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과제로 제안하며..
로마를 무너뜨린 훈(한)족은 고구려고, 아틸라는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은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를 포함하여 375~412년(38살)이고 아틸라는 출생일은 알 수가 없고 사망년도는 453년이다. 같은 생존시기인 아틸라와 광개토태왕은 동일인물로 상정하면 375년도에 태어난 광개토태왕은 서방에서 78살에 해당하는 453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435~439년의 아틸라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이 유럽에 출현하기 전까지 먼나 먼 유라시아 초원의 행로때문이 아니였을까? 그리고 아틸라와 형 블레다(불내다=불을 지르다/해와 관련한 이름=해씨 성을 붙이면 해 불내다)가 이어 받은 한고구려(한고리=헝가리)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 났다.광개토태왕은 자신의 형과 함께 고구려를 떠났던 것인가?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대왕은 98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장수왕이라는 불리게 된다. 장수왕이 100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은 아버지 광개토태왕이 장수하는 DNA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출생년도 불분명한 아틸라가 동방에서 이주해 온 광개태왕이라는 추정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게 되며, 아틸라가 로마궁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우리 한국에 열등감을 느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우월시하고 서이.동호.동이.남한 등의 표현으로 주변 한국민족을 비하한 기록과 동일한 방법으로 아탈라에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아틸라는 로마교육을 받은 유럽인이였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로마인들이나 유럽인들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1.광개토태왕의 이름은 안安(알:해)이다
땅을 크게 평정하고 평안케 한다는 <광개토경평安=호태왕>은 순우리말로 사방의 땅을 비추는 해라는 의미의 '아(알:해) 달(단:땅) 라(평정)=아틸라'가 된다.
"광개토경호태황은 큰 공적과 성스러운 덕이 세상 어떤 임금보다 뛰어 났다.그래서 사해 안에서 모두 열제라 불렀다. 18세에 광명전(양심전/하느님전)에서 등극하실 때 예로써 천악을 연주했다."[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
유럽인들이 유럽사에서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드라큘라로 비하할 정도로 최고의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인물이 코리아족인 징기즈칸 이전에는 아틸라다. 아틸라는 최고의 왕이지만 "왕의 권위를 내세우며 군림하지 않아 왕같지 않았으며, 전투에서는 용맹했고 협상의 귀재였다."고 로마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거란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을 구해낼 만큼 애민적이였고, 인자하면서도 항복한 적국 백제의 아신왕에게도 관대했던 우리의 코리아태왕의 기질과 품성과 똑같이 닮아 있다. 정말 유럽을 떨게 했던 아틸라는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였던가?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광개토의 이름을 '담덕(談德)'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게 광개토태왕의 이름을 <안>이라고 적혀 있다.
"(동진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385)에 고구려가 요동·현도의 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가 그의 아우 모용농(慕容農)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 두 군(郡)을 다시 회복하였다.모용수가 죽자 아들인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安=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遼東)·대방(帶方) 2국의 왕으로 봉하였으며,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요동군을 빼앗아 차지하였다(後略有遼東郡)." - 양서(梁書)』권54 고구려전과 『북사(北史)』권94 고려전(高麗傳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 廣開土境平安 好太王)'이라고 비석은 적고 있다.비록 시호이지만 이 시호 속에 광개토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국강상은 무덤 지역. 광개토경평은 땅을 크게 넓히고 경계를 정하여 평정했다.안(安)은 이름. 호태왕은 고구려 태왕 중에서도 제일 높은 태왕이란 뜻이다.(호태왕이란건 왕 중의 왕이라는란 의미)
담덕보다는 안(安)이 태왕비같은 고구려의 금석비문에서 자주 쓰이고 그리고 중국사료같은 대외적 사료에서도 광개토의 이름은 안安이라 나오므로 안安이 더 직접적 이름이라 보고 역사추적를 해 보자.
2.고구려의 최대 굴욕-모용선비(연)에 털리다/모용선비의 고구려공격은 멸망의 근원이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써 고국원왕 시기인 서기 4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방어전술이 빗나가는 바람에 수도가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 전연前燕에게 국내성까지 털리고 5만 인구가 포로로 끌려 갔는데, 고구려 고국원왕의 태후와 고국원왕의 왕비도 볼모로 끌려 갔다.(전연前燕은 후연後燕 이전의 모용씨 선비족의 나라다)
남당 박창화의 '고구려 사초'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이련이 이 당시 모용씨에게로 인질로 끌려 갔엇다가 후에 풀려 났다는 내용과 모용씨에게로 끌려 간 왕비의 아들이 고이련이라는 기록이 있다.
