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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망해 가던 단군한국 말기의 47대 고열가 단군천왕은 황위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고열가 단군천왕의 종가사람인 해모수가 단군한국의 국가운영기구인 5가의 승인을 얻어 단군천왕에 즉위하니 48대 해모수 단군천왕이 된다.
해모수가 단군천왕에 즉위한 날이 바로 오늘날 불교집단이 석가탄신일로 잡고 있는 음력 4월 8일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석가탄신일은 해모수의 황위에 오른 날을 기념한 날이다. 백성들을 풍족하게 했던 해모수의 자비를 추앙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는 백성들을 보살피고 풍족하게 했던 성덕있는 통치자들은 기억하여 추모하기 마련이나, 백성들을 60년간 노예화하고 굶겨 죽이는 김일성 세습독재일가는 역사 속에서 지워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자신들은 자유가 보장되고, 투표권과 표현.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면서 사이비 종교집단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김일성 우상화와 신격화로 2천만 노예인민의 적이 되고 있는 세습독재를 추종하며 진보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유가 된다. 백성의 적 인민의 적은 결국 돌무덤으로 전락할 제거대상일 뿐이다. 그것이 순리다. 부여를 침공한 한나라와 짝하여 부여내부에서 부여전복에 나선 집단이라면 그 집단은 한나라 세작집단으로 부여는 국가유지를 위하여 반드시 제거해야 할 수 밖에 없다.
한반도전쟁시 김일성일당을 돕겠다는 차원에서 사전에 대한민국의 주요 산업시설을 답사하고 전쟁나면 파괴할 계획까지 모의한 이석기일당이 사법부로부터 10년 자격정지와 12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법치주의 대한민국 형법대로라면 종북정당을 만들어 국민혈세가지고 종북정치행위를 해 온 이석기일당은 사형대상이 된다. 즉, <적과 짝하여 대한민국에 대적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형법 93조 때문이다. 이석기일당이 10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종북적인 정치의식을 포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법집행이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에 살인.강간범들이 형을 살고도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다. 성역없이 적용되야 하는 법치주의라면 법대로 판결해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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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집단이 4월 8일로 정하여 부처 수준으로 숭배하는 해모수의 차남 고진은 고구려의 선조나라이며 단군한국의 봉후국이였던 서요하지역의 고리국의 왕이였다. 고진의 손자가 불리지.고모수로 불리운 옥저의 왕이였는데, 서압록(서요하) 지역을 순찰하다가 강무역을 하던 하백의 딸 유화에 반하여 정분을 나누고 돌아 갔는데, 유화가 고추모를 임신한 것이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햇빛을 받아 탄생했다고 고추모의 탄생설화를 신격화해서 기록해 놓았다. 아이를 임신하여 집에서 쫓겨난 한 처녀 유화는 아이의 아버지 불리지를 찾아 갔으나 이미 죽고 없었다. 그래서 고추모의 혈족이 되는 해모수 손자인 동부여의 왕인 해부루를 찾아가 의탁했다.
본래 해부루는 단군3한국의 중심국가인 진한국을 계승한 해모수 부여의 천왕이였으나, 부여의 서쪽지역을 침공한 한나라에 맞서 5천명의 의병을 일으켜 물리친 훗날 부여 동명왕이 되는 고두막이 부여민심을 등에 업고 부여 천왕에 즉위하자, 해부루는 황권을 넘기고 부여의 제후가 되겠다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가섭원이 칭하니 동부여다. 강단사학계는 동북공정.식민사관에 종속된 매국매족적 사학자들이 위서 위작으로 비하 매도하는 [환단고기]내용만 상세히 검토하고 연구해 보아도 명확한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음에도 사료로 인정을 하지 않으니 스스로 중국과 일본의 역사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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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고추모가 태어난 이후 부여의 황권은 해모수혈통에서 고두막 혈통으로 넘어간 상황이다. 해부루가 죽고 양아들 금와왕이 왕위에 즉위하는데 유화 모자를 잘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금와왕의 아들 대소는 부여를 세운 해모수의 손자가 고추모임으로 정치권력적으로 위협을 느낀 나머지 죽이려고 애를 쓰자, 유화부인은 고추모에게 부여로 망명을 하라고 한다.
