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를 실천한 이시대의 어른 법정스님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고 하시던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라는 화두를 던지고 입적하셨습니다. 이제는 무소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대답할 차례지만 이 사회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회의가 앞섭니다.
그 까닭은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그란 물수제비는 가장자리까지 퍼지지만 얕고 거친 물살에는 큰 돌을 던져도 순간 물만 튀길 뿐이다>는 자연의 진리가 말해줍니다. ‘도덕이 밥 먹여 주냐’라는 심리가 팽배한 이 사회는 얕고 좁고 거칩니다. 그래서 나는 법정 스님께서 냄비 같은 이 사회가 담지 못할 큰 화두를 던지셨다고 생각합니다.
상위포식자가 없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먹이사슬이 자본주의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가장 잘 반영한 이 제도는 그 본질이 ‘소유’며 소유의 대상은 ‘물질’ 또는 ‘권력’입니다. 소유의 크기는 곧 패권의 크기와 같아서 이 사회 구성원은 인생의 대부분을 ‘소유’에 바치고 있습니다. 동족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 사회의 '가나다‘는 ’먹이-안전-자아실현‘입니다. ’배 채우고-집 짓고-땅 넓히는 일이 최소한에 그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한결 평화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전쟁은 소유욕의 산물이듯 우리 사회의 소유욕도 위험 수위를 넘고 있습니다. 대부분 동의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무어라고 대답할까요. ‘무소유’를 말하는 글에서 언급하기 뭣하지만 결국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에서 그 대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자문자답이 되겠지만요.
정치권력은 역사상 ‘단 한명 사면’이라는 특혜로 자본권력에게 보은했고 이로써 특혜를 받은 재벌총수는 달랑 16억만 내고 거대 그룹을 아들에게 대물림했습니다. 이 사회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법도 신하이길 자임하며 수차례나 스스로 충성을 증명해 법의 이름으로 거사에 마침표를 찍어주었습니다.
생태계의 젖줄이며 인간 정서의 보고인, 개발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이 땅의 영원한 자산인 강이 한 권력자의 욕심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있습니다. 삼척동자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개발로 득을 보는 쪽은 권력자와 토건업자 그리고 투기꾼입니다. 국민의 반대도 선생(?)의 선견지명을 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계 이선달’이 강물을 팔아먹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두고두고 전설로 회자될 것입니다.
위 두 사건은 상징에 불과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읽는 당신도 저 절대 권력에 자신의 권리를 한줌 보태준 공범 또는 방조범이라고 한다면 누명이라고 항변할 수 없겠지요.
제게 이 사회의 대답을 대표하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법정스님처럼 살 수 없거나 자본주의를 버릴 수 없다면 ‘무소유’는 ‘가지되 최소한만 가지고, 기왕 많이 가졌다면 나누고, 많이 가지려거든 베풂을 먼저 생각하라’는 각성이 필요한 때라고, 더 나아가 인간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을 많이 소유하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