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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주의 주 의회 회기가 종료됐습니다만, 아마 특별 회기로서 연장될 모양입니다. 이번 회기에서는 경상예산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특별히 집중적으로 회의를 열 모양입니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진행된 회의 내용들이 거의 세금의 인상을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보니, 지금껏 공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경우, 세금을 인상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단 지금 세금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워싱턴주는 극빈자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삭감해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세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더 걷혀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세금 인상안 대부분이 간접세를 인상하자는 것입니다. 일단 담배세를 갑당 1달러씩 올리자는 안이 논의가 되고 있고, 지금까지 세금을 받지 않았던 병물, 그리고 주류와 관련된 세금과 더불어 콜라, 사이다 등 청량음료에 세금을 붙이겠다는 안이 나왔고, 또 비만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캔디 및 과자 등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세금들은 '사 먹는 사람들'이 모두 공평히 부과당하는 세금이라는 면에서 마치 조세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 논의되고 있는 세금 인상안엔 자동차 판매 세금을 인상하자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연봉 3만달러도 안 되는 사람이 자동차 판매에 부과되는 세금 1-2천달러를 내는 것과, 연봉 1백만달러 받는 사람이 마찬가지의 세금을 낸다는 것이 과연 형평성이 있습니까?
이는 전혀 형평성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어떤 의원은 아예 지금 주 소득세를 신설하자는 안을 내 놓은 걸로 알고 있는데, 제 생각엔 이게 훨씬 형평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안의 골자는 연봉 60만달러 이상을 벌고 있는 사람들에게 차등 부과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안이 훨씬 조세정의에 가까운 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저는 이곳 한인들의 이른바 '권익 단체'들에 대해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장악하고 있는 업종 중 하나가 식료품, 잡화점인 '그로서리'입니다. 아마 한인 자영업자들 중 가장 많은 수가 이 직종에 종사한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미국 어디서나 비슷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한인 그로서리 자영업자들은 이른바 '그로서리 협회'를 만들어 각종 정치적 이슈들에 대응해 왔습니다.
그 일례로 과거 랩 가수 '아이스 큐브'가 한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며 '블랙 코리아'라는 곡을 발표해 한인 리커스토어 업주들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표시했을 때, 그로서리 협회원들은 단결하여 그가 광고 모델로 나오는 맥주에 대한 불매운동을 펼쳤고, 결국 그의 사과를 받아낸 적이 있습니다.이런 이슈들에 대해서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협회도 사실은 그로서리 협회 뿐입니다. 이들은 일단 동포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주류 백인사회로부터 운영비와 물건 판매에 대한 리베이트 등을 협찬받아 꾸려지는 거의 유일무이한 단체이기도 합니다.
이런 단체가, 이번 워싱턴주 정부의 세금 인상안에 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못했다는 것이 저를 언짢게 합니다. 지금 간접세 인상이 논의되고 있는 물품들을 보면 모두 한인들의 주요 업종이라는 그로서리에서 판매되는 '주력'물품입니다. 맥주, 와인, 담배, 캔디... 이런 물건들은 업주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물품이라는 점에서, 그로서리협회는 이번에 정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같은 움직임에 적극적인 로비까지는 못하더라도 업주들이 단결하여 주청사 앞에서 시위라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크게 목소리를 합쳐 단결해야 할 시기를 실기하고, 그대로 주정부에서 정한 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주정부에서 세금에 관해 논할 때 인종적인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이들이 손쉽게 이런 물건들의 세금을 올린다고 결정할 수 있을 때엔, 그 배경엔 인종적인 변수도 분명히 고려됩니다. 한인들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떨어지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캔디나 담배, 맥주 등의 인상을 고려하고 있는 이 정치인들은 적어도 그들이 직접 캔디나 담배를 동네 가게에서 사 마실만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보통 한인들의 가게는 저소득층이 밀집한 지역에 자리하는 경우가 많고, 이 때문에 이는 인종과 더불어 사회 경제 체제 안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룹들에 대한 배척의 한 모습으로까지 보여집니다.
부모님과 함께 그로서리를 운영해 본 저로서는, 저런 물건들의 값이 오를 때 그것이 매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 담배값을 올려 끊게 만들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해서 담배를 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 잘 받은 백인 계층들이지, 삶의 희망이 없이 싸구려 맥주와 담배에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금 인상안에 대해 욕하면서도 담배를 피울 것입니다. 대신 더 싸구려 맥주와 더 싸구려 담배를 피우겠지요. 그리고 업주들의 매상은 당연히 떨어지게 되고, 쪼잔한 캔디 세금 때문에 몇 센트의 돈이 모자란다고 손님과 싸우는 일도 더 빈번해질 것입니다. 그러잖아도 그로서리 업주들은 늘상 절도나 강도라는 현실적인 위협과 직면하고 있는데, 이런 일로 인해서 스트레스도 더 늘어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주정부의 회기는 조금 더 늘어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겐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로서리 협회가 각성하고 업주들을 모아 주청사 앞에서 플래카드 들고 소리라도 쳐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조금이라도 '한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테니까요. 한인들의 권익을 위한다는 단체들, 지금부터라도 어떤 것이 한인들의 권익을 진정으로 보호하는 것인지 재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