고추모는 어머니 유화의 말을 따라 마리.오이.협보 등 추종무리를 이끌고 엄리대수를 건너 고두막이 부여 도읍지를 길림에서 천도한 환인지역으로 남하하여 험준한 자연성인 골본성에 터를 잡은 것이다. 하늘아래 암반에 700년 터를 정한 것이다. 그래서 골본성 정상에 가면 규모는 작지만 궁궐터도 있고 병영터도 있고 우물터도 있는 것이다.
400년 고구려 수도였던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해 가기 전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환인이란 지명은 마고이후 유라시아 12연방국가를 건국한 환인과 관련된 지명이다. 아마도 환인이 불로 고기를 굽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800의 무리를 이끌고 남하했다는 [환단고기]기록으로 보아 환인지역으로 남하한 환인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이어진 지명이라 본다. 고두막 부여천왕이 그 환인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골본부여라 칭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졸본부여로 기록되어 있으나, 병사 졸은 고구려를 비하하는 중국식 표기이고 본래는 골본, 즉 고리족의 뿌리(환인)라는 의미의 골본부여.골본성이 맞는 것이다.
고두막 부여 동명왕은 천도한 골본에서 붕어하고 무덤도 골본천에 있다고 [환단고기]는 기록하고 있다. 골본천은 바로 지금의 혼강이 될 것이다. 고추모 집단이 부여로 망명할 당시 골본부여는 고두막의 아들 고무서 단군천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어 후계자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고무서의 둘째 공주가 바로 해부루의 손자인 우태와 혼인하고 사별한 소서노인 것이다. 고무서 단군천왕은 고추모를 비범한 인물로 보고 자신의 둘째 딸 소서노와 혼인을 시킨다.
권력기반이 없던 고추모는 소서노와 혼인을 통하여 권력적 기반을 다지고 고무서가 죽은 후에 유언에 따라 부여 천왕에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국호를 부여에서 선조나라의 국호인 고리(고려=고구려)로 바꾼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남긴 중원고구려비문에는 고구려의 공식국호가 고려(고리)이고 고구려왕의 공식칭호도 태왕이라 기록하고 있다. 중원고구려비문에서 장수태왕의 연호는 건흥인데, 종원고구려비문이 발견되기 전에 출간된 [환단고기]에도 건흥으로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삼국사기] 이전의 상고사를 기록한 한민족 정통사서인 [환단고기]를 위서 위작으로 매도하는 자들이 바로 매국매족적인 사학자들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다.
고추모가 국호까지 바꾸고 왕에 즉위하자 부여는 분열되었을 것이고, 길림지역에서 부여라는 이름으로 고추모 고구려에 저항하게 되니 잔존부여집단이 한반도에 나라를 세운 백제(일본)이고, 몽골초원으로 이주한 부여족이 바로 훗날 징기즈칸을 낳은 부여족이고, 모용선비족의 공격을 당하여 궤멸당할 때 초원을 따라 유럽 볼가강까지 이주하여 불가리아(부여고리)를 세우고 단군왕검에게 제사를 지냈던 부여족이다.
그리고 골본부여 지역 세력들도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뜨네기 고추모를 달가와 하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추모가 내기를 하여 복종시키고 다물후로 삼았다는 [삼국사기]기록내용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동부여에서 예씨부인 사이에서 낳은 고추모의 아들인 유리왕자가 찾아 오면서 소서노 자식들과 고추모의 자식간의 권력다툼이 벌어 지게 되고 소서노는 마침내 비류.온조 두 아들을 데리고 대릉하 하류지역으로 이주하여 10년간에 걸쳐 무역업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어하라라는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기를 고추모에게 간청하게 된다. 고추모는 기뻐하면서 승인한다.
