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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생 주현우씨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마른 풀섶에 불씨를 붙인 격이 된 듯,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 JTBC 의 조사에 따르면 53%가 이 현상에 공감했으며, 이 현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은 23.7%, 그리고 23.3%는 이 현상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터넷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다시 재구성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발라드 형식의 노래로도 이 현상을 노래하는 젊은이들이 있었고, 일단의 젊은이들은 지금의 이 현상에 랩을 입혀 인터넷에 뿌려 이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재수를 거쳐 88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던 제게 익숙했던 어떤 시위의 문화가 축제로서, 그리고 새로운 문화의 형태로서 변형한 것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2008년의 촛불시위였습니다. 탄압이 극심했기에 저항도 극렬한 형태였지만, 그때 우리는 '저들'과 맞서 싸우면서 결국 우리도 그들처럼 괴물로 변해 버리는 것을 그 당시엔 몰랐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자랐던 세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저항은 축제였고, 저항은 개인적인 각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때의 '운동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대중연대, 강철대오를 구성하며 조직의 규율과 조직의 품성을 강조했던 우리 세대에게 보기 힘든 어떤 것, 연약해 보이지만 강한 무엇이 있었습니다. 2008년의 촛불은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하며 자란 세대의 역동성이 엿보였지만 그것은 이명박 정권의 탄압 앞에 사그라드는 듯 했습니다.
그 이명박 시대 5년이 가고, 다시 그 밥에 그 나물들, 아니, 이명박보다도 더한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태생부터 거짓과 술수, 조작과 탈법이 어우러져 탄생한 정권은 자기들의 그 '탄생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온갖 탄압과 조작과 거짓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결국 이명박 시절 사그라들 줄 알았던 촛불들이 다시 일어나게 됐습니다. 상식이 완전히 거세되고 몰상식이 자리잡힐 찰나였습니다. 국가의 중요한 공공재인 철도를 지키고자 파업이란 수단을 택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은 직위해제되고 검거령이 떨어지고, 자기 머리위로 칠십육만오천볼트의 고압선이 지나가는 것을 막으려던 힘없는 할아버지는 결국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고, 자기가 해야 할 직무에 충실했던 검사들은 찍어내기로 인해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결국 이 정권의 몰상식은 마른 풀섶에 불을 붙인 격이 됐습니다. 그러나,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이 새로운 민주주의적으로 각성해 있는 젊은 세대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면서 또한 사회의 구성원임을 참으로 극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내 세대와는 다른 소통 수단들이 있고, 그것을 파급시키고 확산시키는 방식도 테크널러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들을 보면서 마음 한편으로 짠한 무엇을 느끼면서도 또 고맙게 느끼고 든든하게 느끼는 것은, 그들은 원래 '민주주의를 누렸던'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처럼 민주주의를 쟁취하려 했던 세대가 아니라 바로 이들은 원래부터 민주주의를 누렸던 세대였기 때문에 바로 '각성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그 개인들의 연대로서' 거리에 나서서 그들이 안녕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 그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발현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대는 '단결 투쟁' 해야 했지만, 이젠 '개인으로서 연대 투쟁'하는 젊은 사람들이 드디어 각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저항 방식은 우리 세대가 해 왔던 것과는 참으로 많이 다른 모습이지만, 그렇기에 더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걷잡을 수 없는 들불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단결 투쟁' 해야 했던 우리 세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아마 우리는 새 세대들이 누르는 이 역사와 상식을 바로세우기 위해 누르는 지레의 지지점이 되어 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이미 우리는 이 젊은 세대들의 멘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원래 민주주의를 체득하며 자란 세대이고, 우린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찾아주긴 했는지 모르지만, 부끄럽게도 그걸 지켜주진 못했기에.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