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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하면 단순히 싸움 잘 하는 조선수군통제사 정도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한민족사를 빛낸 수 많은 임금들과 성웅들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에 기반하여 내부적으로는 양심을 침략하는 비양심과 싸우고 외부적으로는 독점을 위한 침략주의(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홍익인간정신이라는 점에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투철한 홍익인간정신을 가지고 홍익인간세상을 실현하겠다는 모든 사람들이 홍익인간이고 참한국인이라 할 수 있다.
홍익인간은 순리에 순응하기 때문에 거짓과 위선을 수단으로 삼는 인간탐욕이 건강에도 좋지 않을뿐더러 말로 또한 비참하여 결코 오래 가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이치법에 따라 모두가 이로운 세상만들기에 삶을 헌신하기 마련이다. 사람을 볼 줄 알았던 고향친구 유성룡의 천거로 47세라는 늦은 나이에 전라좌수사에 오른 이순신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홍익인간이라 할 수 있다.조선의 승리를 안겨준 이순신이라는 보석을 추천한 유성룡 또한 병조판서에서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당시 임진란으로 어려워진 조선을 구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이 유성룡과 이순신같은 인재들이 조선의 정치를 담당했다면 어찌 조선말 국권을 상실할 수 있었겠는가!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산업화에 힘써 조선의 자주국방을 실현하고 백성의 복지를 실현하여 근대화를 이루고자했던 다산 정약용같은 인재들이 조선의 정치를 이끌었어도 조선의 국권상실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변화를 두려워하고 자주주권적이지 못했던 수구기득권 세력은 결국 다산 정약용같은 인재들을 모함하여 유배를 보냄으로써 결국 조선의 국권상실이라는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유능한 인재들이 모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수록 그 나라와 민족이 발전할 수 없음을 당연하며, 기득권세력의 부패비리는 난무하여 결국 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치법에 따라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지금도 정치권은 유능한 인재들을 선거에 출마시킬 수 있는 공천권을 국민에게 부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정치꾼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고, 공천받을 자가 정당에 돈을 바치는 공천비리가 발생하고 새로운 인재들이 등용되지 않으며, 정치적인 원칙이나 소신도 없이 정치판에서 살아 남으려는 정치꾼들은 철새라는 이름으로 이 정당 저 정당을 옮겨 다니며 정치적 소신도 없이 정치판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불패신화의 전투내용이나 이순신의 인간적 모습은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이 되는 소설가 김훈의 [칼의 노래]을 참조하면 잘 이해되리라 보고, 불패신화를 이룩한 이순신의 리더쉽과 관련하여 이순신의 품성과 사람됨에 대해서 언급해 보기로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지나국을 지켜낸 한민족 성웅이 바로 이순신이다. 조총으로 무장하고 조선과 지나국을 정벌하고 유럽까지 지배하겠다던 야망을 가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하늘이 준비한 이순신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였다.이로 인해 일본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을 반대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마침내 권력을 장악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덤을 폭파시켜버리고 혼란한 정국을 정리하고 일본의 평화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고 한반도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에 의거하여 일본을 근대화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 추종세력은 조선말 다시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조선조정의 친일파들의 요구로 군대를 동원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하고,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한 청나라와의 전쟁을 벌여 승리하고 이완용 등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통하여 조선을 강제로 삼켜 버린 것이다. 국권을 상실 후에 일제에 가장 강력하게 항거한 호남지역을 3단계 작전으로 대토벌한 심리적 배경에도 임진란 때 이순신과 조선수군에게 패한 앙갚음도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국민적 사극으로 방영되었던 KBS'불멸의 이순신'홍보자료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불패신화는 이순신의 인성과 치밀하고 신중한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순신은 유성룡의 추천으로 뒤늦은 47세에 정읍현감(면장)에서 전라좌수사에 올랐다. 종6품에서 정3품으로 승진하니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대와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고향친구인 유성룡이 이순신을 추천한 이유는 이순신의 강직성과 원칙주의때문이였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어 체벌을 통해서 군율준수를 강화하고 책임을 다하게 했다. 이순신의 수군관리에서 군대란 군기가 엄해야 하고 자기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점이다.이순신은 임진란이전부터 실전같은 훈련과 거북선 제작 등 치밀한 준비를 했다.이순신에 대한 부하들의 존경심과 호남민중들의 협력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여기에서 원균의 시기와 질투가 시작되었고 결국 이순신을 모함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통하여 원균을 졸장부로 평가했던 것이다. 어른이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한 의식이 바로 졸장부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원균은 결국 선조의 명령을 위반한 죄로 통제사를 박탈당하자 통제사에 임명되어 강철같은 조선수군을 칠천량전투에서 궤멸시키고 겨우 살아 육지로 도망가서 사라져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군지휘관은 결국 승리여부로 평가된다.이순신은 12척가지고도 300여척을 격파시켰다.이순신은 7년간의 전쟁을 통하여 일본군에게 아들을 살해 당하고 위장병 등 심한 병들을 앓았다.그래도 이순신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전쟁을 끝까지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의 불패신화는 조선민중전체로 하여금 이순신에게 민심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조선을 떠나 민족의 영웅이요,조선민중의 희망이였다.조선을 통치하는 책임자로서 선조는 불안했다.이순신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였다. 임진란이 종결되면 제거시켜야만 할 대상에 불과했다.인물을 키우려는 조선 선조의 졸장부적인 의식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알고 있는 이순신 역시 심각하게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선조와 전쟁을 하느냐!아니면 명예롭게 죽느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순신은 선조와 전쟁을 한다면 동족과의 전쟁으로 수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잃을 수 있고 정치적 혼란을 감수해야만 했다.이순신은 결국 명예러운 죽음으로 조선의 안녕과 평화을 선택했다. 죽을 수 없는 노량해전에 갑옷을 벗고 일본군의 조총을 맞은 것은 그래서 숭고한 죽음이였다. 물론 일설에는 이순신은 노량해전 후 죽지 않고 대마도로 가서 후손을 남겼으며, 일본조정을 움직여 조선포로들을 송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 조선3도수군통제사 사령부(전남 고금도:충무사)-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잠시 안치된 곳이다.
이순신의 살신성인에는 국민과 민족의 통합정신이 들어 있다.이순신의 영혼은 선하였으며, 불의에는 분노하고 저항하였으며, 외침에는 목숨을 버렸다. 직위를 남용하여 백성을 못 살게 하지 않았고,벼슬을 나라사랑 백성사랑의 수단으로 삼았다. 신분을 구애받지 않고 유능한 인재들을 수군의 지휘관으로 발탁기용했다.배12척에도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나이다하며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승리했다. 병든 자신의 몸 돌보기보다는 약자들과 백성들을 우선 생각했다. 어린 일본군 포로을 불쌍히 여기며 글을 가르쳐 줄 정도로 인도주의가 투철했다. 이순신은 민족사에서 참 한국인이였다. 이순신은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고 전장터 상황 이해못하고 일본의 간계에 넘어간 선조와 조선조정과 싸워야 했다.
홍익인간 이순신의 정신은 나라사랑.백성사랑.침략주의를 거부하는 평화사랑.철저한 원칙주의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