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정치의 세계에는 호재도 없고, 악재도 없다. 단지 쉬지 않고 부침하고 명멸하는 사건과 쟁점만이 존재할 뿐이다. 김우룡-최시중-안상수로 이어지다가 이명박의 독도 관련 발언으로 화룡점정을 찍는 현 정권의 자살골 시리즈는 겉으로 보기에는 집권세력의 악재인 듯하다. 허나 속단은 금물이다. 한나라당의 잇따른 악재는 민주당으로 하여금 범야권 단일화 없이도 이길 수 있다는 만용을 부리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의 일련의 자충수와 민주당의 단일화 협상 파기는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루는 셈이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한 군데는 다른 야당한테 양보해야 옳다. 그러자면 일단 민주당 내부에서부터 희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마땅하다. 한데 현실을 살펴보시라. 비주류들 지역구만 골라서 크게 인심 쓰듯이 내줬다. 장물아비 바겐세일 하는 꼴이다.
다시금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지역구를 버리겠다고 선포한 당대표 정세균 씨를 필두로 원내대표 이강래 씨, 정책위의장 박지원 씨, 대변인 우상호 씨, 민주당의 최고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최재성 씨와 전병헌 씨의 지역구부터 담보물로 내놓는 것이 순리고 정도(正道)다. 물론 이 사람들 중에 단 한 명도 자신이 점유한 현재의 지역구를 손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을 게다. 제일 많이 가진 자들부터가 지독하게시리 인색한 마당에 야권 단일화의 성과물이 도출될 리가 있겠는가? 단일화고 나발이고 전부 쇼고 생색이다.
2. 그럼에도 한 가지 기발한 방법은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단일화의 길이 실재한다. 열쇠는 한명숙 씨가 쥐고 있다. 우선 전제해야 할 사실은 나는 한명숙 씨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그를 지지했다면 사적으로 만나서 비기를 전달했으리라. 즉 천기누설은 하지 않는다.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들이 발주하는 선거 용역을 주로 수주하는 잘 아는 친구로부터 엊그제 전화가 걸려왔다. 한나라당이 참패할 것 같아 답답하고 불안하다는 하소연이었다. 나는 걱정도 팔자라고 대꾸해줬다.
선거판에서 가장 위험할 때는 저쪽이 수중에 쥔 카드가 도대체 뭔지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경우다. 친구의 기우와는 달리 야당들이 던질 승부수는 훤하게 노출되어 있다. 서거한 전직 대통령 영정 붙잡고 대성통곡하는 유훈정치가 고작이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헛발질이 여기에 간간이 보태질 터. 야당이 능동적이고 창발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는 이외에는 전무한 실정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명숙 씨의 재판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리라는 분석에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건 이미 스팀 다 빠진 식상한 이슈다. 왜일까? 유죄든 무죄든 양쪽에서 내보일 작전의 수가 일찌감치 정해진 탓이다. 법원의 선고 결과에 관계없이 양쪽이 할 일 또한 미리 정해졌고. 항소하기와 흠집 내기.
나는 카드도 화투도 치지 않는다. 그래도 카드나 화투를 할 적에 화투장 숫자나 카드 개수가 판마다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어떻게 화투나 카드를 배열하느냐의 순서의 미학이 승패를 가른다는 뜻이다.
3. 오는 7월에 서울 은평구에서는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씨가 대법원에서 유죄확정 판결을 받고 상실한 지역구다. 한나라당에서는 이재오 씨가 오래전부터 지역구로 돌아와 선거운동에 열심이라는 소식이다. 이 지역구를 미끼로 유시민 씨가 진보신당을 낚으려했다가 스타일만 또 한 차례 잔뜩 구겼다. 심상정 씨로부터 ‘도로 유시민’ 됐다는 핀잔만 얻어먹고 말았다.
친노세력이 오매불만 소망하는 정치구도가 ‘노무현 대 이명박’으로 판이 짜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른바 노무현의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의 실세들과 정면으로 대결한 사례는 실질적으로 없다는 데 있다. 한명숙 씨가 서울시청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은평으로 가면 ‘노무현 대 이명박’의 빅 매치가 사실상 최초로 성사된다.