"제(帝:고국양왕)는 이름이 이련, 또는 어지지이고 수림의 동복 아우이다. 해 태후가 꿈에 용산龍山에 올라 추모가 용을 타고 상천하는 모습을 보고파 하였더니 홀연 큰 나비가 나타나서 육족오六足烏로 변하였었고, 적(=모용황으로 추정)이 해 태후의 승은을 입고 나서 생겼다. 이에 점을 보는 이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더니 주 태후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이 아이(이련)는 추모가 현신한 것이라고 하였었다. 모용황 도적의 난리 중에 제(帝:고국양왕)는 해 태후를 따라서 연燕으로 끌려 갔었다. 모용황은 해 태후의 궁으로 올 때마다 제帝는 높이 겼으나 후는 경시하면서 말하길 "당신은 이 아이로 인하여 귀하게 될 것이오"라 하였으며 <연나라>의 다른 사람들은 모용황에게 제(帝:이련)를 해치우라고 하였으나 "천명은 억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어찌 하려다 보면 도리어 재앙이 오는 법이오."라 말하더니만 오래 있지 않아서 돌려 보냈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서기 342년 봄 정원에 해씨가 왕자 이련을 낳았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서기 342년 모용황은 (고구려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주 태후를 포로로 사로잡은 후) 주 태후의 조서로써 아군과 백성들이 막아서지못하게 하였다. 상 또한 잡혀 있는 모친이신 주 태후와 여러 후들 및 왕자들의 안위 때문에 감히 추격할 수도 없었고 이리하여 적들은 아무 탈 없이 돌아 갔다."-남당 박창화 고구려 사초
3.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찰갑과 활(맥궁)로 무장한 아탈라인가?해는 동방에서 떠서 서방으로 지니,나는 서방에서 죽을 것이다?
광개토태왕이 사망했다는 서기 413년으로부터 21년 후인 서기 434년에 동유럽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아틸라. 물론 그 전부터 태어나 그 땅에 살고 있다고 전승들이 말하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아틸라에 대한 건 적국에서 적은 기록들만 있는지라 명확치 않은 부분이 많다.
그런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후 삽시간에 빠르게 영토를 확장시켜 간다.
아틸라가 동유럽을 초토화하고, 독일 정복하고 로마본토까지 진격하여 로마황제가 보낸 특사인 로마교황을 통하여 로마황제의 항복을 받아 낸다. 로마황제의 항복을 받고 조공을 받고 미련없이 쿨하게 돌아 가는 모습이나, 로마에 다다르기까지 수십개가 넘는 성들을 빠르게 돌파하며 무너 뜨리는 건 마치 백제 58개성을 점령하고 백제 도성을 포위한 후 백제 아신왕의 항복만 받아 내고 백제를 멸망 안 시키고 쿨하게 돌아 가는 광개토태왕의 위용과 매우 비슷하다.
훈족은 고구려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畵)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 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나온,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과 똑 같다.
[아틸라와 로마 전투자료]450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 Theodosius>가 죽고, 새로운 황제 마시안(Marcian)이 등극했다.새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마시안(Marcian)은 지금까지 훈족에게 매년 바치든 조공을 거절했다.화가 난 아틸라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의 서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451년 4월 30만명으로 추정되는 아틸라(Attila) 대군은 현재의 독일과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수많은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서유럽의 중심부를 초토화 시켜 버렸다.
452년 다시 서로마 제국을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 반도로 직접 쳐들어 갔다.아틸라는 아퀼레이아( Aquileia )점령을 시작으로 파두아 ( Padua ), 베로네 ( Verona ), 밀란 ( Milan ), 피비 등 이탈리아 북부 전역을 휩쓸었다. 훈족을 피해 정착한 난민들이 건설한 도시가 오늘날 이탈리아 베네치아이다.
이탈리아 북쪽 지역을 완전히 파괴당한 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는 로마 카토릭 교회의 교황인 레오(Leo)를 특사로 보내어 아틸라와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협상의 조건은 아틸라의 군대가 이탈리아의 침공을 중지하는 조건으로 서로마 제국에서는 엄청난 보물(황금)을 아틸라에게 받치는 것이었다.
협상이 성공하여 아틸라 군대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교황 레오(Leo)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부터 대제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다.
452년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초토화하여 약탈한 보물들과 서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황금을 챙겨들고 아틸라 군대는 자신들의 근거지인 헝거리의 부다페스트로 돌아 왔다.
453년 아틸라는 게르만족 제후의 딸인 <일디코- Ildico>와 결혼을 했는데, 아틸라는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 됐다.
