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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조선 후기 학자이자 정치가 윤휴(1617~80)는 사약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0여년 전부터 이 비운의 정치가를 주목했던 역사평론가 이덕일씨(50·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는 당시 윤휴의 후손이 “아직도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무엇이 300여년 전 죽은 선비를 그토록 ‘금기’로 만들었는가, 이 소장이 <윤휴와 침묵의 제국>(다산초당)을 내놓은 이유다.
이 소장은 “현재 우리 사회는 ‘윤휴를 죽였던 당시 체제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문제의식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학계의 정설과 다르면 비난하고 추방하려고 하는 풍토가 있어요. 인문학은 늘 세상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제시해야 하는데, 사고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사형당한 윤휴는 과연 우리 시대는 ‘떳떳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통해 송시열에 덧칠된 신화를 벗겨 냈다. 이번에는 그의 반대편에 섰던 윤휴의 삶을 조명하면서 다시 한번 송시열 계열의 노론 중심 역사관을 비판한다. “아직도 국사교과서는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을 추진했다고 가르치지만,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은 진짜 북벌론자인 윤휴를 죽였습니다.” 그는 송시열이 주장한 북벌이 위로는 조선 국왕을 압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억압하면서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영원히 잇겠다는 전략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송시열은 효종의 군비 강화책을 사사건건 반대했으며, 북벌 총사령부격인 체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도리어 역모의 증거로 삼아 윤휴를 제거한 것 자체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성리학만을 만고의 진리로 삼아 유일사상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윤휴가 <중용>에 주석을 붙인 <중용신주>를 내놓으면서 주희와는 다르게 장·절을 구분하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일 정도였다. 성리학에는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을 절대시할 수 있는 사상이 담겨 있었기에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었다. 흔히 당파싸움으로만 알려진 예송논쟁 또한 사대부의 특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왕을 자신들과 같은 명 황제의 신하로서 동격에 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장은 “국상에 상복을 3년이 아니라 1년을 입으라는 주장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는데 가족장을 치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윤휴는 ‘송시열의 나라’에 맞서 “어찌 천하의 이치를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르겠는가? 주자가 다시 살아온다면 내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자사(중용의 저자)는 동의할 것”이라고 응답한다. 그는 중국에서 청나라에 반대해 일어난 ‘삼번의 난’을 호기로 여기고 이 때 북벌을 실시해야 한다며 58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섰다. 북벌에 앞서 윤휴는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와, 신분에 따른 호패의 차이를 없애는 지패제를 도입했다. 북벌이 추진되려면 나라와 백성들이 부유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양반 사대부의 계급적 특권이 폐지돼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모든 정책은 서인들에 의해 좌절된다.
이 소장은 “윤휴의 죽음 이후 조선은 다른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제국’이 돼 버렸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윤휴의 북벌론은 실현 가능했을까. 이 소장에게 이 질문은 본질이 아니다. 그는 정치와 학문의 ‘진정성’을 말한다. 북벌을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노론과, 실제 북벌 총책임자가 되길 원했던 윤휴의 삶은 어떻게 전승됐는가. “윤휴의 사상을 이은 강화 양명학자들이 일제에 맞서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면, 노론은 대거 친일파로 변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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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자주국방강화와 내부 정치개혁에 힘써야 한다.
자주주권국가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정치의식적 성찰을 위하여.....
자주주권노선의 개방개혁주의자 윤휴을 음해하여 정치적으로 매장한 노론은 300년간 권력을 장악하며 세도부패수탈로 망국 조선의 주범집단이 되었으며, 대거 친일파로 변절했다
정치꾼들이 입으로는 국민을 달고 살지만 정작 국민을 속이는 공갈사기꾼들에 불과하고, 입으로는 개혁을 달고 살지만 정작 국민을 수탈하고 부유층만 살찌우는 도적들에 불과하며, 입으로는 자주주권국익를 달고 살지만 정작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와 일본을 살찌우는 사대매국노들이며, 입으로는 대한민국을 달고 살지만 정작 국기와 애국가를 부정하며 김일성세습군사독재권력의 종노릇을 하는 반국가 이적집단일 일뿐이다.
