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마다 열리는 올림픽은 각 종목에서 전 세계의 선수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량과 재능을 뽑내는 축제의 마당이다. 선수들만 이 축제에 참가하는 게 아니다.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를 지켜보며 자국 선수들은 물론이고 타국 선수들의 열정과 끈기에 열광하고 환호하며 이 성대한 스포츠 축제에 기꺼이 동참한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 함께 공존하는 곳, 전 세계의 이목은 지금 동계올림픽이 한창인 러시아의 소치에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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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동계올림픽은 지난 7일 개막했다. 소치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따르면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국가는 모두 88개국으로 지난 대회였던 2010년 캐나다 밴쿠버 대회의 82개국을 넘어 최대를 기록했고, 참가 선수 규모 역시 밴쿠버 대회의 2500명을 훌쩍 뛰어넘는 총 290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이번 동계올림픽에 선수 71명과 임원 49명 등 총 120명이 참가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2018년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대회경기운영과 경기시설 등을 점검하는 한편 2006년 토리노 대회와 2010년 밴쿠버 대회에 이어 3회 연속 'TOP 10'에 진입하겠다는 목표 아래 역대 최대의 선수와 임원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참가국 모두 최고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피겨 여왕 '김연아', 빙속 여제 '이상화', 동계 올림픽의 효자 종목인 '쇼트트랙'에서의 선전을 통해 세계 10위 권에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내심 금메달 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를 획득하며 역대 최고인 세계 5위의 성적을 냈던 지난 2010년 밴쿠버 대회의 선전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회가 중반을 넘어섰음에도 당초 기대보다 성적이 저조해 대회 관계자들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던 쇼트트랙의 부진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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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했던 쇼트트랙의 결과가 신통치 않자 그 부진의 원인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가 1500M에서 동메달, 1000M 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자 그의 귀화를 둘러싼 과거사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불에 기름을 붓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
분노한 네티즌들의 항의 폭주로 빙상연맹 홈페이지가 다운되는가 하면, 안현수 선수의 귀화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진 관계자들의 실명이 공개되고 빙상연맹의 파벌싸움과 무능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오래 전부터 곪아왔던 빙상연맹 내부의 치부가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아쉽게도 오늘 포스팅은 빙상연맹의 비리와 파벌싸움에 관련된 글이 아니다.)
☞ '빙상연맹 최악의 날' 환골탈태가 필요하다 ☜ (관련기사)
지난 13일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승에서 영국의 크리스티 선수는 코너에서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다 우리나라의 박승희 선수를 넘어뜨렸다. 이로 인해 금메달이 유력하던 박승희 선수는 아쉽게도 동메달을 따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이 경기를 지켜본 네티즌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인신공격성 댓글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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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 선수 자신도 그랬을 것이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분명히 안타깝고 속상하며 화가 나는 일이다. 이 순간을 위해 지난 4년을 피땀 흘리며 준비했을 박승희 선수를 생각하면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문제일 뿐, 자신의 행동에 사과까지 한 선수에게 이런 식의 비이성적인 감정을 쏟아내야만 하는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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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크리스티 선수는 페이스북 계정을 폐쇄했다. 영국의 다수 매체가 이같은 사실을 보도했고, 한국 네티즌들의 '사이버 공격'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며 한국 팬들의 인식공격성 악성 댓글 문제를 집중 조명했다.
남자 쇼트트랙 5000M 계주에서 넘어진 이호석 선수와 이를 옹호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던 신다운 선수에 대한 네티즌들의 비난 역시 수위를 넘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이들에 대한 격려보다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악플이 대부분이었다. 소치 올림픽에 쏠려있는 국민들의 관심이
'엉뚱하게도' 다른 곳에서 비이성적으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엉뚱한' 곳에 집중되고 있는 이 기이한 현상이 필자를 가슴 아프게 만든다 . 지금 국민들의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빙상연맹 보다, 영국의 크리스티 선수 보다, 이호석 선수 보다, 신다운 선수 보다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이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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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은 국가기관인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 및 국가보훈처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선거승리를 위해 계획적으로 개입했고, 이 과정에 경찰과 새누리당 역시 조직적으로 관여했던 불법과 부정으로 얼룩진 부끄러운 선거였다. 선거를 통해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대의정치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특정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악용된 것이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 국가보훈처의 불법대선개입과 경찰의 국정원에 대한 축소·은폐 수사,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공유했던 새누리당의 행위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라 할 수 있는 주권재민의 대원칙마저도 무너뜨린 있을 수 없는 폭거였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이 불법부정선거에 필자만 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 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선거부정사건에 유독 필자만 분노의 역류에 휩싸인 것인가? 빙상연맹의 홈페이지가 다운될 것이 아니라 청와대 홈페이지가 다운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국의 크리스티 선수에게 향할 분노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에게 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호석, 신다운 선수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 군 사이버 사령부와 국가보훈처, 법무부장관과 검찰을 비난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와 비난은 참으로 소박하고 순박하기 이를 데 없다. 자칭 전통야당이라는 민주당은 부정선거라고 외치면서도 대선불복은 아니라며 사자 풀 뜯어 먹는 소리나 하고 있고, 국민들 역시 이 희대의 부정선거에 도무지 분노할 줄 모른다. 빙상연맹의 파벌문제와 비리, 영국 크리스티 선수의 반칙, 이호석 선수의 실수와 이를 옹호한 신다운 선수에게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뒤흔드는 헌법유린 사건에는 왜 이리도 침착하고 관대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의 분노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내적 반응의 결과로 나타난다.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와 관련된 사람들의 분노 역시 불합리한 과정과 그 결과의 문제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분노의 감정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어느 곳으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분노는 단지 미성숙하고 투박한 감정의 배설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 - 스테판 에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분노는 '사적인 분노'와
'공적인 분노'로 나누어 진다. 지금 우리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성과 보편적 상식, 공정과 정의에 대한 치열함을 기반으로 한 '공적인 분노'다. 사회적 부조리와 불평등, 사회 구조적 모순 등에 저항할 때 나타나는 '공적인 분노'에 의해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그 토양이 비옥해졌다. 사람들이 이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행동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씨앗를 뿌리기 위해 부당한 권력과 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선배들에 대한 예의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