이로 보아 소서노는 고추모를 매우 사랑했음을 알 수 있고 동방으로 진출하여 한민족을 식민지화하려는 한나라에 맞서 분열보다는 민족통합에 힘쓴 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정쟁에 미친 정치집단이 소서노에게 배워야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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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는 비류에게 어하라 왕의 자리를 물려 주게 되고 온조는 10명의 신하와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미추홀 인천포구(소래포구 추정)를 통하여 서울 한강지역에 나라를 세우는데 십제다. 물론 당시 남한통치자 마한 진왕의 승인을 얻고 따라서 권력적 기반이 약했던 고추모가 왕에 즉위할 때 최강 국가는 대소왕이 다스리는 동부여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소왕은 고추모부터 유리왕 시대까지 고구려에게 굴종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리왕의 아들인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정벌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동부여를 복속시킴으로써 마침내 고구려의 위상이 강해지는 것이다.
[삼국사기][환단고기]기록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 태조왕 때는 요하를 건너 번한국 땅인 요서지역를 회복하고 10개의 성을 쌓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고구려 세력인 부여가 백제의 시조가 되는 구태의 지휘로 한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적하게 되는데 태조왕이 요서지역의 전한군현을 회복하려 할 때 2만의 기마군으로 고구려군을 물리친게 그것이다. 그래서 10개성을 쌓고 한나라 침공에 대비한 태조왕의 요서회복은 물거품으로 돌아 간다.
한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부여(백제)는 당시 후한의 요동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말 3국지 시대가 되면서 후한의 요동군이 위나라의 침략을 당하여 궤멸되면서 요동군과 부여집단은 황해도 지역으로 이주하여 대방군과 백제를 세우고 고구려에 대적한다. 백제를 세운 부여집단은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온조 십제와 마한을 통합하여 남한의 패권을 장악하며 동아시아 해상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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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을 만든 요동태수 공손강은 백제시조 구태의 처남으로 백제 책계왕의 왕비가 후한말기 왕을 자처한 대방군 태수 딸일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고구려 미천왕 때에 전한 후한의 모든 군현이 고구려의 땅이 되면서 백제의 장인.처남나라인 대방군이 세워진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는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남평양성인 지금의 북한 평양성에서 전사하게 된다.
서쪽으로부터 모용선비족의 침공을 당하고 남쪽으로 백제의 침공을 당한 고구려는 위기였다. 이 때 등장한 군주가 호태왕으로 칭송받은 국방군주 애민군주였던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은 세계 최대 철보유량을 가진 고구려의 철로 세계 최강의 찰갑 개마무사군단을 조직하여 침략을 방어하고 응징하면서 만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열도.중국.초원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서쪽으로 감숙성지역인 평량까지 굴복시켰고, 거란.백제.신라.왜 할 것 없이 고구려에 조공했다면서 해동(고구려)의 최전성기였다고 [환단고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감숙성 돈황석굴에 그려진 고구려 수렵화와 고구려 성의 그림은 부정할 수 없는 고구려의 토욕혼 정벌을 말해 주고 있다. 토욕은 모용선비족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세운 초원나라인데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초원을 장악하려 하자 광개토태왕이 북위를 후방지원할 수 있는 토욕을 정벌하고 북위를 압박한 사건이 바로 북위가 수도까지 천도하게 되는 토욕정벌이다.
북위가 수도를 천도했다는 기록은 북위의 위사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위사]기록에 따르면 토욕을 정벌한 해에 북위의 수도였던 업에 고구려 기술자와 고구려인 45만을 이주시켜서 북위가 수도를 천도했다가 기록하고 있다. 유라시아 초원무역을 장악하기 위한 광개토태왕의 국가전략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한반도가 통일된 후에 북한지역과 만주로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대거 이주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국방력이 국가운영의 기본이다. 김일성집단과 일본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경제대국의 위상에 맞게 국가재정지출의 1순위를 국방력에 투입하여 해군력을 중심으로 최강의 자주국방력을 보유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수호하기 위한 자주국방강화를 반대하는 자들은 주변 국가들을 매우 이롭게 하는 세작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서해지역에 항만시설을 증축하여 짜퉁이 판치는 중국시장에 진출하여 중국경제를 주도해야 한다. 유라시아 대륙철로를 통하여 한류문화가 전 세계로 전파되어 정신문명을 인류문명의 모국인 대한민국이 주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