중국에 정신과 정치를 의존했던 송시열의 소중화 노론당이 자주주권 개방개혁노선의 윤휴 남인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결국 조선은 세도독식부패수탈로 추락한 나머지 개방개혁을 하지 못한 결과로 백성들이 궁핍하고 피폐한 망국으로 치달아 결국 노론당이 국권을 일본에 상납하게 되었다.
청나라 침략 때 심양으로 끌려 간 효종의 꿈은 북벌이였다. 그러나, 윤휴가 주장했던 기회로 청나라의 내분사건인 삼번의 난을 호기로 이용하지 못하고 결국 효종은 송시열의 노론집단에 휘둘려 결단하지 못하고 말았다.
단군한국과 부여,그리고 고구려의 본토였던 만주는 본래 민족의 고토였다. 따라서 100년전 만주회복은 대한민국의 다물이기도 하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만주는 연해주와 같은 드넓은 농경지를 가지고 있는 수렵지역이다. 효종의 꿈이였던 북벌에 동조하고 군사적으로 실행하고자 강력히 요구했던 윤휴에게는 만주의 드넒은 농지확보를 통한 당시 궁핍한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는 애민의식이 들어 있다.
만약 효종이 자주주권노선의 개방개혁적인 윤휴세력에게 국가운영을 맡겼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양반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와, 신분에 따른 호패의 차이를 없애는 지패제 도입을 요구하는 등 자주주권과 개방개혁을 통하여 조선왕조를 부국강병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윤휴를 사문난적하여 음해하여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송시열의 소중화 노론집단의 조선왕조는 정조의 의문사 이후 노론집단은 세도부정부패수탈 정치로 동학농민혁명를 부추켰고,
동학농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를 불러 들었고, 청나라 개입은 일본의 개입을 부추겨 결국 청.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국권을 넘기는데 앞장섰다. 을사5적 중 이완용도 노론당의 수장이였다
대한민국 정치권과 국민에게 고함!
일제가 만든 경성제국대(서울대)을 최고의 국립대로 삼고 있으면서 친일청산을 외친다는 것은 코메디다. 서울대를 사립재단에 팔아 그 돈을 가지고 대동홍익주의라는 <대한정신>에 부합한 대한민국의 국립대를 설립해야 한다. 국립대학명은 <한국>으로 정하고 전국의 국립대 앞에 반드시 <한국>을 붙이도록 해야 한다.
한국과 배달국의 역사는 제외하더라도 국조 단군왕검과 47명의 단군 임금들이 다스린 단군한국을 부정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의 식민사관을 비난하는 건 코메디다.
김연아의 금메달과 국민세금으로 세계최초로 황우석박사팀이 개발한 줄기세포특허하나 지켜내지 못하면서 자주주권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자주국방없이 독도는 우리땅을 아무리 외쳐 봐야 지켜낼 수 없다. 영패정치의 정치적 우상이기도 한 박정희가 서명한 한일독도밀약으로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독도영유권을 포기해 버린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 윤대중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영패집단은 그 책임을 제갈 윤대중에게 전가하고 있다. 공동어로수역 모두 박정희가 서명해 준 한일협약서에 의거한 거다. 그래서 국가간 협약내용이 노예계약이 되면 결국 식민지로 전락한다는 거다.
명백한 한국 땅인 대마도는 우리땅 하나 외치지 못하고 국사교과서에 게재하지 못하면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을 비난할 순 없다.
스스로 영토를 지켜내겠다는 자주국방정신없이 자주주권노선으로 군사적으로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미국이 지켜주겠지하는 의존성가지고는 자주주권국가라고 할 수가 없다. 국가운영의 기본은 국방예산을 늘려 자주국방을 튼튼히 하는 길이다. 그 다음이 복지고 그 다음이 문화다.
반도에 갇힌 대한민국에게 미래는 없다. 남과 북8천만 민족의 전면적 교류와 경제활동을 보장을 통하여 5-10년이내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한반도를 통일하고 나가 반드시 100년전 고토 만주를 회복하여 영토와 인구와 군사와 경제력을 높여 고대 동아시아 최강의 단군한국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다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