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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많이 마셨구만?" 아침에 일 가자 동료들이 얼굴 보고 그렇게 말하네요. "Did you have little bit too much?" 마시긴 마셨습니다. 갑갑한 속을 달래느라 위스키 한 잔 딱 마셨습니다. 평소에 독주 마시면 뭐라고 한 마디 던지며 견제구를 날리실 어부인께서도 "마셔, 마셔." 하면서 제 등을 쓸어주기까지 했습니다. 위스키 한 잔으로 속을 달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오늘 일 나올 것을 생각해서 딱 저도 그걸로 끝냈습니다.
영화 변호인이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극장에서 개봉했던 어제, 부모님과 아이들, 아내와 함께 여섯 식구가 극장을 찾았습니다. 일이 늦게 끝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집에 오는 길이 금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막히지 않아 쌩쌩 달려 왔습니다.
극장엔 금요일 저녁 첫 개봉날임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한인들이 찾아왔습니다. 평소에 미국 극장 그렇게 찾을 일 없으실 것처럼 보이는 어르신들도, 그리고 젊은이들도 당연히 꽤 보였고, 저희처럼 가족 단위로 찾은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간혹 미국인들도 앉아 있었는데, 아마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의 영화평이 사람들을 끌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는 얼굴들도 많이 만나게 됐습니다. 우리가 극장에 입장할 때는 잘 몰랐지만, 끝나고 나서 보니 울어서 빨개진 눈들을 하고 서로 인사를 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였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줄거리나 배우들에 대한 평이야 많이들 보셨을테니 재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아내는 고문 장면에선 내내 눈을 감고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송 변호사가 국밥집 아주머니를 안아보고 싶다고 하는 장면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여보, 나 좀 도와줘"의 한 대목이 겹치면서 그때부터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를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내셨던 부모님들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어느 대목에서부터인가 어머니도 눈가의 눈물을 찍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이 같은 감정이었겠지만, 마지막 공판과 송변이 피고가 되어 받는 재판에서 그 수많은 변호인들이 호명되는 장면에서 느꼈던 감동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우리보다 약간 윗쪽의 자리에 가서 앉아 영화를 봤던 지호와 지원이가 우리 자리로 내려왔습니다. 지호도 많이 울었는지 눈이 빨개져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지원이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알고 있는 '한국'의 과거, 가끔 아빠의 회상으로나 들었던 그 과거가 현실이 되어 아이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겠지요.
"아빠, it was so intense.(영화가) 너무 강렬했어요" 지호의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지호와 지원이는 아빠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고, 아빠는 답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싸우고, 그렇게 실제로 싸우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고, 결국 그런 힘들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한국 사회에서 더 이상 저런 고문은 없지만, 저 '프레임'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다고.
집에 오니 몇몇 지인들이 변호인을 같이 관람하자는 메일들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장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영화 보고 왔습니다. 얼른 보시구요. 손수건 꼭 준비해 가세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