의 수준은 매우 높았고 당시는 구리 돈(朋)을 사용하였다.
기자조선이 한나라 유방의 핍박을 피해 망명해 온 한나라 장수 위만에게 속아 나라를 강탈당하자. 마지막 단군이였던 기준이 서해를 건너 전북 익산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한왕이라 칭하니 마한이다. 이후 북방에서 진한.번한의 유민들이 유입되자, 마한을 중심으로 남3한이 만들어 졌다. 이 때 남3한의 통치자를 진왕으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