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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소통의 달인은 겸손하게 소박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착각은 자유다. 그런데 착각은 때로 무례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대하고 사귀다 보면 ‘저건 좀 아니다.’ 싶은 행동이 있다. 물론 어떤 것은 잘 몰라서 저지르는 일도 있고, 학습이 덜 돼서 그리 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좋은 결과를 유발한 것이라면 왜 굳이 ‘무지’라는 표현을 쓸 것인가.
나의 절친 중에서는 밤에 TV를 보다가 ‘혼자 보기 아깝다’ 싶은 프로가 있으면 ‘빨리 채널 00!’하는 식으로 문자를 넣어준다. 바쁜 세상에 많기도 많은 채널을 동시에 다 볼 수는 없는 일이라서 절친이 권해주는 프로그램은 때때로 양질의 정보를 취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그제는 퇴직교사 출신의 한 여성이 네팔여행을 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요즘 맛 기행이나 여행프로그램은 하도 흔해빠진 것이라서 ‘여행, 그것도 네팔?’하고 지레 예단부터 했다가 “사람들은 저더러 사교성이 좋다고 하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절로 되는 게 있나요?”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다.
그 순간 생각의 줄기 한 가닥이 퍼뜩 떠올랐다. 화면의 주인공은 어디서든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넨다.’는 실천으로 낯선 여행지에서조차 사교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럼 나는 어디에 속할까. 중요한 것을 자주 간과해버리거나, 알면서도 가볍게 흘려버리는 일이 어느 새 나쁜 습관으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노파심이 들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결국 반듯한 사람은 못 되니까.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게 바쁜 모 금융그룹에 몸담고 있는 J씨는 그 와중에도 도전한국인본부를 꾸리고 있고, 영등포에서 요양보호사교육원을 운영하며 40년 넘은 봉사단체에 교육팀장까지 겸하고 있는 P씨, 늘 상대방에게 먼저 인사를 하며 작은 일에도 지체 없이 응대해주는 N씨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전화든 문자든 성심을 다해 응대해주는 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본 받겠습니다.” 한 적도 있고, “참 좋은 성격이네요.”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를 건넨 적도 있다. 그들은 상대방이 누구든 보내온 문자 하나에도 사람을 기다리도록 하지 않는다. 빠르게 응답을 해주는 것이어서 남의 신경을 껄끄럽게 날 세우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내 손안에서 모든 것을 조작하는 편리한 기기다. 통화는 물론 카카오톡, 트윗, 페북 그리고 문자도 본다. 그런데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통성명을 한 처지로서 일이 있어 보낸 문자가 있었다 치자. 상대방은 그것을 읽고도 ‘봤습니다.’하는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섬김과 사귐이랄지 나눔’ 같은 것은커녕 기본에 속하는 인간미조차도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긴 받기만 해도 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안성맞춤인 예인지는 모르지만, 거대하고도 헛된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인들 중에는 쌔고 쌘 것 같다. 한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로 대단히 유명한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출가하기 전에 딸 하나를 뒀다는데 어느 날 딸이 찾아왔던가 보다. 아버지가, 핏줄이 그리워서 인륜과 천륜에 끌려서 찾아갔다. 그런데 결과는 문전박대였다. 출가한 사람들의 18번 “나는 이미 속세를 떠난 몸! 어찌 사사롭게 혈육을 밝히리오.”하며 일언지하에 고개를 돌렸다는 것이다.
이게 수도승의 도리인가.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한 점 혈육이 찾아왔는데도 만나주지 않는 것이 무슨 도리요 고결한 경지라고 한때는 그 사람을 우러르는 표징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자신의 출가와 수도행위만 중요하고 인륜과 천륜을 찾아서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찾아온 착한 효심은 짓밟아서 패대기친 행위가 위대하고도 정당한가. 이 같은 일이 수행의 높은 경지로 호도된다면, 착각도 유분수다. 잘못이라 생각한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이돌 가수에 미쳐서 그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광 펜들에게도 이유는 있는 법이다. 하물며 자식이 아버지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찾아왔으면 그 효심을 봐서라도 아름다운 해후를 이뤘어야 한다고 본다.
이같이 잘못된 가르침이나, 전도된 가치관 하나가 유감스럽게도 크고 작게 영향을 끼친다. 생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서로 통성명을 하여 알게 된 처지로서 안부 글을 보내왔으면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하는 인사 한 마디쯤은 할 줄 아는 게 기본이련만, 우리 사회는 이런 염치가 너무나 메말랐다. 무지는 이래서 소통의 싹을 꺾고 무례함과는 샴쌍둥이인가 보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를 구원한다. 모두 목에서 힘을 빼자. 작은 문자 하나라도 봤으면 ‘잘 봤다.’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면 서로 좋은 일이다. 보낸 사람은 홀가분하고 받는 사람은 “왜 아무 말 없어?”하고 괜한 신경 안 써서 좋은 거다. 그렇지 아니한가!
<박정례 :기자 / 르포작가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