설령 한명숙 씨가 서울시장에 당선된다 해도 비록 구색은 날망정 결국은 그걸로 정치생명 끝이다. 다음은 없다. 해피엔딩도 어쨌거나 끝은 끝인 거다. 2년 후에 시장 때려치우고 대권에 도전하는 걸 곱게 봐줄 유권자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가 서울시장으로 있으면서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공사 같은 모종의 작품을 남기리라는 보장도 없다. 검찰 수사에 시달리느라 서울시장으로서 추진할 정책과 공약을 개발하고, 비전과 콘텐츠를 준비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하지만 은평서 이재오를 격파한다면 단숨에 강력한 대권주자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다. 이명박 정권의 2인자를 무릎 꿇리고 그 기세를 몰아 대선에 도전하면 되는 것이다.
한명숙 씨가 은평으로 1지망을 바꾸면 복잡하게 꼬여 있는 단일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의 가닥이 잡힌다. 현재의 민주당에는 한명숙 씨가 거의 붙박이 서울시장 후보처럼 되어 있다. 검찰 수사로 말미암아 표현은 못할지언정 나머지 민주당 후보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리라. 한명숙 씨의 곤혹스런 입장을 뻔히 아는 다른 야당 소속 주자들 역시 민주당을 향해서 후보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가 몹시 난처하다.
한명숙 씨가 은평으로 차선을 비켜주면 그의 뒤편에 대기하고 있는 민주당 후보들과 다른 정당 후보자들 사이의 숨막히는 막상막하의 경쟁이 모양새 좋게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제일 유력한 인사가 결단을 내리고 살신성인한 상태에서는 노회찬 씨 같은 타당 후보들이 민주당의 후보 단일화 수락 공세에 버틸 구석이 사라질 것이다. 그 후에는 여론조사로 결정하든, 국민경선을 실시하든, 시민배심원단 제도를 도입하든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단일화 무대가 펼쳐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이제는 해볼만한 싸움이라고 믿는 덕분이다.
이 과정에서 야권에서는 의외의 제3후보가 출현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이 전혀 대비하지 않았던 뜻밖의 인물이. 서울의 정체가 해소되면 경기도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보장된다. 한명숙 씨의 은평 보선 출마는 민주당이 대승적 견지에서 엄청난 양보를 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론은 이렇다.
○ 한명숙은 이재오를 물리치고 야당 전체를 대표할 차기 대권주자로 단번에 도약
○ 야당의 다른 기존 서울시장 후보들에게는 희망을 품고서 더욱 분발할 동기와 전망을 부여
○ 전체 진보개혁 진영 차원에서는 이명박 정권의 허를 찌를 제3후보가 등장할 토양 마련
○ 민주당은 실제로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가운데 하나도 양보한 것이 없으면서도 마치 통 크게 희생한 듯한 착시효과를 연출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김.
○ 기타 야당들은 장기적 당세확장에 필수적인 적절한 지분과 기반을 기초자치단체 수준에서 확보하는 동시에 광역선거에 나섰다가 중도에 기권하는 간판급 선수들의 내상을 최소화할 선수보호용 출구전략 수립
발상의 발칙한 전환을 요구하는 나의 이러한 제안은 현실에서는 채택되지 않을 확률이 100프로다. 지금의 야당들이, 범위를 좁히면 오늘날의 민주당이 이와 같은 종류의 과감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낼만큼 재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면 한나라당에 정권 봉헌하고서 군소야당들 상대로 SSM 노릇하는 골목대장 꼬락서니로 타락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뉴스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니 야당의 단일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자를 이길 확률이 더 높아졌다고 한다. 분명 서두에서 지적한 바 있다. 호재와 악재는 한몸이라고. 이런 여론조사는 단일화되지 말라는 저주와 마찬가지다. 단일화만 되면 자기가 뽑힐 수 있다는데 어느 누가 미쳤다고 후보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겠는가?
번외. 요즘 ‘키신저 회고록’을 읽고 있다. 한국정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책이다. 옛날 서적이라 세로글씨에다가 글자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읽기에 불편하기는 하지만.
경기도지사 출마를 선언하자마자 십자포화를 맞고서 비틀거리는 유시민 씨의 처지가 닉슨의 중국방문 전야의 모택동의 신세와 비슷하다. 안으로는 홍위병들 앞세운 문화혁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