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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대선에서 국민과 시대가 요구한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먹고살기 힘드니 국가운영의 방향을 바꿔달라는 요구 아니었을까. 그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라는 두 개의 화두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란 시장과 경쟁에 모든 걸 맡겨놓지 말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입하고 규제해서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요구이고, 복지국가란 출산, 보육, 교육, 취업, 주거, 건강, 노후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국민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역할을 해달라는 요구이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두가지 시대적 요구를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국민이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선 1년이 지난 오늘 기대는 모두 빗나간 것이 되고 말았다. 경제민주화는 끝난 것이라고 박 대통령이 말했고 복지국가 역시 재정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한 상태다.
이번 철도파업 사태는 경제민주화 약속 파기와 철 지난 대처리즘의 연장선에 있다. 길은 물과 공기처럼 사기업의 이윤 추구의 대상이 돼서는 곤란하다. 국민의 세금으로 놓은 도로와 철도를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 넘겨 돈벌이를 시키는 것은 합법의 이름아래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만인이 마음놓고 이용할 수 있어야하는 공공재 본연의 성질과 어긋난다. 길, 물, 공기같이 국민의 삶의 질을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공공재는 국가가 책임있게 관리하고 공급하는 것이 맞다.
물을 외국기업에 팔았다가 비극적 결과를 초래한 사례가 있다. 2000년 남미의 볼리비아 정부는 코차밤바라는 도시의 상하수도 운영권을 미국 기업 벡텔에 팔았다. 물 값은 몇 배로 뛰었다. 한 달 생활비 7만원 정도인 시민들에게 수도요금이 2만원이나 나왔다. 시민들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지붕 위에 양철통을 올려놓고 빗물을 받고 강물을 퍼다 먹었다. 수돗물이 안 팔리자 벡텔사는 볼리비아 정부에 항의했고 경찰이 집집마다 다니며 양철통을 부숴 버렸다. 공동우물과 강물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분노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폭동으로 번졌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벡텔사는 쫓겨났다. 그 뒤 벡텔은 FTA의 ISD(투자자의 국가상대 소송제도)조항을 들어 볼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박 대통령은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엄단하겠다면서 민영화가 아닌데도 왜 못 믿느냐고 했다. 정말로 민영화를 할 생각이 없다면 국회에서 철도 민영화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자고 요구하니 이번에는 한미 FTA에 위반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결과적으로 민영화를 시인한 꼴이 됐다. 한미 FTA는 한번 자유화 민영화한 사업은 다시는 뒤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역진 방지조항을 채택하고 있다. 2011년 겨울 수많은 국민들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FTA의 후과를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1979년 대처 집권후 줄기차게 가스, 수도, 전기 등 공공부문을 민영화를 밀어부쳐오던 영국은 마침내 1994년 철도를 민영화했다. 요금이 폭등했고 결과는 재앙이었다. 서울-부산 KTX 요금이 5만원 대인데, 같은 거리 런던-리버풀 구간은 20만원 대이다. 열차 탈선과 인명사고가 해마다 되풀이 돼 일어났다. 영국은 다시 철도를 재국유화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영국은 되돌리기라도 할 수 있지만 한국은 한미 FTA때문에 되돌아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해 힘으로 철도노조를 진압하려는 박 대통령에게서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의 모습이 엿보인다. 1984년 영국의 광산노조 파업을 경찰력으로 진압하고 복지 삭감과 기간산업에 대한 민영화를 밀어부쳐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레이건과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의 원조 노릇을 했던 대처는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빈부 격차를 극대화시킨 실패한 지도자로 곤두박질쳤다. 박 대통령이 대처를 따라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낭떠러지를 향해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평온하던 일요일 오전 서울 정동 도심이 갑자기 전쟁터로 변했다. 5천 명의 경찰 병력이 민노총이 입주해 있는 정동 경향신문 주변을 포위했다.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찰의 민노총 강제 진입 장면은 34년 전 YH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79년 8월 YH 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던 마포 신민당사에 경찰 병력이 난입한 사건은 두 달 반 뒤 유신 독재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철도파업은 힘이 아니라 얼마든지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잠자고 있는 노사정위원회는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갈등 해결이 본업인 국회가 움직여야 한다. 국회는 철도문제를 포함해 공공부문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범국민적 토론의 장을 제공해야 한다.
나는 KTX를 즐겨 탄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계절별 풍광이 좋고,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보거나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좋아서다. 철도를 민영화해서 영국처럼 사고가 빈발하거나 요금이 세 배 네 배로 오른다면 지금처럼 KTX를 편한 마음으로 탈 수 없을 것 같다.
<정 동 영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