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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로 흥한자 총칼로 망하지 않는다는 총구 권력론
'총칼로 흥한자는 총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이와 상대되는 말로"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중국 모택동 주석의 발언을 들 수 있다.이와같은 '총칼흥망론'이나 '총구권력론'은 시대와 국가,체제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것 같지는 않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난다.간혹 보편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예외적 사례로 그쳤다. 모든 권력이 제왕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절대 왕정이나 히틀러의 제3제국,소련,중국등 강력한 통제력에 바탕한 일당독재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총칼로 흥하였지만 총칼로 망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모택동의 말처럼 이들 전체주의 체제는 총,즉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동안 수 많은 정적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등 피의 숙청을 가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총칼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 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 된후 10월 볼세비키 혁명을 통해 소련제국을 세운 레닌,2인자였던 트로츠키와 베리야를 제거하는 등 수백만명을 숙청하고 수천만명을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숙청의 대명사 스탈린,역시 가오강 류사오치 린뱌오 등 연 이은 2인자 숙청과 엄청난 인명을 희생시킨 문화대혁명의 모택동 등 대다수 권력자들이 총칼로 흥하였지만 천수를 누리고 노환으로 사망하는등 자연사하였다.
게르만 민족주의와 반 유대주의를 내세워 600여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도 암살위기를 맞긴 하였으나 2차대전 종전 직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이와같이 군사반란 등 총칼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정권을 뺏기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칼로 정권을 잡은 한고조 유방,명태조 주원장도 개국공신 대다수를 잔혹하게 멸문시키는 등 살육을 밥먹듯 하였으나 역시 칼에 목숨을 잃거나 반란에 의해 황권을 뺏기지 않았다.무력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하여 강력한 공포정치,공안통치를 통해 최고 수준의 통제,장악력을 갖춘 체제는 이처럼 총칼로 흥할뿐 총칼로 망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다.
총구권력론과 총구 흥망론의 산 증인 평양정권과 남한 보수정권총칼로 흥한자가 총칼로 망한 경우는 왕정이나 전체주의 체제가 아닌 민주헌정체제하에서 군사정변 등 초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권을 잡은 후 민주적 야당과 시민사회를 상대로 독재정치를 강행하거나 민주혁명을 자초한 끝에 국민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난 경우를 들 수 있다. 또 개발도상국 가운데 경제발전과 함께 급속한 민주화의 진전으로 축적된 시민의 민주의식이 민주화 요구로 폭발되어 총구권력 정권을 침몰시킨 경우다.
이와같은 총칼흥망론과 총구 권력론의 실태를 역대 정권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를 든다면 한반도 남북정권을 들 수 있을것 같다.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김씨조선 백두왕조는 총구권력론을 남한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은 총칼흥망론의 교과서다.
북한 김일성 정권은 정권 2인자였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을 미군 간첩으로 몰아 처단하고 1956~58년에는 정권 도전세력 김두봉,김원봉,최창익,김도만 등 연안파와 소련파를 종파분자로 낙인 찍어 숙청하였다. 이어 1967년에는 박금철,이효순 등 빨치산 혁명동지 갑산파를 제거하는 총구 살육으로 권좌를 1인지배체제로 강화하여 아들인 김정일에게 실권을 물려준 뒤 천수를 누리다 1994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심화조 사건,화폐개혁 실패 관련 박남기 처형 등 총구 공포정치로 백두혈통 유일 영도체계 왕정국가체제를 공고히 하였다.재임중 후계체제를 확립해 놓은 상태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집권17년만인 2011년 12월17일 급병으로 사망했다.
대다수 대북 전문가와 당시 이명박정을 비롯하여 미국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 유고시 내부 반란 등 급변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하고 북한지역 점령 김칫국 한미연합작전 5029계획을 마련하는 등 호들갑을 떨었으나 김씨왕조 총구정권이 붕괴되는 이변은 발생하지 않았다.
경험부족,권력기반 약화등 우려에도 불구하고 28세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겸 국방위 제1부위원장은 권력을 이상없이 세습하여 불과 2년만에 아버지를 능가하는 1인지배 유일영도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김씨조선 백두왕조 제 3대 제왕으로 등극한 김정은 제 1비서는 이영호,우동칙 등 공신 퇴출,총참모장,인민무력부장,총 정치국장 등 군 수뇌부를 몇개월 단위로 수시 교체하고 장성급 파격승진,파격 강등 등 좌충우돌식 혼빼기 인사와 외화벌이 사업을 박탈했다 돌려 주는 채찍과 당근 작전으로 단기간에 군을 힘 못쓰는 식물군대로 만들어 도전의지를 꺾어 버리는 등 충견 집단으로 만들었다.
군을 완전하게 장악한 김정은 제1비서는 마침내 자신의 권력세습과 안정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후견인인 고모부 장성택을 만고역적으로 몰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가족의 일원으로 살아있는 고모의 남편인 아버지뻘의 고모부이자 후견인을 인격살인적 모욕적 언사를 총동원하여 명예를 유린하고 기관총과 화염방사기 또는 120여 마리의 사냥개로 생물학적 목숨을 난도질하여 잔학무도하게 처형함으로써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단숨에 뛰어 넘는 숙청극의 신기원을 열었다.
이와같은 북한 김씨조선 백두왕정의 무시무시한 총구권력론에 비교되는 남한의 이승만,박정희,박근혜정권은 총구흥망론의 역사이자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점령군 미군정의 간택을 받아 대한민국 신정부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반민족친일파인 일본군과 일본 순사 출신들을 대거 중용하여 총구를 앞세운 반공정권을 표방하였다.
해방공간에서 형성된 좌우 이념대결은 이승만정권의 제주 4.3사태,여순 육군 제14연대 좌익반란 무력진압,군대 좌익군인 숙청,조봉암 진보당 당수 사형 집행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처럼 총구에 바탕한 이승만 반공독재 정권도 3.15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다 자초한 대학생 중심의 4.19혁명을 무력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국민적 힘에 밀려 이승만은 하와이로 자진 유배를 떠나는 것으로 종말을 고했다.
불법 군사반란으로 장면 민주정부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도 총구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형집행을 신호로 공포정치의 서막을 열었다.중정 등 공안기관과 군을 동원한 유신독재 공포정치 기간동안 수 많은 민주인사들이 긴급조치의 제물로 희생당했다.
장성택처럼 사형판결 다음날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혁당 사건을 비롯 정권 안보용 조작된 용공사건으로 고문 당하고 옥살이를 한 억울한 희생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최종길 교수 중정 고문치사,김대중 납치고문,장준하 의문사 사건,부마항쟁 공수특전단 총구진압 등 총구에 의지해 유지되던 유신독재 정권은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구앞에 끝장을 고하고 말았다.
인민과 국민의 힘에 좌우 될 김정은의 총구권력 박근혜의 총구흥망론의 미래상 육사육군대장 출신 4인방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앞세운 공안통치로 유신독재 시절로 회귀한다는 비판을 받고있는 박근혜 정권의 운명도 부친 박정희 유신정권의 닮은꼴이 되지 않을까 관심거리다.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1년 가까이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준 지난 대선이 국정원,국방부,보훈처,안행부 등 국가기관을 동원한 이명박정권의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기획한 헌정유린 국기문란 불법부정 관권선거로 치러졌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 나면서 거센 저항에 부딪친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은 불법 대선공작이 이명박정권과 자신의 대선캠프가 저지른 민주헌정유린 범죄임을 잘 알면서도 전임 정권때 일로 도움받은게 없어 책임질게 없다고 항변한다.후안무치한 모르쇠,오리발 꼼수로도 모자라 조중동문과 종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