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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체감하지 못하는 사이에 천천히 길들여진다. 정치 권력의 좌표와 그 향배에 따라 어느 순간 우리의 삶 전체가 규정되기도 한다. 바로 여기서 시민 저항권이 요구된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내일 맞는 시대적 모습은 지금보다 더 처참한 노예적 삶을 강요 받기에 그렇다.
민주주의를 꽃피운 영국 속담에서조차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길들여질 것인가? 아니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 그것은 사악한 세상을 뒤집어 엎을 때, 보다 인간적 품위를 갖출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물론이거니와, 후대의 인간적 삶을 위해서도 그렇게 길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온갖 악한 기운과 그러한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들에게 분연히 맞서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주권재민, 바로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다. 이러한 천부인권을 강탈 당해서는 안된다. 소중히 그리고 굳건히 지키고 살려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거기 주인된 삶이 있다. 주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노예로 살 것인가? 그것은 순전히 오늘을 사는 이들의 확고한 의지와 견고한 연대를 통한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
최근 인구 사이에 해괴한 말이 회자되고 있다. 즉,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고맙게 여기라"라는 '법륜' 스님의 세밑 덕담이 그것이다. 이런 류의 자기 비하를 부르는 허무 개그를 무슨 대단한 경구라도 되는 듯 인용하는 촌극까지 빚고 있다.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다수 국민의 생살을 도려낸 대가로 재벌 배 채우기에 바쁜 위정자들이 즐겨 차용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탈자의 사악한 범죄를 정당화시키는 아주 간교한 술책이기도 하다. 차마 죽지 못해 연명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치명적 결핍에서 연유하거나 또는 의도된 여론 호도에 불과하다.
그러는 사이 민중은 그러한 허망한 논리에 매몰돼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아울러 변화에 대해 무디어지고 또 체념하게 된다. 따라서 언어 유희 뒷끝에 오는 공허함은 또 다른 수탈일 뿐이다.
새해 첫 날, 부정 선거와 박근혜 정권의 독선에 공분을 금치 못하던 40대 초반의 남성이 분신했다. 오장이 끊길듯 우리 사회 전반을 통곡케 하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남종 열사에 대한 시각 또한 같은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스스로의 몸을 산화하며 시대적 악마성에 항거한 그의 죽음을 놓고 교활하게 폄훼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어서다.
그래서는 아니될 말이다. 그가 죽음을 결행하기까지 있었을 갈등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을 던져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망자의 죽음을 유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경계인은 권력과 금력을 탐하는 마귀들 주변에도 차고 넘친다. 우리가 피차 죽을 용기는 없을지라도 그의 의협심을 물타기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차마 죽을 용기가 없어 살아 남은 자로서, 우리는 그에게 공히 빚진 처지에 있다. 아울러 그의 몫까지 더 가열차게 싸워야 할 책무만 남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성태 : 시인 /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