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원(유주)을 차지한 광개토태왕을 겉으로는 자랑삼아 운운하면서 100년전 중국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후예인 만주족을 중국대륙에서 몰아낸 중국 공산당의 종노릇하는 소중화 종북주의 세력은 부끄럽지 않는가? 한반도가 중국의 속주로 전락하여 비참한 티벳상황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이라도 해 본 적이 있는가!
5-10년이내에 남과 북 8천만 민족의 전면적 교류와 경제활동보장을 통하여 민족의 미래보다는 자기일가의 세습독재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김일성세습독재왕조를 무너 뜨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북한을 통합하고, 미국을 군사적으로 활용하여 100년전 대한민국의 고토인 만주(연해주 포함)를 회복할 때까지 중화패권주의와 러시아 패권주의에 대비해야 하는 우리 민족의 불가피한 현실인 것이다.
배달국 태우의 한웅천왕의 황태자 태호복희가 만든 음양태극사상을 중국사상으로 착각하고 있을 중국 공산당이 대한민국의 국기인 음양태극기를 본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중국의 총알받이로 생각하고 있을 북한 김일성집단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중국을 섬기는 제후국 수준으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 대한민족의 비젼은 음양태극기를 3태극기로 바꾸고 고토 만주를 회복하는 다물이다.
중국군현지역을 회복한 소금장수 출신의 고구려 미천왕(광개토태왕 할아버지)
311년 서진(西晉)의 국도 뤄양[洛陽]이 흉노족의 전조(前趙)에게 함락되는 등 중국 본토에 혼란이 일자, 313년(고구려 미천왕 14년) 고구려 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하여 함락함으로써 설치 421년 만에 꾸준히 유지되던 중국의 무역 식민지 자치구는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또, 고구려는 314년에 낙랑군 남쪽인 대방군(대방국)도 공격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하면 "이 때 낙랑·대방의 두 군에 거점을 두고 있던 요동인(遼東人) 장통(張統)이 고구려 미천왕(美川王:乙弗利)과 연년(連年) 공방전을 벌이다가 민호(民戶) 1,000여 가를 이끌고 요서(遼西)의 모용씨(慕容氏:鮮卑族)에게로 귀속하였다." 하여 낙랑과 대방에서 마지막으로 물러 나는 한족(漢族)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중국세력을 한반도 지역에서 완전히 축출한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283년~331년, 재위 : 300년~331년)은 고구려의 제15대 군주이다.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을불리(乙弗利), 우불(憂弗) 등이 전해 진다. 서천왕의 손자이자 고추가(古鄒加) 돌고(?固)의 아들이다.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백부인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자 을불은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하면서 숨어 지냈다. 사람들은 봉상왕보다 을불을 더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300년 국상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을 폐위할 마음을 품고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이후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 초부터 중국 군현 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302년에는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311년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낙랑군(樂浪郡) 및 대방군(帶方郡)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313년에는 낙랑군의 군벌 장통(張統)이 요동으로 퇴각하였으며 314년에는 대방군을 병합하여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다. 317년에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중국 군현 세력이 축출된 이후 요하 서쪽 요서지방에서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대립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318년 경, 서진(西晉)의 평주 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의 작전에 따라 선비족의 다른 일파인 단부(段部)·우문부(宇文部)와 함께 모용외(慕容?)를 공격하였는데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에는 서진의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하성(河城)을 지키던 여노(如?)가 모용부의 공격에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다.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으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겨울에도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330년에는 후조(後趙)의 석륵(石勒)에게 사신을 보내 중국 방향에서 모용부를 견제하려 하기도 하였다.
331년에 붕어하였으며 미천(美川)의 들에 장사지냈다. 342년에 고구려로 쳐들어 온 전연(前燕)의 군대가 고구려를 위협하려고 미천왕릉을 도굴하여 시신을 가져 갔으며 고국원왕은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시신을 돌려 받았다
고구려 미천왕에 관한 전설(傳說)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 미천왕조에 전한다. 봉상왕의 동생 돌고(?固)의 아들 을불(乙弗)이 왕의 화를 피해 방랑의 길에 올라 온갖 고생을 하다가 후에 국상 창조리(創造利) 등의 영접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는 설화이다.
미천왕 가계도
아버지 : 고추가(古鄒加) 고돌고(高?固)
왕후 : 왕후 주씨(王后 周氏) - 342년에 모용황(慕容?)에게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355년까지 인질로 고초를 겪었다.
장남 : 고사유(高斯由) - 제 16대 왕 고국원왕이 된다.
차남 : 고무(高武) - 343년, 고국원왕의 명을 받아 연나라군과 싸웠다. 험준한 남부전선으로 모용선비족이 쳐들어 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체 군대를 침략이 용이한 북부전선에 집중배치한 탓으로 고국원왕은 남부전선에서 패하였지만, 고무는 북부전선에서 승리하여 연나라는 돌아 갔다. 이듬해인 343년에는 고국원왕이 연나라에 보낸 사신단을 이끌고 연나라에 다녀 온다.
고구려사 최대의 비극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공으로 국내성을 유린당하고 함경도까지 피신한 동천왕 시기와 모용선비족의 침공으로 국내성이 유린당하고 태후와 황후를 비롯하여 고구려백성 5만이 끌려 가고 미천왕의 무덤이 도굴당한 고국원왕 시대다. 모용선비족은 귀중품을 챙기기 위해서 침공시에 왕들의 무덤을 도굴한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에게 오랑캐 취급을 당한 것이다.
동방문명의 태양이였던 단군한국과 부여를 계승하여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였던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시기에 유라시아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도 고구려가 침략을 통한 비극과 시련을 극복하고 교훈을 잊고 미래를 대비하는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과거를 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