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조사는 국회가 직접 국정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 진상규명과 조사를 벌이는 행위이다. 그러나 지난해 여름 행해졌던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는 그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진상규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정원은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국정원과 경찰의 뇌리에 박혀 있었고 이에 따라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한 몸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내세워 검찰의 수사를 방해했고, 새누리당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국정조사를 누더기로 만들었으며, 국정원과 경찰 등의 관련자들은 하나같이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말하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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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9일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2차 청문회에는 전·현직 국정원 관계자 7명과 경찰관 15명 등 총 26명의 증인이 참석했다. 청문회의 쟁점은 크게 '김용판 전 서울 경찰청장의 외압 사실 유무'와 '수사과정에서의 축소·은폐 여부', '중간수사 발표의 대선 관련성 여부' 등 3가지였다. 그러나 이날 청문회는 예상대로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증인석에 앉아 있던 국정원 직원과 경찰 분석관 등은
'국정원은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문에 따라 하나같이 관련 사실을 부인했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는 기계적 답변만을 내놓은 이날, 그들은 앵무새였고 녹음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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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은 달랐다.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도 많이 달랐다. 경찰 측 증인으로 참석한 14명이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경찰의 수사는 정당하고 합리적이었다.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개입되지 않았다'를 이구동성으로 읊조리고 있을 때 오직 그녀만이 그들과는 다른 의견을 피력했다. 그녀는 외압이 없었다는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말은 거짓이고, 수사과정에서 고의적인 사건의 은폐·축소가 있었으며, 중간수사 발표 역시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였다고 증언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처세에 능한 동물이다. 어느 편에 서야 하고, 어느 줄을 잡아야 자신에게 유리한지 기민하게 파악하고 민첩하게 움직인다. 14명의 증인들이 선택한 길은 편한 길이고, 안전한 길이며, 그래서 남들이 다 가는 길이다. 반면에 권은희 과장이 선택한 길은 고단한 길이고, 위험한 길이며, 그래서 모두가 주저하는 길이다. 이날 참석한 14명의 경찰측 증인들은 평탄한 길을 선택했고, 권은희 수사과장은 가시밭길을 선택했다. 두 길로 갈라지는 선택의 지점에서 과연 어느 쪽으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온전히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 인간의 삶은 전혀 다른 족적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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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법원은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오늘 이 글에서 이번 재판의 결과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삼권분립의 원칙을 스스로 걷어차고 정치권력에 굴종한 정치적 판결을 논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다만 이번 판결이 사법부의 권위와 위상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나쁜 사례로 기억해 둘 필요는 있다. 이번 판결에 수긍하는 국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사법부는 물론이고, 특히나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새겨 두어야 할 것 같다.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결국 부러진 화살이 될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무죄는 이미 예견된 일이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국정원은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무죄 선고가 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해서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흥분하고 충격을 받게 되는 것처럼 예상한 결과에는 허탈하고 공허한 장탄식이 배어 나오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지게 될 지 지켜보는 일은 그래서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입에 담는 모난 돌은 정에 맞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법부라고 해서 다를까. 이런 논리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옷을 벗었고 윤석열 전 수사팀장 및 국정원 대선수사팀들은 줄줄이 좌천되었으며 권은희 수사과장 역시 승진이 누락되었다. 무자비한 정에 맞지 않으려면 모난 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 무죄가 선고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앞서 언급했던 청문회에 참석했던 14명의 경찰 측 증인들 등은 모두 한결같이 정에 맞지 않기 위해 편한 길, 안전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를 위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개인적 양심을 가차없이 내버렸다. 그들은 환경에 기꺼이 그들의 삶을 종속시켰다.
반면에 권은희 수사과장은 여전히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을 가겠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녀는 어제 송파경찰서에서 재판 결과에 대한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계속 (재판을) 이어나갈 예정이고 향후 거취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공직자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말했다. 남들 다 가는 쉬운 길을 놔두고 계속 정에 맞겠다고 한다. 이 불의한 시대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무겁고 번거롭기만한 개인적 양심과 소신을 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부여잡고 가겠다 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의 이 어리석고 바보같은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성원을 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다. 향기가 있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든지 빛을 발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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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les of Justice', 눈 가리개를 한 이 여인은 정의에 입각해서 오직 사실만 직시해 재판을 해야 한다는 재판의 공정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상징하고 있는 공정과 정의가 비단 사법부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합리적인 사회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바로 공정과 정의다. '우리 사회는 과연 공정한가, 우리 사회는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이 1차원적인 질문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바꾸어 보겠다.
'당신은 우리 사회가 공정해 지기를 바라는가, 우리 사회가 정의롭게 되기를 바라는가'
당연히 이 2차원적인 질문의 정답은 없다. 그러나 만약 이 질문에 당신이
'Yes'라고 대답했다면 어떠한 외압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개인적 양심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권은희 수사과장의 모습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환경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그녀로부터 당신이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면,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불의에
맞서는'담대함'과 '용기'뿐이다.
(출처:바람부는 언덕에서 세상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