아틸라의 무덤은 테이스(Theiss - Tisza ) 강을 막아 물길을 돌린 후에 강바닥에 무덤을 만들고 강물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두었기 때문에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이 강은 유럽의 우크라이나 ( Ukraine )에서 출발하여 루마니아,(Romania), 헝가리(Hungary), 슬로바키나(Slovakia), 세르비아(Serbia)를 지나가는 강이다.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인 <덴기지크 : Dengizich >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구심점을 잃은 훈제국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들어 갔다.
454년로마의 실권을 쥐고 있던 <아에티우스>가 로마의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에게 살해되었다.
455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 - Valentinianus >가 자신의 군사들이 활쏘기 시합을 참관하고 있던 중에 훈족의 장수 2명에 의해 살해 되었다.
469년 훈족은 동로마 제국과 합세한 게르만 민족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뒤 역사에서 사라 졌다.
476년 게르만 민족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 훈족이 유럽을 지배한 시기는 아달라 광개토태왕이 생존한 시기에서 사망한 469년 까지였다.[끝]
결국 동방에서 유럽지역에 갑자가 출현하여 게르만족을 로마로 밀어 넣은 게르만족에 의해 로마가 멸망했으니 결국 한-고구려(한고리=헝가리)가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 없었다.
유럽의 그림들에서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아틸라의 모습. 머리에 소뿔 장식을 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이것은 4~5세기 고구려 개마무사의 투구에 달았던 소뿔 장식과 똑같기 때문이다. 이는 배달국 황권에 도전한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의 10년간 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대륙을 차지한 배달국의 치우천왕이 소뿔투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틸라와 광개토왕의 이름 '안(安)' 이 둘은 과연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결론 : 광개토 태왕 = 아틸라 대왕
<깨끗히 땅을 평정하다.땅을 크게 넓히다>의 의미를 가진 광개토는 고대의 우리말로 아달라가 되는 것이며, 이는 광개토태왕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전에 동방을 깨끗히 평정하고 광개토 호태왕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에 아틸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할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태왕비에서는 광개토(廣開土:크게 땅을 넓히다)라고 적혀 있고, <사방을 깨끗히 청소>하고 싶다는 포부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광개토경평안 호태왕의 고대 우리말 이름이 바로 '아달라'(아틸라)였던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 모용선비에 흡수된 흉노족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고구려에 패한 일부 흉노기마군이 동해안을 따라 경주로 유입하여 박혁거세 사로왕조를 무너뜨리고 흉노선비왕조를 탄생시켰고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한 신라 진흥왕 시기에 광개토왕의 이름 아달라를 따와 서기 2세기경 자신들의 가상 선조인 아달라이사금을 만들어 신라부흥의 에너지로 삼았다고 추정된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올라 제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정도로 하나님 신앙이 강했던 '아달라'는 18세의 나이에 광명전(양심전/하나님전)에서 고구려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올라 모용선비와 백제의 공격으로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운 고구려를 안정시키고, 고구려 전통적인 찰갑기마군을 조직적으로 강화하여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낸다. 하지만 광개토태왕은 쿨하게 고구려로 돌아 가서 백제에게 자비를 베푼다.
백제의 지원세력인 왜가 백제와 야합하여 고구려의 지원세력인 신라를 침략하여 신라 수도를 함락시키자 5만 보기병을 보내 같은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대마도)에 임나연정을 설치하고 고구려인인 안라인으로 총독을 삼고 열도를 통제관리하였다.
후연 왕 모용희가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자, 모용선비 정벌을 철저히 준비했던 광개토태왕 아달라는 거란.말갈을 동원하여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사방으로 포위하여 모조리 분쇄하고 북경일대인 유주지역까지 공격하여 고구려 땅으로 만들고 연나라의 수도인 용성을 포위하여 쳐서 후연 개갑 중장기병 1만여명을 깡그리 다 죽여 버려 고구려 침공과 약탈의 죄를 물었다. 그러나 후연은 멸망시키거나 고구려 땅으로 만들지 않고 고구려 유민 고운(모용운)에게 후연을 도로 주고 본국으로 돌아 온다. 고구려에 반항하며 시비를 계속 거는 동부여도 모조리 복속시켜 고구려의 평화를 이루어 낸다.
만주를 중심으로 한반도와 초원,그리고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제 어떠한 나라도 고구려를 대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의 고구려였다.
더 이상 왕위에 있을 필요를 못느낀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아들인 장수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면서 자신의 업적과 유언을 담긴 비문을 세우고, 가짜 왕릉(태왕릉)까지 만들어 한반도(한인-예인)인들에게 무덤을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고, 고구려의 기상을 1만년이 넘어도 세계 최대의 자연석비문을 보면서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알릴 것을 명한 후에 유라시아 최강의 찰갑 기마군을 거느리고 유라시아 초원을 따라 서쪽으로 나갔다. 몽골의 징기즈칸처럼.
