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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는 신나는 일이 아내에게 고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워싱턴 주의 주류 관계법이 주민투표에 의해 바뀌면서, 그동안 이 지역에 진출하지 못했던 초대형 와인 전문 매장이 바로 우리 집 인근에 들어선 겁니다. '토털 와인'이라는 대형 매장으로, 워싱턴주에 두 군데가 생겼다고 하는데, 문제는 이 업체 말고도 '와인 앤 모어' 등의 다른 대형업체들도 워싱턴주의 변화된 주류 관계법으로 인해 진출이 가능해져 지금 시애틀 등 워싱턴주의 큰 도시에서는 느닷없이 와인가 인하 경쟁이 붙어 마시는 사람들에겐 신나는 일이 되었고, 저도 그 수혜자 중 하나가 됐습니다.
실제로 며칠 전 그 매장에 가 보니, 가격도 가격이거니와 일단 종류가 많아서 좋습니다. 와인을 좋아하고 아는 사람들에겐 천국인거죠. 특히 이곳의 다른 수퍼마켓들에서도 찾을 수 없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혹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프랑스 남부의 와인, 예를 들어 꼬르비에르나 코르시카, 그리고 보기 드문 그리스 와인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골고루 갖춰져 있어서 선택의 폭도 넓고, 무엇보다 와이너리에서 직접 왔다는 와인들이 꽤 되어 눈길을 끕니다. 게다가 이 매장엔 다양한 하드리커(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독주들)와 구하기 힘든 맥주 같은 것들도 잘 갖춰져 있어 주당들에겐 상당히 만족스런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아내에게는 고민이 되는 일인가 하면, 아내는 지금 대형 한인 마켓의 주류 유통 매니저를 맡고 있는데, 집에 우편물로 날아온 토털 와인의 카탈로그를 보고서 그 종류와 가격에 한숨을 푹푹 내쉴 수 밖에 없게 된 겁니다. 도저히 그쪽의 가격에 맞춰 경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2년 전 주민투표를 통해 변화된 워싱턴주의 주류관련법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 이 법안을 코스트코 측에서 직접 작성했다고 해서 논란이 됐었습니다. 대형 마켓들에게만 유리하고 작은 규모의 주류 판매점들에겐 절대로 불리한 법안이었는데도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통과된 것은 단지 이 법안으로 인해 자기들의 주류 구매가 편리해질 것이라는 주민들의 자기 편의 위주의 짧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워싱턴주에서는 하드리커를 주정부에서 전매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한국에 전매청이 있어서 담배를 독점해 팔았던 것과 같은 것이지요. 맥주나 와인 같은 도수가 낮은 발효주들은 일반 마켓에서도 유통이 가능했지만, 위스키, 보드카, 진, 테킬라, 소주 같은 증류주들은 주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리커 스토어'에서만 판매됐었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도 주정부 직원으로 대우받았지요.
그런데, 코스트코가 앞장서서 발의했던 법안은 이 전매 시스템을 없애고 일반 마켓에서도 독주를 팔 수 있도록 하되, 매장 규모가 1만 스퀘어피트가 되는 대형 매장에서만 판매 면허를 받을 수 있도록 제한했고, 주류 전매 시스템은 없애되 새로 '주류세'라는 것을 신설하여 일반 판매세와는 달리 주류세를 매기고, 더불어 이른바 '리터세'라는 것을 매겨 독주 판매량에 일정하게 매기는 세금까지 따로 부과토록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금지돼 있던 주류 대량구매시 가격 할인 제도를 허용함으로서 자본이 있는 큰 주류 마켓들만 이득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도 새 법의 함정이라면 함정이었습니다.
애초 이 법안이 발의됐을 때, 내용을 읽어봤었던 저는 주위 한인들에게나 친구들에게 "이건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마켓들과 주정부만 득을 보게 되고, 소비자들은 오히려 돈을 더 내게 되는 법안"이라고 지적을 했지만, 친구들은 "한국마켓에서 소주도 살 수 있게 된다는 걸 뭘." 이라며 기꺼이 이 법안에 찬성표들을 던지겠다고 했습니다. 뉴스 미디어들조차도 이런 점을 짚어주기보다는 전매가 폐지될 경우 주정부의 수익이 줄어든다는 점, 그리고 독주의 소비가 늘어나게 되며 이 때문에 음주운전이나 술로 인한 폐해가 늘어날 것이란 프레임에서만 움직였습니다.
이 법안이 통과되고 나서 주정부는 떼돈을 벌었습니다. 지금껏 그들이 직영해 왔던 전매 리커스토어들을 민간인들에게 매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안의 내용에 따라 이들 영세 업체들은 세금도 체납하는 상태까지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결국 폐업했습니다. 리커 스토어만 인수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거액을 투자했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비즈니스를 내던져 버리고 자기들이 인수했던 술을 마시며 울화를 달래야 하는 지경에 빠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원래 주정부 산하 리커스토어에서 공무원 자격으로 일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독주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투표를 통해 만들어 낸 결과에 경악했습니다. 독주의 가격은 오히려 전매를 할 때보다 늘었고, 그나마 코스트코 같은 초대형 마켓에서나 과거 그들이 지불했던 가격 정도로 주류를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가 되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도 때는 이미 늦어 버렸고 지금은 이를 돌이킬 수는 없게 됐습니다.
대자본의 농간은 이런 결과를 불러왔고, 당연히 다른 대자본 업체들이 경쟁에 뛰어들게 되자 이젠 수퍼마켓 체인들조차도 고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수퍼마켓 체인 중 하나인 세이프웨이나 유기농 먹거리 전문 판매점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트레이더 조 같은 경우도 주류판매 부문에선 당연히 고전할 수 밖에 없게 됐고, 특히 새로 토털 와인이 들어선 곳 바로 옆에 위치한 세이프웨이 마켓의 경우, 이들에 밀려 와인 섹션 자체를 아예 기존의 절반 이하로 줄여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내는 자기 직장에서 소주 코너나 더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나마도 만일 토털 와인 같은 곳에서 소주를 들여놓기로 작정한다면 과연 한인 마켓 같은 경우 주류 비즈니스가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도 하고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주류 비즈니스는 몇 개의 대형 매장 중심으로만 움직일 것이 분명합니다.
정치적 지향점을 제대로 선택하고 올바른 정책을 찾아내어 이것을 지지하는 것은 유권자로서의 중요한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하다못해 이렇게 술 한병을 좀 저렴하게 사겠다고 마음먹고 투표하는, 그 매우 작은 건도 관련 조항들을 끝까지 읽어볼 수 있는 꼼꼼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이제 한국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금부터 표심의 향배를 두고 온갖 의견들이 분분할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약속과 실천 계획을 보여주는 인물을 골라야 할 것입니다. 아, 변수가 하나 더 있네요.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그런 약속도 쉽게 뒤집어질 수 있고, "선거용으로 그럴 수 있잖아."라고 말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적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거나 덜 보인 사람들, 최소한 지금까지 여러분을 속여 왔던 사람들만큼은 선거에서 떨어뜨려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조금 더 꼼꼼하게 생각하고 투표할 준비를 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