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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 며칠 프레시안에 실린 ‘삼성을 생각한다’ 시리즈를 관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저자와 각도는 다양해도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삼성이 마음껏 분탕질을 하도록 멍석을 깔아준 주인공이 바로 노무현 정권이라는 지적이다.
이건희 씨가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고려대에 지어준 건물이 있다. 나는 그 건물을 ‘이건희 철학관’이라고 명명한 바가 있다. 이건희 철학관에 혹시 남는 방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로 사무실 옮기게. 철학관에는 모름지기 족집게 도사가 입주해야 하는 까닭에서다.
내가 얼마 전에 분명히 예언하지 않았던가?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는 조만간 노사모들 사이에서는 금서목록에 추가될 것이라고. 역시나 점괘는 적중했다. 삼성 사태와 관련해 프레시안에 반론이 올라왔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반박이 아니었다. 친노세력이 운영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반론을 제기한 당사자였다.
그는 삼성과 참여정부의 유착 사실을 증언하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를 거의 유언비어로 치부했나보다. 우리의 위대한 ‘노짱’님께서 삼성의 하수인일 리가 없다는 식으로 서술했단다. 미안하다. 나는 친노세력에서 운영한다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사람의 반론을 읽지 않았다. 읽을 필요도, 가치도 없었다. 신앙의 모순을 꼬집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은 없는 탓이다.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건희의 오른팔 이학수를 ‘학수 선배’라고 부르며 잘 따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임을 또다시 동어반복 격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이해하여주시라.
미안한 점은 또 있다. 친노세력의 입장을 대표해, 결과적으로는 삼성의 이익을 대변해 프레시안에 반박글을 올린 이는 지금은 인연이 끊겼지만 한동안 나와 절친하게 지냈던 분-선배-이기도 하다. 결례를 무릅쓰고 그 선배에게 면박을 주어야 하는 상황이 적지 않게 당황스럽기만 하다. 인간관계의 단절을 각오하고서 옛 직장동료들의 비리를 까발려야만 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심정이 지금의 내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반박글을 올린 그는 삼성이 결정하고 참여정부가 집행한 정책과 의제들을, 이를테면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의료 민영화와 소득 2만 불 따위를 누구보다 격렬하게 반대해야 어울릴 성향의 인물이었다. 최소한 흉금 없이 터놓고 지낼 때 내가 알고 있던 그는 그랬다. 무엇이 그를 180도 돌려서 보수화, 정확히는 수구화시킨 것일까?
영남! 아무리 머리를 흔들고 쥐어짜도 이 외에는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답안은 노동운동에 투신한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이학수를 선배라고 호칭하면서 잘 따른 일에도 적용돼야 하리라. 노무현에게 이학수는 부산‘상고’ 선배이기보다는 ‘부산’상고 선배였을 터이므로. 김용철 변호사가 노사모에서 파문을 당하는 최종적 사유는 아마도 그가 전라도 사람이여서일 게다. 설마 하는 일이 예사로 일어나는 곳이 다름 아닌 친노집단이다. 삼성도 물론이겠지만.
2. 같은 고향 사람 앞에만 서면 가치와 노선도, 정책과 이념도, 철학과 지향도 한없이 작아지기만 한다면 그건 지역주의의 견지에서 분석할 경우 좋은 말로 말하면 확신범이고, 나쁜 말로 표현하면 구제불능이다. 이제 우리가 고민할 내용은 저 도저한 구제불능의 확신범들을 건전하게 활용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를 가지지 않은 것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계자는 유시민 씨다. 민주당에는 노무현 정신이 없다는 유시민의 일갈은 백번을 들어도 옳은 소리다. 노무현 정신의 밑절미는 영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若無嶺南 是無國家(약무영남 시무국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안희정 씨나 이광재 씨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무현 가문의 적통이 결코 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므로 친노세력의 정통성은 영남인의 핏줄을 이어받은 유시민이 계승하는 게 자연스럽다. 어디 이재용이 삼성그룹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많아서 대통을 물려받았던가.
하여 유시민 씨에게 당부하련다. 그의 경기도지사 출마가 유의미한 결단이라는 평가를 받으려면 한나라당 소속의 후보자가 아닌 사람이 경기도청에 입성해야 한다. 한나라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로는 큰 이변이 없는 이상에는 김문수 씨가 선출될 전망이다. 그는 소설가 이문열 씨 못지않게 영남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드높은 인간이다. 그가 주변의 권유에도 아랑곳없이 김대중 대신 김영삼을 선택한 근본 원인도 호남 사람 밑에서는 머슴 노릇 하기 싫다는 이른바 영남남인, 또는 영남유림의 자존심이 발동한 때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사석에서는 호남인 아래서 머슴살이하는 자신의 답답한 처지를 자주 푸념했다고 한다. 유시민 씨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을 주제로 책까지 쓴 인사다. 그러기에 유시민 씨가 창당을 주도한 국민참여당의 강령에는 김대중에 관한 언급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유시민 씨가 경기도지사 선거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이참에 소개하고자 한다.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거다. 성격대로, 하고 싶은 대로, 네 멋대로 해라. 10년 넘게 억지로 참아온 국민의 정부 비판을 다시금 시작하라는 말씀이다.
유시민 씨는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DJ가 대통령에서 하야할 것을 촉구하기까지 하였다. 진보나 개혁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 중에서 김대중의 하야를 공개적으로 대놓고 외친 사람은 딱 둘이다. 장기표와 유시민. 장기표 씨는 후일 어느 인터뷰에서 자기는 김대중이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하야해야 마땅하다.”고 얘기했을 뿐이라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 인터뷰는 내가 딴지일보 편집국원 자격으로 배석했던 회견이었기에 현재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반면, 유시민 씨는 김대중의 하야를 요구한 일에 대해서 사과하거나 소신을 철회한 적이 내가 알기로는 없다. 정치적 관점에서 유시민은 노무현의 경호실장이기 이전에는 김대중의 저격수였다. 정형근-김용갑과 동종업계 종사자였던 셈이다.
유시민 씨가 호남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은 정동영 씨가 영남의 표심을 잡을 확률만큼이나 낮다. 정동영 씨가 영남인들의 수구냉전 근성에 아부하고 영합해 선거에서 이기느니 차라리 경상도 유권자들과 대립각을 세운 채 장렬히 전사했으면 좋겠다. 나는 호남의 지원을 얻지 못하는 정치인은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진보개혁 진영의 대표주자를 노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는 유시민 씨가 호남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척한 대가다.
호남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유시민 씨가 해야 할 일은 영남표를 갈라먹는 것이다. 유시민 씨는 심상정 씨나 이종걸 씨나 김진표 씨의 표를 뺏어올 궁리를 하지 말고 50퍼센트에 달한다는 김문수 씨의 지지율을 나눠먹는 데 치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따라서 유시민 씨는 10년 전으로 돌아가 과거처럼 김대중 저격수를 자임해야 옳다. 맘에도 없는 DJ 찬양으로 아무 기여 못하느니 화끈하게 김대중과 호남을 능멸함으로써 경기도의 영남 출신 유권자를 양분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테니까. 노무현 정신의 요체는 스타일이고, 그 스타일의 고갱이는 화끈함이기에. 유시민은 DJ를 화끈하게 능욕해 경기도의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효과적으로 분열시켜주시라. 그게 유시민에게 부여된 역사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