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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늘이기 때문에 만민이 평등하다는 '인내천(사람이 하느님)' 사상은 최제우 개인의 독특한 사상이라기 보다는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온 한민족의 '경천애인'이라는 평등.평화사상에 불과하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삼키려던 상황에서 주체적인 민족이념이였고,사.농.공.상이라는 차별적인 조선의 지배구조하에서 조선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농민들이 가혹하게 수탈당하던 당시 상황에서 농민들에게는 양심적 지성인 최제우의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아래 사람없다"는 만민평등선언은 그야말로 복음이였다.그리고 사람보다는 자본의 주인이 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청군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무참히 학살탄압한 무능한 조선조정 존재(삶의 자리)가 의식을 규정하고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고 했다. 전북의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농민수탈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동안 썩어 빠진 조선의 지배층에 항거하여 그 동안 참아 왔던 분노가 봉기로 폭발했다. 이에 너무나도 무기력했던 조선조정은 농민들의 요구를 해결해주기보다는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기위해 결국 청나라군대와 일본군대를 끌여 들여 처참히 학살탄압하게 되고,결국 한반도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마침내 동학혁명군을 진압하고 조선을 강점하게 되는 것이다.동학농민혁명은 권력자체가 반민중적이면 백성은 봉기하게 되고,외세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적이면 결국 나라를 잃고 기층민중은 외세의 총칼에 죽임을 당하고 수탈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그리고 전봉준을 사형시킨 관리가 바로 고부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결과적으로 동학농민봉기를 부추긴 고부군수 조병갑이라는 사실이 엽기적이라 할 수 있다.
3.1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핀 정치인 여운형과 신한 청년당 정치인들에게는 통합적이고 거국적인 정치의식이 필요하다.지식인들에게는 주체적이고 합리적이고 통합적인 지성이 필요하다.그 대표적인 인물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라 할 수 있다.
약물로 살해당한 고종황제의 장례식날을 기일로 잡고 조선민중이 봉기한 거국적인 3.1만세운동이 표방한 국가적 이상은 '민주공화정'이였다.3.1운동이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좌우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민족정부와 민족국회를 구성하려했던 인물이 바로 합리적이고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몽양 여운형이다.여운형은 3.1만세운동의 불씨를 만든 인물은 몽양 여운형의 신한 청년당이다.신한청년당은 한국최초의 현대식 정당이다.신한청년당 당수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조선독립청원을 하였고,또 일본으로 청년들을 보내 3.1만세운동을 폭발시킨 2.8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일본심장부 동경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촉발시켰던 장본인이 여운형이다.신규식의 영향을 받아 일찌기 민족민주의식이 깨였던 여운형의 정치의식은 합리적이고 통합적이고 민중적이였다. 여운형은 8.15이후 인민위원회의 전국적 조직을 구성하여 자주적인 민족정부와 민족국회를 구성하려고 했으며, 혼란한 좌우세력의 충돌과 대립을 해소하기위해 좌우합작을 적극 주도하기도 하였다.그러나,이승만과 미국의 방해책동과 암살로 인하여 결국 남북한 지역에는 미국과 소련을 앞세운 이승만.김일성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당시 지나혁명의 진원지 상해에서 국제정치흐름을 인지하며 지나혁명을 주도한 지나지식인들과 교류하던 신규식의 제자로서 탁월한 국제정치흐름을 파악하고 대응할 줄 알았던 스케일이 큰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은 나라를 잃은 처지에 조선을 대표할만한 단체가 있을 리 없으므로 김규식을 조선대표로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창당한 당사자도 여운형이었다. 그리고 윌슨 미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의 연설회에 참석하고 그를 개별적으로 만나 조선인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당사자도 여운형이었다.
이 처럼 3.1운동의 막후 연출자가 사실상 여운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를 빼고 3.1운동의 발발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까 좀 추상적이고 거리가 먼 원인들만 이것저것 나열되어 왔던 것이다. 실제 여운형이 3.1운동의 막후 연출자였다는 사실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정부였다. 그 점은 수습책을 강구하던 하라 다카시(原敬) 일본수상이 그해 말 수많은 조선의 원로 지도자들 대신에 결과론적으로 당년 34세의 새파란 청년운동가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빙하였던 사실에 의해서 입증된다. 이는 우연한 선택이 아니라 조선총독부를 통해 3.1운동의 배후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 3.1운동 후 국내외의 운동가들이 그때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만주나 연해주로 가지 않고 일제히 여운형의 활동지였던 상해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그들이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당사자가 조선대표를 파리강화회의로 파견한 여운형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3.1만세운동이 일제에 의해 진압된 후에 조선의 항일운동가들이 상해로 모여 들었고,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합작하여 그들과 합세하여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 때 모든 수발을 든 것 또한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당원들이었다.그러나,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미국대리통치를 제창함으로 분열로 치달았고,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빠져 나갔다.이승만은 그래서 숭미파이고 독립운동사에서 분열의 주범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무기력하면 나라를 상실하고 기층민중은 고통과 수탈의 대상이 된다
국내에서의 3.1만세운동은 수 많은 조선민중들이 학살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이후 만주 등지로 이주한 조선의병들은 김원봉을 기점으로 항일무쟁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고 8.15직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한반도진공작전을 감행하려고 했었다.
나라가 유지되려면 외침방어를 위한 자주국방.자주주권적인 외교노선.고부가가치 과학기술.국민중심의 상향식 민주주의실현과 정치인들의 원칙과 약속이행,부정부패비리척결,국민복지실현,발전을 위한 개방성과 창조성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몽양 여운형같은 합리적이고 통합적이고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정치의식을 가진 정치인들이 필요하다.여운형을 절세의 애국자라고 극찬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가 바로 몽양 여운형의 정치노선을 따랐던 정치인이다.이성에 입각한 합리적이고 통합적이고 민족적이고 민중적이지 못한 정치의식을 가진 자들이 결국 정당의 분열은 물론이고, 국가운영을 해도 국민과 지역의 분열을 초래하고 민족통합을 가로막고 빈부차별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보도자료]MB정부 감세정책,서민은 늘고 부자는 감소
전갑길 민주당 광주시장 예비후보는 15일 MB정부의 감세정책으로 서민은 세금 부담이 늘어난 반면 부자는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전 예비후보는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2인이상 가구의 세 부담을 보면 소득 상위 20%인 구만 감소하고 나머지 80%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현 정부가 '강부자 정권'임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감세정책으로 전 계층의 세금부담이 골고루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거짓말로 드러났다"며 "중산층이나 서민은 쪼들리는 살림에 세금을 더 내고 부유층의 주머니는 상대적으로 더 두둑해졌다"고 밝혔다.
또 "결국 이같은 감세정책으로 세수가 줄면 서민층이 주 수혜자인 복지예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서민들은 세금을 더 내면서도 살기는 더욱 팍팍해지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 예비후보는 "현 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