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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03년 고대 백제 무령대왕이 일본 나라(奈良)현 오시사카(忍坂)궁의 친아우 오호도 왕자(후에 게이타이 일왕이 됨)에게 청동거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을 보냈다.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는 이 거울의 둘레에는 ‘사마(斯麻·무령대왕의 이름)’가 "아우의 장수를 빌며 이 거울을 보낸다."는 형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명문(銘文) 48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일부 일본 학자들은 6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간지(干支) 연대를 왜곡까지 해가며 거울을 보낸 시기를 383년으로 낮춰 무령대왕의 청동거울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 논란은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묘지석에서 ‘사마’라는 무령대왕의 휘(諱)호가 발견돼 일단락됐다.
수백향은 무령대왕의 딸이며, 일본 계체왕의 왕후다.
504년 왜왕 무열왕이 학정을 일삼자, 무령대왕은 왕족인 마나군을 파견해 일본의 백제왕족인 남대적을 지원하였으며 505년 이복 형제인 사아군을 왜에 파견하여 동생을 일본의 계체왕(계체천황)으로 옹립시킨다.
계체왕은 무녕대왕과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사이였다. 즉, 두 사람의 어머니는 사마를 낳은 개로왕의 후궁으로 곤지의 부인이 된 여성이다. 그래서 무녕대왕이 청동거울을 보내어 남동생되는 계체왕의 무병장수를 빌어준 것이다.
계체왕은 무령대왕의 덕을 받아 등극하였으므로 본부인을 왕후로 삼지 않고 무령왕의 딸인 수백향을 맞아 왕후로 삼았으며 본부인은 첩들과 함께 후궁으로 삼아 수백향을 받들 것을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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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향의 아들이 흠명왕으로 왜왕이 되었으나 그 출신에 대한 기록이 <일본서기>에서는 누락되어있다. 백제왕실과의 관련을 은폐하기 위한 고의 누락으로 보인다.
계체왕의 이름은 여느 다른 일본왕들처럼 아름다운 수식어가 하나도 없이 달랑 남대적(男大迹), 원본저(袁本杼) 천황이다. 발음이 모두 '오호토'인데 그 의미는 대제(大弟)왕, 동생왕이다.
즉, 형의 나라는백제본국이고, 야아마토대화왜 조정은 백제의 분국으로써 아우 나라가 된 것이다.
계체왕의 궁궐이름부터도 제국(弟國)이니 확실히 아우국가다. 계체(繼體)의 의미도 본체(本體)를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본체 모국백제를 뒤에서 따른다는 뜻이 된다.
무령대왕은 공주인 수백향 황녀(手白香皇女)를 보내어 계체왕의 왕후로 삼아 계체왕의 체면과 지위를 살려 주었다. 두 사람 고분은 가까이 있는데 수백향 황녀 고분이 계체천황 고분보다 더 크다.
우주의 통치자가 3신 상제 하나님이라면 지구의 통치자는 마고.환인.환웅.환검이시다. 고로 지구의 중심이 되는 한국은 지구의 천상이 되기 때문에 고대 한국의 임금들은 천제.천왕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한국에 바치는 선물들을 조공이라 하였다. 조공이란 단군조선에 바치는 공물이란 의미에서 나온 한자어다. 조회란 단군조선의 임금이 주재하는 회의를 의미한다.
동방의 삼신산이 되는 불함태백(백두)산에서 밝땅(배달)국을 세우신 환웅천왕께서 유라시아 12연방국가들을 다스린 환인천제에게 받은 '천부인'은 청동거울.칼.북이다.
청동거울은 태양처럼 밝게 세상을 비추라는 의미이고, 칼은 악귀를 제거하라는 의미이고, 북은 양심의 소리을 크게 울리라는 의미라 할 것이다.
환국과 배달국과 단군한국을 계승한 부여에서 나온 백제는 야마토왜왕조를 기반으로 열도를 평정하여 오늘날의 일본천황가의 주인이 되었다. 따라서 반란을 도모했으나 목이 베어 죽은 단군한국의 두지주(두만강 지역) 예읍 추장 소시모리를 시조로 삼고 있는 일본왕실의 천부인 사상 또한 한웅천왕이 환인천제에게서 받아 온 천부인에서 비롯된 것임을 당연하다 할 것이다.백제왕족이 계승한 일본왕실에 최고의 성스러운 예물로 삼는 삼종신기(三種神器)가 있는데 그것은 청동거울,칼,곡옥을 말한다. 한민족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신물이기도 하는 곤옥은 일본천왕가의 무병장수와 천세만세를 의미한다.
그리고 단군임금들이 제후국 왕들에게 통치권을 인정하는 상징으로 비파청동검을 제작하여 보냈듯이,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백제도 동일하게 각 담로 왕(제후)들이나 가족.친척들에게 통치권을 인정하는 상징물로 환도대도나 청동거울을 제작하여 보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 유물로도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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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녕대왕의 아들되는 성왕은 일본왕(킨메이 천황)까지 겸임하였고, 성왕의 자식들이 일본 천황들을 계승하여 나갔다. [삼국사기]에는 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수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는 열도로 건너가 천왕노릇하다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무덤도 열도에 존재하고 있다.
[삼국사기]기록의 신뢰성은 개로왕의 아들 무녕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한 [일본서기]기록이 더 정확하다. 고고학적으로 무녕왕릉의 출토로 무녕왕이 동성왕의 아들이 아님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 성왕의 경우에도 아들 위덕대왕에게 백제왕의 자리를 물려 주고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왕(킨메이 천황) 노릇을 하다가 사망했다고 해야 맞다. [삼국사기]는 신라왕족 김부식이 신라사관에 입각하여 기록한 사서로서 백제를 저주하며 성왕을 신라군이 참수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성왕은 일본천황가가 조상신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 백제대왕이다. 현재 일본 천황가가 백제황실이라는 것을 알면서 일본이 부정하려는 이유는 역사적 열등감때문이다.
따라서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하여 백제의 22담로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침략전쟁을 통하여 피해를 당한 식민지 국가에 공식 사죄와 함께 배상을 하고,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고 무녕왕 후손들처럼 모국 한국을 방문해서 조상의 묘에 제사도 지내고 경제문화적 교류도 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좋다.