더 이상 고구려의 적이 사라진 광개토태왕은 해가 뜨는 동방에서 숨을 거두기 보다는 해가 지는 서방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또한 서방 최강의 제국이라는 로마와 맞짱을 뜨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리고 충분히 고구려는 로마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등자가 없고 무거운 철갑을 두루고 있었기 때문에 유연성이 약했던 로마기마군에 비하면 자유롭게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등자가 있고 가볍고 방어성이 강하고 싸울 때도 유연성이 강한 찰갑옷을 입은 고구려 기마군은 그야말로 동서방을 통하여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서진은 그래서 가벼웠고 여행을 하는 기분이였다. 고구려의 기마군도 동방을 제패한 자랑스러운 아달라 광개토태왕을 따르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성덕이 세상 어느 왕보다도 높아 유라시아 모든 나라에서 열제로 칭송받은 광개토태왕을 추앙한 많은 초원집단이 뒤를 따랐고 대적할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무적강군으로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 버리면서 로마제국의 북쪽까지 이주해 왔다. 아달라 광개토태왕은 자신들의 뿌리를 분명히 하기 위해 한-고리라 칭하고 기록하도록 했다. <한>은 해민족의 뿌리인 한땅(서남해 중심의 한반도)을 의미하고, 고리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훈족이 세운 유럽의 헝가리의 어원이 그래서 <한-고리>다.
고구려가 유럽에서는 무쿠리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명성을 일찌기 듣고 있었기에 차마 아달라에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제발 물러나 주기만을 빌었다.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이름 아달라를 계속 쓰며 '아틸라'로 로마인들에게 불리며 크게 명성을 떨쳤다.
동로마군의 연합공격도 다 물리치고 로마로까지 향하며 가로 막는 수십개의 성들을 쾌속으로 돌파하여 점령해 버리고 로마에 당도하니 로마교황이 떨며 항복한다. 그러자 로마교황 항복만 받고 쿨하게 돌아 가는 아달라의 모습은 고구려의 상징인 불새문양은 십자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을 비인간적으로 무참히 살육하는 악랄한 로마의 죄를 묻고 그냥 돌아 가는 시원한 모습이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아달라의 아들 장수대왕이 아버지 아달라의 이름의 뜻이 서방까지 '크게 땅을 넓히다'이므로 그 뜻에 맞게 '광개토 태왕'라는 시호와 동서방을 모두 평정하여 평안케 한다는 의미로 '영락'이란 연호를 추증하며 최고로 예우하게 한다.
그리고 광개토태왕이 평소 사방을 불의로부터 평정하고 공의로 영화롭고 즐거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재위 때부터 재위 끝까지 계속 사용해 온 '영락(永樂)'이란 연호라고 추측된다. 재위 시 그를 영락대왕이라 불렀다는 것도 그런 추정에 좀 더 무게를 실어 준다.
한편 아틸라가 동유럽에서 78세에 죽은 후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바르 제국(유연)이 고구려의 서북 지역의 본거지를 떠나 광개토태왕이 평정했던 동유럽으로 쳐들어 와 아틸라의 의지를 이어받아 대제국을 이룬다. 아바르 제국의 시조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쿠리(맥고려)' 즉 고구려라는 뜻이었다.돌궐은 돌궐비문에서 고구려를 무쿠리라고 불렀다. 유연의 시조는 고구려인이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로마를 제일 많이 괴롭혔던 부족이 있는데 그 부족이 바로 고구려의 한부족인 “연연족(??族=유연柔然)즉 아바르족(the Avars)”이고, 그들은 ‘아바르 제국’을 건설하여 게르만 민족의 한 종족인 서양역사에 많이 나오는 롬바르드족(the Lombards)의 요청으로 힘을 합해 게피드족(Gepedes)을 물리치고 전리품의 반과 영토 반을 요구하여 성공한다.뿐만 아니라 6세기경에는 비잔틴 제국에서 조공을 받아가며 도와주기도 하였다.우리민족의 일부 고구려 부족인‘아바르족’이 로마 콘스탄티네 황제와 협상을 하고 도와주며 ‘가칸(可汗)’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키는 것이 역사에 보인다
고구려인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돌궐족과 함께 서진하여 오스만투르크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을 지배하였고, 대진국 멸망 이후에는 몽골초원으로 이주하여 제일 강성한 케레이(고려/겨레)족을 형성하여 예수게이를 잃은 코리아(고려)족 징기즈칸을 양아들로 삼아 몽골초원을 통합하고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유럽정벌에 참여하여 유럽지역에 많은 왕조를 세우기도 했다. 그 영광된 고구려의 이름은 오늘날 한류의 세계화를 실현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제적 국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